예레미야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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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1-13
예레미야 2:1-13
예레미야, 예레미야서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결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지요? 네.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 16장에 보니까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하셨습니다. 그만큼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역하던 시대가 가정생활과 사역을 병행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심각한 영적 위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어두운 시대에 사역했던 비운의 선지자였습니다. 이제 곧 나라가 망할 건데 쳐들어오는 바벨론에 항복하고 포로로 끌려가라는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기로 작정했으니까 포로 생활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① 하나님과 갈등했고 ② 자신이 전해야 하는 말씀 때문에 힘들어했고 ③ 유다 백성들에게 핍박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며 눈물이 마르지 않았기에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아라. 내가 듣지 않겠다” 하십니다. 백성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거절하시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 백성들이 거절하고 거절할 뿐 아니라 때리고, 가두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롭고 고된 사역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도 맞아 줄 아내나 반겨 줄 자녀도 없고, 하소연할 친구도 없는 그런 사람이 예레미야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환상을 보고 어떤 말씀을 전하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설교라기보다는 셀 모임을 하듯이 말씀을 읽고 묵상한 내용을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서 예레미야는 예언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 이제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치라고 하십니다. 두 가지의 외침입니다.
① 먼저 청년 때의 인애 ② 그리고 신혼 때의 사랑입니다. 인애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인데 “헤세드”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말할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청년 때의 인애라고 하는 것은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뜻대로 살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인애와 사랑의 약속을 성실히 지키셨는데 백성들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휴일 아침에 TV를 보는데 아마도 “인간극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70대 할아버지가 시골 농촌에서 구순이 넘으신 모친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시골생활 정리하고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로 오시라고 계속해서 설득했지만 어머니는 시골 고향이 좋다고 떠나지 않습니다. 고령인데도 고된 농사일과 돌아가신 남편의 오랜 병 수발로 할머니도 몸이 쇠약해지고 이젠 나이가 많아 거동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들이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어머니를 모십니다. 늙은 모친을 등에 업고 동네 마실도 나가고 목욕도 시켜드리고 꽃단장도 해드리면서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면서 살아갑니다. 내용 중간에 프로그램 담당자가 할머니에게 질문을 합니다. “할머니!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많이 편찮으셨다면서요? 어떻게 그렇게 1-2년도 아니고 10년 이상을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돌보실 수 있었어요? 그때 할머니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수십년 전 찍은 결혼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줍니다. 결혼할 때 영감하고 사람들 앞에서 약속했거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죽을 때까지 서로 지켜주고 사랑하기로. 그래서 그렇게 했어.”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언약에 관한 레갑 자손 이야기를 예레미야 35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 간의 언약도 이렇게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린 백성들아! 하시면서 상당히 서운해 하십니다. 이 내용은 나중에 각자 경건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묵상하시고 셀에서도 풍성하게 나누면 좋겠습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호와를 위한 성물”로 택하셨습니다. 성물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 하나님의 것이 잖아요. 이사야 43장 1절에 보면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또 출애굽기 19장 5-6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3절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성물이고 첫 열매니까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는 모두 벌을 받고 재앙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9절에 보니까 조금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싸우시겠다고 하세요. 3절에서는 지켜 보호하시겠다고 하시고 9절에서는 이스라엘과 / 그 자손들과도 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시는 걸까요? 언약에서 떠나고 죄악에 물든 이스라엘을 벌주고 징계라도 해서 돌이키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 우리와 싸우시겠다고 합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로운 인류의 모델처럼 세우셨잖아요.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8장 3절입니다.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라”.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언약을 떠나서 가나안 문화에 금방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너희들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든 나 여호와를 경외하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아라”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떠난 것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만일 가나안 땅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바라고 추구하는 삶이 가나안 족속과 다를 것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남의 집, 남의 땅에 들어가 다 뺏어서 자기 자식들한테 줬는데 그 사람들과 똑같은 죄악의 삶을 살아간다면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다시 말하지만 가나안 땅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 하나님의 백성이 추구하고 바라는 삶이 가나안 족속과 다를 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의 이기적인 부족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단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신차리고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그들과! 우리와!”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만 우리가 바라고 추구하고 행하는 삶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4-5절, 하나님을 멀리 떠나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좋아해서 결혼하잖아요. 세월이 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될 것을 염려하셔서 미리 경고도 하셨습니다
뭐라고 경고하셨냐면 신명기 8장 13절에 보면,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결국 우리 마음이 변하는 건 언제냐면 풍요로울 때 배부르고 등 따뜻해지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지 않아도 언제나 물을 얻을 수 있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없어도 먹을 것이 풍족한 세상이니까요. 하나님 도우심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5절, 하나님에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헛된 것 따라갔다고 말하는데 헛되다는 히브리어 헤벨(הֶ֫בֶל)인데 원래의 뜻은 전도서의 전도자(코헬렛)이 말하듯이 입김과 같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금방 사라져 버리는 헛된 것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 헛된 것은 우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따라갔다. “너희가 바람과 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따라가기 시작했구나”. “결국 풍요라고 하는 게 너희를 망치고 나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려 놨구나”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그냥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6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까맣게 잊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쓸쓸한 일 가운데 하나가 잊혀지는 것, 내가 잊혀지는 존재가 되는 것일 겁니다. 주변 사람들, 친구, 심지어 자식들에게서도 잊혀지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요?
