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들어야합니다 02(롬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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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들어야합니다 02(롬 1:8-17)
<서론>
교실에서 흔히 있는 광경입니다. 수학시간입니다. 선생님이 칠판에 무엇인가를 씁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난시간에 배운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내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는 학생들을 향해 돌아선 선생님이 말합니다. ‘자! 애들아, 지난시간에 배운 것 기억하지? 누가 이 문제를 풀어볼까?’
학생들은 긴장합니다. 선생님은 누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는지 아니면 못 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답을 아는 학생은 확신에 찬 눈으로 전혀 거리낌 없이 선생님을 응시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학생은 왠지 불안하게 선생님과 마주치는 눈빛이 바르르 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딱 두 가지입니다. 답을 모르거나, 확신하지 못하거나
모르거나 확신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이렇습니다. 자신감 없고 두려워합니다.
지난 주 이번 주,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는 말씀을 따라 「다시 복음을 들어야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비록 교회 다니고 있지만 우리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하는 첫 번째 이유는, “신령한 은사” (11); 복음이신 예수만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하는 또 다른 이유를 살피겠습니다. 16절과 17절을 통하여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16a)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혔었고, 데살로니가에서는 쫓기듯 나왔으며, 다메섹과 베뢰아에서는 몰래 빠져나왔으며, 아덴(아테네)에서 철학자들의 비웃음을 샀고, 고린도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았으며,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도록 버려지기도 했고, 예루살렘에서 신성모독자요 율법 파괴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뿐 더러,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울이 이토록 배척 받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이 없을 때는, 율법박사로서 철학자로서 명문가 명문학교 출신으로 사람들에게 환영 받고 자랑스러워 할 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이전에 자랑하던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비록 환영받지 못하고 고난 받는다 해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이교도 제국의 중심 로마에까지 가서 그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정으로 휩싸였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4차 전도여행은, 스스로 죄수를 자청해서 로마의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는 것(사도의 일)을 자신의 특권으로 알고, 그 어떤 이유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디를 가든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구원한 예수이름의 능력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본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를 「능력」 「구원」 「믿음」 「의(義 )」네 단어로 설명합니다.
펜으로 네 단어에 동그라미를 치십시오!
「능력」 “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d)
무엇보다 바울은 ‘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합니다.
능력이라는 단어는 익숙합니다. ‘다이너마이트’가‘능력’을 의미하는 ‘두나미스’에서 왔습니다.
복음이 왜 두나미스(능력)=다이너마이트 하냐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수반되고, 하나님의 능력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프로그램과 철학과 종교는 이 바람을 실현시켜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불만족과 죄책감을 불러옵니다.
사람은 결코 본성을 바꿀 능력이 없습니다. 성경은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고 말씀합니다.
반면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세상이 보기에 전혀 불합리 하고 미련해 보이지만, 십자가의 도; 복음은 사람을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고, 죽음에서 건져 내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요 1:12).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은 구원」“구원을 주시는”(16c)
그래서 바울은,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16c)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능력자가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4년마다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 대통령을 뽑고, 거기에 온 백성의 힘을 국회위원에게 위임합니다.
그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온갖 장미 빛 청사진을 보여주며, 자신들에게 표를 주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공약 합니다.
네, 우리는 그 말을 결코 100%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매번 기대와 희망을 담아서 투표합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는 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 답을 유토피아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습니다. U는 ‘없는’ topia는 ‘장소’라는 의미로, 사람들은 애시 당초 유토피아라는 허상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사상과 철학이 우리에게 참다운 구원을 줄 수 있습니까? 고대부터 수많은 사상과 철학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그것들은 근본적인 답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금욕주의(스토아)철학자(에픽테토스)들은 자신의 강의실을 ‘병든 영혼을 위한 병원’이라고, 반대로 쾌락주의(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구원의 의술’이라고 표방했지만... 우리가 금욕한다고 행복해집니까? 반대로 한번뿐인 인생인데 맘 것 즐긴다(욜로)다고 행복해집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복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시대의 핫이슈 중에 하나가 감염 병인데) 하나님의 구원은, 저와 여러분을 패역한 세대의 영적 감염에서(행 2:40), 잃어버림에서(마 18:11), 죄에서(마 1:21), 하나님의 진노(롬 5:9)에서 건져 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 “모든 믿는 자에게...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6b, e)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일으키는 것은 「믿음」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6b, e)
구원에서 제한성과 개방성이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적용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믿는 자마다」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콕 찍어서 「믿는 자에게」라는 제한을 두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구원이 적용 된다.」
그리고 그 앞에 「모든」이라는 개방된 형용사를 붙여서, 유대인이든 비 유대인이든 민족과 인종의 장벽을 뛰어 넘어 「믿는 자 마다 모두 구원 받는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예수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얻고, 또 그 믿음으로 사는(live)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 2:8)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이 말씀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자, 구원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 늘 못 미치기에 아무도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는 구원의 산물이지(엡 2:10) 구원의 수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세례 받았다고, 교인으로서 선하게 산다고, 교회출석하고, 성찬에 참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행위는, 사람의 모든 노력을 종결시키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는 자만 구원받습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들에게 먼저 「행동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먼저 「믿으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義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
그런데, 믿음에는 하나님의 신비 「의(義 )」가 따라 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17a)는, 믿음은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작동시켜서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당신의 「의(義)를 주신다.」 「하나님이 믿음을 의(義)로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바울은 스스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9)
“믿음으로 믿음에”(17b)는 구원은 시작도 믿음이요, 마지막도 믿음, 오직 믿음이다! 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박국 2:4을 인용하여,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c)고 말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습니다(롬 4:3).
이것은 아브라함 이전과 이후의 모든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진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결국, 「하나님의 의(義)를 구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정받는 「하나님의 의(義)」라는 것입니다.
한자로 해석하면, 「이신칭의(以信稱義)」쉽게 말하면, 「구원이란 예수님을 믿어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인이라고 인정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간주되는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 얻는 길도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로 살고 믿음으로 살아서, 의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적용>
우리에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작동하지 않아, 믿음도, 구원도, 하나님의 의(義)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 하는 것은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자신의 주님과 구원자를 부끄러워하는 신자는, 심각한 병(죄)에 걸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의 숱한 교회들이 세상이 원하는, 이른바 「건강과 힐링」 「부와 성공」이라는 「짝퉁복음」을 제시하며, 진정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뒤로 숨기는 것은 엄연한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교회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고,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담대 전하시는 우리 모두기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