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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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여러분 계속되는 예수의 가르침에 좀 지치셨나요? 요즘 시대는 드라마 한 편을 보기 힘든 빠른 시대이지만 때론 정주행한다면서 하루 종일 시즌을 몰아보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정주행보다는 유튜버의 요약을 보면서 이야기 흐름을 즐기는 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정주행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 창세기부터-요한계시록까지 한 번 정독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 오랜 신학을 하면서 가장 감사한 일이 있다면 성경 66권을 모두 한 번은 공부를 했고 그 중에서도 신약의 4 복음서와 요한복음을 더 세밀하게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 학자들이 요한복음을 이르는 말이 있는데 ‘어린 아이가 장난치만한 물 깊이와 코끼리가 빠질 만큼의 깊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기적의 이야기와 예수의 수난 이야기의 역동성은 마태, 마가, 누가와 달리 예수께서 주인공으로 읽는 이들에게 어드벤처급 몰입감을 주는 반면 지금 통과하고 있는 예수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예수가 누구신가를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장면이지만 쉽게 접근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주행’이라는 것은 성경을 처음부터 읽어 1독의 목표를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1독을 통해 목적하는 바가 1독 2독에 읽음 자체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예수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게 알아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낮은 물에서 안전하게 노는 것은 아이에게 중요하지만 성장하면서 그만큼 깊이 있게 성경을 아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배우라’, ‘굳게하라’, ‘성장하라’, ‘말씀의 진보’ 등 다양한 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예수가 누구신가?라는 주제는 성경 전체의 주제이고 이러한 주제에 가장 부합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복음서와 그중에 요한복음 안에서 예수께서 직접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는 부분은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다만 설교자가 문제라 여러분을 지치게 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들께서 마치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를 아는 지식이 완전해지길 바라면서 계속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요한 단어는 ‘빛’입니다. 빛이라는 은유는 앞서 살폈던 물과 함께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자신을 대중에게 ‘나는 00 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가 놀던 얕은 물이 아니라 깊이 있는 의미에서 ‘선명함’을 제시하는 비유입니다. 특히 ‘물’, ‘빛’과 같은 매개체가 특성이 분명하고 ‘00과 같이’라고 직유적인 표현보다 더 분명한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과 ‘빛’이 갖는 속성을 함께 공유하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에서 ‘빛을 생명의 빛’이라고 정의합니다.
본문을 다루기에 앞서 기억 저편에 있겠지만 1장 7절에서 세례 요한을 설명하면서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계속해 9절에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세례 요한이 예수를 증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빛’이며 그 빛을 ‘생명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저자는 빛을 어둠과 대조적으로 사용됩니다. 빛이 생명 또는 아는 것과 같은 메타포라면 어둠은 모르는 것, 심판, 죽음과 같은 메타포로 활용이 됩니다. 그래서 잘 아시는 3: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본문에 이어서 19절에 예수를 믿지 않는 정죄가 빛이신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 어둠을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왜 어둠을 사랑했냐하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입니다. 표현이 어렵죠. 쉽게 바꾸어보면 ‘아침 눈부신 햇살을 피해 어두운 커텐을 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필 9장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통해 어둠에 갇혀 그 세상에 살던 사람이 눈을 뜨고 밝은 빛에 노출되는 것처럼 빛은 이상이나 환상, 또는 이미지적인 요소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입니다. 마치 ‘물’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실제는 빛과 어둠의 현실 즉 밤과 낮을 비교하면서 밤에 다니지 말고 낮에 다니라는 것으로, 그리고 아직은 해가 있을 때를 기회가 있다고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데 12장에는 결과적으로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12:36)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어둠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15절에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즉 우리 사는 세계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둠이라고 말하지만 당장 우리가 먹고 살고 있는 세상을 부정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한 달의 비용이 나오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사고 팔뿐만 아니라 살고 죽는 것까지 결부 시켰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임금’이라 불리는 사탄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주의 해야할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거나 또는 세상을 무시하고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서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이스라엘로부터 저주받은 ‘사마리아 인’ 지금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고 있는 ‘하마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그의 신분이 유대인으로 바뀐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녀가 부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지난 주 간음한 여인이 비록 돌로 맞아 죽을 위기를 모면했다고 해도 그녀의 삶은 어쩌면 죽음보다 못한 삶을 계속하고 있을 것은 불보듯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이 잘되고 잘 풀려서 부자가 되는 것도 분명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습니까? 그런 현실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찾아오는 고통은 같습니다. 다만 부자는 돈으로 고통을 막거나 약화 시킬 수 있다면 가난한 자에게는 그러한 수단이 없으니 고통을 그대로 받거나 아니면 몇 곱절 더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나라’ 소속이 좋다! 이럴 때 무슨 근거로 좋냐는 것이죠. 대부분 여기서 쉽게 수긍되지 않습니다. 예배하는 즐거움이 누군가 십만원즘 쥐어주는 돈보다 더 즐거운가? 이렇게 해보십시오. 그리고 금액을 계속해서 올려 보세요. 얼마면 흔들릴까요? 