신명기 32장 1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견디게 해주신 하나님께 등을 돌려버리는 것. 이것이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7-8절은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의 더러운 행위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셨고 열매를 먹게 하셨는데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7절의 “역거운 것”이라는 표현은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가증스럽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역겹다, 가증스럽다’는 히브리어로 “토에바”(תּוֹעֵבַה)인데 이 표현이 말라기 2장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말라기 1장에 보면 제사(예배)를 주관하는 제사장, 레위인들이 타락하고 /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할 선지자들도 침묵하고, 지도자들이 타락하니까 하나님께서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희가 드리는 예배도 예물도 받지 않겠다” 하십니다. 심지어 말라기 2장 1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가증스럽다고 하십니다. 이때 사용된 “가증한 일, 가증스럽다”는 표현이 오늘 본문 2장 7절에 사용된 단어 히브리어 “토에바”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선민 이스라엘의 타락. 하나님은 지금 너무 속상해하고 계신 거예요. 정말 이것은 예레미야 시대의 문제만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동일한 문제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많이 욕을 먹고 있잖습니까?
10-11절입니다. 깃딤 섬들은 사이프러스. 사도행전에 나오는 구브로 인근에 있는 섬들(고대 페니키아의 식민지 섬들),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서쪽 방향의 민족들을 말합니다. 그다음에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보아라 하십니다. 게달은 요르단 동쪽 사막의 유목민, 시리아에 있는 아라비아 족속들을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한 서방세계와 동방세계를 망라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었느냐? 그런 일이 없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백성은 나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꿨다 하십니다. “헛된 것, 무익한 것” 헤벨! 한순간의 헛된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떠나버린 백성들을 하나님은 지금 안쓰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상함이 나타나는 대목이 그다음입니다.
12-13절 말씀. “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어떻게 내 백성이 나를 등지고 헛된 것들을 향하고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너 하늘아 보고 있지? 너 하늘아 이 일을 보고 놀라라.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그런 의미입니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그리고 백성의 죄를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오늘 말씀 나눔 서두에 질문을 드렸잖아요? 예레미야, 예레미야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저는 개인적으로 “바벨론 포로기 70년”과 “새 언약”이 떠오릅니다. 다니엘도 예레미야의 책을 통해 바벨론 포로기의 연수를 깨달았다고 하잖아요(단 9:2). 예레미야는 유다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BC 586년에 남 유다가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BC 538년에 페르시아 초대 황제인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서 유대인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포로 생활이 끝난거죠. 그러면 586년에서 538년 포로 생활은 48년인데 왜 성경은 70년이라고 말하는 걸까요? 남 유다가 멸망하고 70년 후에 어떤 일이 있었던거죠? 네 맞습니다. BC 516년에 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 등에 의해 제 2성전이 건축됩니다. 성경은 바벨론 포로기를 성전이 완성된 BC 516년까지 70년을 말합니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전! 결국 이방 땅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세월, 그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가 포로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제 2성전이 건축되고 얼마 안가서 이스라엘은 또 다시 타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아까 말라기 말씀드렸죠. 하나님께서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희가 드리는 예배도 예물도 받지 않겠다”, “너희가 드리는 예배도 가증스럽다”. “토에바”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리고 앞으로 읽게 될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임재, 새 언약의 완성이며 참된 성전 되시고 생수의 강이 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그 성전의 기능과 역할을 우리 성도들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고전 3:16)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20)도 읽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제 앞으로 예레미야서를 지속적으로 읽고 묵상하게 될 텐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새 언약의 완성되신 예수님,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귀한 교제의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면서 말씀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