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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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
M.P : 교회 공동체는 늦더라도 함께 가야한다.
레위인들을 데리고 옴
느디님 사람들을 데리고 감
포로 귀환에 함께하게 된 자들
M1 :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M1 :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서론
아하와 강가에서 3일 간의 점검
(예화) 군대에서 행군 전 양말 챙기기, 개인 장구류, 인원 점검(*)
1. 열 한 명의 족장을 통해 레위 사람들을 소집 : 새로운 유월절, 구원의 날
왜?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 귀환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믿고 있다.
에스라 7:8-10 (ppt)
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년 다섯째 달이라
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ppt)
첫째 달은 “아빕월”이라고 하는 유대인의 달. 이 달은 모세가 출애굽해서 애굽으로부터 나온 달이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율법”을 찾는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출애굽한 이후 했던 것이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은 모티브를 연상하게 한다.
에스라와 성경 저자는 이러한 이유로 바벨론 2차 포로 귀환을 “영적인 출애굽”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영적인 출애굽을 진행하려는데 열두 지파들 중 레위 지파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라는 11명의 족장들을 파송해서 레위 지파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에스라 8:17
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가시뱌 지방은 레위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11명의 족장들을 파송한 것도 에스라의 의도가 담겨있다.
마치 12지파의 족장들이 다 있어야 하는데 1지파의 족장이 없는 것처럼, 지금 다른 지파의 유대인들은 다 모였는데 유일하게 레위 지파 사람들만 모인 것으로 보이게 해서 레위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1) 레위인들은 왜 모이지 않았는가?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레위인들은 왜 2차 포로 귀환에 함께하지 않았는가?
(예화)
중, 고등학교 때 레위인들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한참 “레위지파”라고 하는 찬양단이 좋은 찬양들을 내고 있었고,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제사를 섬기는 특히 제사장들의 가문이 포함된 레위 지파에 대한 환상.
특히 찬양팀을 열심히 하고 있던 나에게는 레위 지파는 마치 예배를 위해 찬양을 열심히 섬기는 모습으로 이미지가 남아있어서 그런 환상이 있었던 듯
그러나 이것은 아주 큰 오해였다. 오늘 본문을 보면 레위인들은 포로 귀환에 참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1차 포로 귀환 때 모든 유대인들이 포로 귀환을 하지 않은 이유와 같다.
그것은 그 바벨론에 이어서 페르시아의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로로의 생활이 익숙해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사실 예루살렘에 1차 귀환을 완료한 유대인들 중 레위인들이 성전 일을 섬기기에 충분한 인원이 있었다.
만약 레위인들이 페르시아에서의 삶을 포기하면 그들은 그동안 편안하게 살아오던 안정을 포기해야하고, 새로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 섬기는 일을 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2. 느디님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늘 본문에서 눈에 띄는 특이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느디님 사람들”이다.
(ppt)
느디님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사람들의 이름의 뜻은 “바쳐진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유대인 랍비들의 해석은 여호수아와 화친을 맺었던 가나안 족속 중 기브온 족속의 후손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하진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들의 이름이 히브리어 이름이 아닌 이방인의 이름들이었던 것으로 보아 유대인들의 역사 중 흡수된 이방인인 것은 확실하다.
또한 이들의 역할은 성전에서 하는 허드렛일을 하는 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이방인이었지만 그저 여호와 하나님이 좋아서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버리고 이스라엘에 흡수된 자들이었다.
비록 성전의 허드렛일을 맡을지라도, 그 일을 하면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것 자체가 좋아서 모인 자들이었다.
느디님 사람들은 포로 귀환에 함께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느디님 사람들은 차별받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포로귀환이 되기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 섬기는 일에 나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선택받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와 같이 여겼다.
엄밀히 말하면 유대적 관점에서 느디님 사람들은 포로 귀환에 함께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3.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의 차이점과 공통점
레위인과 느디님 사람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1) 차이점
국적 신분
먼저 그들은 국적이 다르고, 신분이 달랐습니다.
레위인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확실히 이방인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국적이 다른 것과는 다릅니다.
당시 국적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자체로 차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당시 문화가 그랬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었습니다.
아무리 느디님 사람들이 원해서 유대인들에게 귀속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 유대인들은 느디님 사람들을 어디까지나 유대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방인으로 차별했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신분이 달랐죠.
레위인들도 성전에서 제사를 위해 섬기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물, 찬양 등 여러가지 성전에 관련된 일들을 담당했습니다.
느디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성전에서 제사를 위해 섬기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물이나 찬양과 같은 일에 손대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맡겨진 일은 허드렛일일 뿐이었습니다.
포로 귀환에 참여하기 이전 마음
또한 그들은 포로 귀환에 참여하기 이전에 마음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느디님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자원하여 이방인으로서 차별을 감수하고 유대인에게 종속됩니다.
포로 귀환을 참여하기 이전에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좋든, 싫든 성전을 섬기는 일을 하는 자들이 돼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느디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성전을 섬기는 일을 하고 싶어서 유대인에게 종속되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공통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2) 공통점
모두 지명받은 자들이었다.
에스라 8:20 (NKRV)
20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지명 받은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소집된 레위인 40명과 느디님 사람들 220명은 모두 지명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에스라의 명을 족장들이 받고 족장들에 의해서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지명의 최초 시작이 누구였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시작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을 부른 것은 에스라였지만,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에스라가 받은 소명은 포로 귀환을 과거 선조들이 해내었던 “출애굽”의 소명과 같이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 소명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부르심으로 시작된 것이죠.