저는 한 천만원즘 주면 흔들릴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주일을 지킨다. 안지킨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만큼 내 마음을 둔 곳,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으로 부터 삶을 받고 살아내고자 하는 우리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찬양과 뜨거운 선율에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을 해도 막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가 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법을 들먹이며 예수의 증언에 대해 의문을 제시합니다. 신명기 17:6 “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신명기 19:15 “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러한 법조문에 근거는 분명합니다. 당연히 예수께서는 자신의 증언과 아버지의 증언으로 인하여 성립된다고 하셨지만 그들은 판단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그렇게 합니다. 19절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은 이미 예수의 앞선 5장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와의 관계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께서 일방적으로 말씀하시는 주장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성경의 말씀’을 믿지 않고 외적인 것을 찾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근거, 눈에 보이는 사실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영상이 나와도 음성이 들려도 왜곡하거나 아니라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앞서 그들이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세례 요한의 증거도 모세의 율법도 충분히 증거로 채택될 것이지만 예수의 권위와 권위를 주신 아버지의 증거라면 충분하고도 넘치는 것이죠. 마치 내 아버지와 어머니임을 증거하라고 하면 요즘은 당연히 dna와 주민등록등본을 발급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렇게 말하겠죠. ‘우리 아빠와 엄마가 맞다’ 왜 ‘우리 아빠와 엄마니까’ 이렇게 말이죠. 시대가 이제는 이런 주장을 믿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판단은 이렇듯 dna 처럼 아주 명쾌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정말로 살면서 이런 명쾌한 것들이 있음에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까요? 이러한 명쾌함이 빛처럼 작용할까요? 세월호 사건이나 이태원 참사도 그렇고 명령을 내린 카톡 등 분명해도 채상병 사건이 명쾌하게 해결되던가요? 그 흔한 급발진 사고의 규명은 만든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운전자가 증명을 해야하는 등 막상 우리가 당사자가 되면 증거의 문제,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과학적으로 담배는 암을 일으키는 유발 원인이라고 규명이 되었지만 국가는 담배를 판매하고 각종 유사한 담배들이 등장해 그 어느때보다 흡연인구는 많고 더 어려졌습니다. 먹으면 살찌고 운동하면 건강하다는 사실은 논문이나 과학적인 뒷받침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안하는 건가요? 이렇게 말합니다. ‘귀찮아서’, ‘하기 싫어서’ 이런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요? 바로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저 역시 오래전 다이어트를 시작했던 이유는 나의 건강이나 과학적인 사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내 삶의 일부인 건강을 유지하고 가족을 위해서도 필요한 빛의 방향을 따라 어둠의 반대편을 보았기 때문이고 2015년 이후 아직까지도 요요현상 없이 지속하고 있습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어둠의 영역인 잠과의 싸움이듯 무거운 눈꺼풀도 뚫고 빛의 영역으로 잠자는 자를 괴롭히듯 깨웁니다. 하지만 암막 커튼으로 아예 빛을 막듯 어움에 있는 것이 편한 상태를 만들려는 육체를 따라 살면 결국은 심판자 앞에 서게 됩니다. 삶에 대한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자들에게는 빛을 따라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큰 착각은 바리새인들도 생명의 근원을 믿고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방식대로 찾습니다. 21절에 ‘너희가 나를 찾다가’라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율법을 받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 의식까지 투철한 자들이지만 결국 사람인 예수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는 ‘갈릴리의 사람, 배운 적이 없는 사람, 목수의 아들, 신을 모독하는 자’일 뿐입니다. 그렇게 찾다가 찾지 못하고 죽는 죽음이 어둠의 결과입니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의 최후를 예수께서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들은 ‘죄 가운데서 죽’습니다. 즉 하나님 없이 죽는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채 죽는다. 하나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죽는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빛이 싫어서 자신의 방을 암막 커튼으로 둘러 버리는 것이 죄라는 것이라 비유할 수 있습니다. 빛이 싫어서, 빛이 주는 영향이 싫어서, 빛 가운데 행하기 싫어서 이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빛이시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비록 우리가 성경의 창세기부터 읽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말씀에서 알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신 후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예수님을 주라고 (고린도전서 12:3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시인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빛을 받으면 변화는 결과적으로 따라 옵니다. 요한은 그 후에 우리에게 요한1서 1:7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 가운데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함을 통해 우리가 빛 가운데, 빛을 받은 자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커튼을 뚫고 들어온 빛의 밝음은 잠 속에 우리를 깨웁니다. 깊은 잠으로 빠지지 않게 합니다. 생활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일깨웁니다. 지구는 태양의 1% 빛 만으로도 그 밝음의 영향을 받고 모든 자연계가 생명으로 반응하듯 저와 여러분이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빛 가운데로 반응되기를 바랍니다. 20절 ‘이 말슴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떼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예수님은 바로 성전에서 말씀이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처럼 지금 빛을 발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예수를 체포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빛의 영향 아래 있는 것입니다.
어둠은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그래서 의사도 약을 드세요가 먼저가 아니라 밖에 나와서 빛 가운데 걸으세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주어진 환경에서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따라 빛 가운데로 행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