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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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을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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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요 1:43-51
설교시간 : 2024.01.14. 06:00
설교대상 : 복된교회
설교장소 :복된교회 본당
설교자 : 이종덕
서론
영국의 한 시골에서 부잣집 소년이 연못에 빠졌습니다.
거의 죽게 되었을 때에, 가난한 집 소년이 수영을 하여 그를 구하여 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부잣집 소년이 가난한 집 소년에게 소원을 말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한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가난한 집 친구는 이후 런던에 가서 의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부잣집 소년은 친구의 소원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알려드렸고, 가난한 소년은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의학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이후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수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그런데 그는 페니실린이 발견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부잣집 친구가 폐렴으로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급히 페니실린을 들고 달려갔고, 그 친구를 간신히 살려 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난 친구가 바로 영국의 유명한 수상 윈스터 처칠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 사이의 만남은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냅니다.
플레밍이 친구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의학공부를 할 수 없었고, 그 필레밍이 페니실린을 만들지 못하였다면 처칠 또한 생명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역사는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오늘은 만남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시는 장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만남에 관하여 함께 살펴 보고자 합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가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임하여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론1_만남의 종류
보통 우리가 만남을 생각할 때 두 종류로 살펴봅니다.
수동적인 형태인 만나지게 되는, 만남이 나에게 다가오는 형태가 있고, 능동적인 형태로 내가 적극적으로 만남을 이루어 가는 형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형태 모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43절에서의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께서 길을 가고 계셨고, 그 가운데 빌립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빌립이 무엇인가를 했다는 기록이 없기에, 빌립은 그저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가가셨고, 그 빌립을 만나셨고, 빌립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라 올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빌립의 입장에서는 가만히 그곳에 있었는데, 에수님이 다가오셔서 자신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반면 45절의 말씀은 반대로 나타납니다.
표시된 부분만 함께 읽겠습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여기서는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빌립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나다나엘에게 알리고자 찾아 난선 것입니다. 물론 나다나엘의 입장에서는 만나러 와준 것이지만, 빌립의 입장에서는 능동적으로 만나러 간 것입니다.
간혹 우리가 좋은 만남을 갖기 원할 때 이러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좋은 만남을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은 만남이 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아마도 많은 경험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이러한 구분이 다소 무의미하다 여기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좋은 만남은 만나 지는 것이기도 하며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표현하자면, 좋은 만남이 내게 다가 올 때까지 내가 준비되어야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또 만남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내가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그 만남이 온전한 만남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남은 수동적이기도 하며 동시에 능동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만남의 형태보다 더 중요한 요소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남은 다가 오기도 하며, 내가 다가가기도 합니다. 두가지의 모습으로 만남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만남이 시작하는 그 단계에서 불씨가 꺼져버리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만나지던, 만남을 만들어 냈든, 그 만남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선입견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4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표시된 부분만 함께 읽겠습니다.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은 갈릴리 북부 벳새다 라는 곳에 거주하였는데 이스라엘의 같은 북부 지역에 위치한 나사렛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먼 곳이라면 그런가? 싶었겠지만, 같은 지역이라 뻔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거주하는 벳세다는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어업과 농업을 병행하며 나름 소득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산 위에 위치하여 농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인구가 많이 거주할 수 없었습니다.
인구 수도 작고, 별다른 수입원이 있지 않은 곳이다 보니 대체적으로 소득이 낮은 곳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수준도 낮았기에 교육도 발전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작고 가난한 동네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올 수 없다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선입견이 나다나엘로 하여금 그곳 출신의 사람에 대해 이미 평가를 내려 버렸습니다.
이는 아무리 자신의 친한 친구인 빌립이 설명을 하더라도 듣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빌립은 예수께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된 인물이며, 여러 선지자가 드러내고자 한 그 분임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어디에서 오셨는가에 대해 매우 부차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마디를 덧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분이 나사렛에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빌립이 설명한 다른 말들 보다 본인에게 있어서 모든 스위치를 다 꺼버리는 필터가 작동하였습니다. 그 출신이 나사렛이면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이 10가지를 지니고 있는데, 9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 1가지의 요소가 그 사람을 모두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두고 우리는 선입견이라 말합니다.
문제는 관계가 형성되는 그 첫 관문에서 바로 이 선입견이 모든 관계를 시작조차 이루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메시아이고, 위대한 인물이라 수 많은 칭찬이 있다 할지라도, 단 하나, 가난한 나사렛 출신이라면 볼것 없다 판단하고 결정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나 그러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또는 누군과 만남이 시작될 때에 선입견이 발동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삶의 여러가지 요소들 중에 상당 부분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니고 있는 단점 몇가지가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정말 그 몇가지 되지 않는 요소가 인생에 매우 치명적인 요소라면 신중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예를들어 사람을 이용하려고 한다거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다면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보편적인 상황 속에서 살펴 보자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성실하고, 믿음도 좋고, 성품이 참 좋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외모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령 머리카락이 적다거나, 쌍커플이 없다거나, 키가 조금 작다거나 하는 요소들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좋지 않다 판단하여 그 사람을 멀리한다고 한다면, 결국 이후 만남 속에서 서로에게 유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앞선 예화 속에서 부잣집 소년인 처칠이 가난한 알렉산더 플레밍을 단순히 가난하다 여겨서 멀리 하였다면 이후 선한 일들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만나 지고, 만남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서 무엇보다 만나려는 사람을 향한 선입견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슨 선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8 형제들 중에 막내 아들로써, 그저 산에 올라 양을 치는 인물에 불과하였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조차 사무엘의 요청에 아들들을 불러 내었을 때 제외하였을만큼 인정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셨고, 그로 인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 만나게 하신 사람을 통하여 어떠한 계획을 품고 계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향하여 참 이스라엘이라 간사함이 없다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을 향한 어떤 선입견도 없이 긍정하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야곱과 같이 간사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이스라엘이며 그 속에 진실함이 있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다른 이들을 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선입견이 아닌 긍정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한줄 믿습니다.