그 부르심의 계획 안에서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은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4. 이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명확한 진리 한 가지를 알게 됩니다
(ppt)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자들은 끝까지 데리고 가신다”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페르시아에 머무르고 싶은 부정적인 마음이든, 성전에 봉사하고 싶은 긍정적인 마음이든 하나님은 지명하신 자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십니다.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 레위인이든, 태어날 때부터 이방인이었든 하나님은 지명하신 자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십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을 절대로 버리거나, 놓고 가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데리고 가십니다.
그들이 그 부르심을 피하려고 했든, 자원하려 했든 다 데리고 가시는거에요.
그리고 그 부르심의 자리로 이끌려 갔을 때 가게 된 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전이었습니다.
현 시대로의 메시지
성도 여러분. 교회 공동체는 어떤 곳일까요?
교회를 설명하는 정말 많은 설명, 수식어들이 있을 것입니다.
(ppt)
근데 그 중 특별히 “에클레시아”라는 신약의 교회라는 단어가 있죠.
신약에서 교회라는 단어를 말할 때 헬라어 원어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르심 받은 자들”의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 받은 자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빚대어 살펴보면 레위인들, 느디님 사람들이 모두 이 에클레시아이지 않습니까? 이들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 받은 자들, 교회의 모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바로 레위인들이기도 하고, 느디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레위인들, 느디님 사람들이 성전을 세우고, 성전을 섬기는데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성전을 세우고 섬기는, 즉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고, 교회 공동체를 섬겨가는 자들로 부르심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약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분명히 부르셨을 것입니다.
물론 개개인에 따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방식이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건 오랜 시간이 걸렸든, 정말 짧은 시간이 걸렸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 공동체를 섬기고, 세워가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을 때 여러분은 느디님 사람들일 수도 있고, 레위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요?
우리가 부르심 받았을 때, 어떤 분들은 레위인들처럼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사역에 힘쓰는 것이 힘든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어떤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희생하고 일부 포기하는 것이 힘든 마음이 들 수 있는거죠.
또한 느디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느디님 사람들처럼 교회 세우는 그 사역에 마음이 커서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듯,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자들은 끝까지 데리고 가십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든, 짧게 걸리든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정말 중요한 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해나가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마음이 자원하는 마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최대한 자신의 삶에서 소중해하는 것들을 버리지 않으려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꺼이 희생하고 자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큰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실수는 제가 정말 많이 했던 실수입니다
그것은 나의 마음만큼 누군가가 사역에 큰 마음을 가지지 않아서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혹은 화를 내고 공격하거나 이러한 모습입니다.
근데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지명받은 자들이죠. 지명 받은 자들은 모두 같이 함께 가야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에스라와 같은 태도로 사역을 해야합니다.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성전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다시 한번 모든 이들을 뒤돌아보면서 함께 가야할 자들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시간이 더 걸릴지라도 함께 가는 것이죠.
지금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 태도를 이해하려면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현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모든 원리는 경제의 원리로 흘러가고, 효율성의 극대화를 꿈꾸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 많이 쓰는 단어 “가성비” 가성비가 무엇인가요? 가격 대비 성능입니다. 극단적일 수도 있겠지만, 저 단어를 많이 쓰는만큼 우리 시대가 얼마나 경제 원리에 의해서 효율성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소한 물건을 사더라도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집니다. 시간적인 측면에서 봣을 때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빨리 끝내야 효율성을 인정받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의 입장에서 교회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의 태도는 세상의 가치관에게 무시받는 태도입니다.
가성비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하면 우리가 교회 사역을 하는 태도는 가성비적으로는 꽝입니다.
시간이 늦더라도 모두 같이 가야한다면 시간도 많이 들고, 노력도 많이 들고, 감정도 많이 듭니다.
여러분들 사역을 하시면서, 모든 자들이 같이 가려는 노력을 해보신적 있습니까? 그 노력을 해본 분들은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오늘 분명히 우리는 확실한 진리를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확실한 진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끝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가신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목장에 속해 계신다면, 목장이 교회로 세워져가는데 여러분들은 느려도 함께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거든요.
혹여나 본인이 느린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그 부르심에 응하는 자로서 본인이 느려도 함께 가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찬양팀에 속하셨다면, 찬양팀 모두가 교회로 세워쟈가는데 느려도 함께 가야합니다. 레위인들, 편안한 삶에 머무는 것이 좋아서 늦는 모든 자들과 느려도 함께 가야합니다.
여러분들이 교육부서에 속한 교사십니까? 여러분들 반에 속한 학생이 느린가요? 끝까지 함께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학생들을 부르셨거든요.
여러분들이 속한 가정을 교회로 만들어가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까? 그러면 느려도 함께 가야합니다. 그 가정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거든요.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는 이게 되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와 시대상이 그렇지 않아서 우리가 항상 그런 태도로 사역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너무 손해로 느껴질 때가 많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받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한번 이것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같이 가시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나요?
창세 전부터 참으셨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장)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이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시고 2000년전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리고 2000년 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부르심 받고 나아오기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영원한 인내를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은혜가 그렇게 큰 겁니다.
우리가 사역할 때 교회 공동체를 세우면서 느려도 공동체가 함께 가야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원한 인내하시는 은혜를 받았고, 그 받은 은혜 때문에 느려도 함께 갈 수 있는 겁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성전을 세우는, 교회를 세우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레위인도 있고, 느디님 사람도 있고, 에스라도 있고 또 어떤 땐느 우리가 에스라 같기도 하고, 느디님 사람 같기도 하고, 레위인 같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느려도 함께 가는 교회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맡고 있는 사역의 현장 속에서, 심지어 뭔가 직분을 맡지 않은 분들도 여러분은 부르심의 자리로 나아온 자들입니다.
그 가운데 느려도 함께, 한번 다시 돌아보고 함께 가는 자들이 되기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