본론2_만남의 시작과 경험
한편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만남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44절 말씀입니다.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전하고자 나다나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와 나다나엘 모두 벳새다 사람들임을 본문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만남은 바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혀 낯선 곳에서 생전 알지 못하였던 사람과의 만남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만남은 보통 나의 생활 반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 안에서 부모 형제와의 만남이 이웃 가정과의 만남으로 학교내에서 교회 내에서 만나고 점차 사회적으로 확산이 되어지는데, 그 점차적으로 넓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나와 가까이 있는 곳에서부터 서서히 넓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나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시작하셔서 옆에 동네인 갈릴리 호수 근처로 가셨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서서히 부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제자들 중 절반 정도는 대부분 같은 지역의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그 다음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가까이에서부터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 만남 속에 예수님을 알아가는 복음이 확장된 것입니다.
“수신제국치국평천하”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주변으로 확장되어지는 과정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관계도 역시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가까이에 있는 관계부터 잘 형성되어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점차 확장되어질 때 안정적으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흔히 안타까운 분들을 살펴 보면, 가까운 주변과는 만남을 엉망으로 만들고, 멀리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다시 말해, 가까운 가족과 친구는 하찮게 대하면서, 언제라도 상황이 바뀌면 만남이 끝나게 될 사람에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미련한 만남을 이루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이 끝 마치어질 때, 혹은 어려움에 처하여 있을 때, 가장 필요한 사람은 가까이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가까운 사람을 무시하게 되면, 이후에 큰 후회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정채봉씨가 쓴 에세이 집에 만남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만남에는 여러 만남이 있는데, 먼저는 생선 같은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만날 수록 비린내가 묻어나는 만남입니다.
그리고 조심해야 할 만남이 있는데 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
피었을 때에는 화려하지만 곧 시들어 말라 버리는 만남입니다.
아까운 만남도 있는데,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
잠시 만난 뒤 순식간에 지워지는 만남입니다. 말 그대로 남는게 없습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 있는데,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라고 합니다.
힘들 때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는 만남입니다.
이러한 만남은 인생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은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만남이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곳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우리는 만남은 직접 경험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46절 말씀입니다.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빌립이 정말 소중한 만남이 있다며 나다나엘을 설득합니다. 그런데 정작 만나야 할 나다나엘은 출신이 형편 없다는 이유로 만남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은 정작 만남은 이루어 지지 않은채, 만나야 한다 말아야 한다 서로 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아무런 역사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말만 하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끝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은 이런 저런 말을 하지 말고, 만나러 가 보자고 설득합니다.
즉, 말만 하지 말고 직접 움직여 만나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본문 속에서 나다나엘은 직접 만난 예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실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만남은 말이 아닌 실제 행동할 때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며, 만남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며, 만나는 과정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수 많은 말도 중요하거니와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래서 실제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아내로부터 수없이 권면 받고 계십니다.
이미 예수님을 먼저 만난 아내분이 계속해서 그 예수님을 꼭 만날 것을 권면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 권면을 받는 남편분들은 이런 저런 말들로 피하면서, 언젠가 만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이는 아무런 역사를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직접 발을 움직여야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남은 이론이 아닌 실제 행동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자녀들의 결혼을 두고 기도하고 계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만남을 위하여 기도하시되,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도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가 만남을 두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닌, 직접 만나는 일들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상 속에서 완벽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현실 속에서 나에게 맞는 사람을 찾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의 만남 또한 그러합니다.
혹여 이곳에 계신 분들 중, 여전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지 못하신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이전에 만난 그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있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권면드립니다.
움직이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닌, 만남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 알려 주시고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 속에 결국 나다나엘이 예수께로 걸어 간 것처럼 말입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말씀을 대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당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이 연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만 말씀을 보기만 했을 때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수 많은 지식 속에 판단만하여 나사렛에 무슨 선한 사람이 나느냐 말만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여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신앙이 고백되어지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실제로 움직임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만나는 귀한 역사가 이루어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론3_큰 일을 이루어냄
끝으로 우리는 결국 이러한 만남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사실 만남은 만남 그 자체로 끝이 아닌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연인들이 단순히 둘이 만나는 것에서만 멈추면 결국 둘이 싸우고 헤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만남은 발전하여 결혼을 통하여 가정을 이루고, 이 가정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출산하는 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남녀의 만남이 반드시 좋은 만남이 될 수 없는 경우가 요즘 너무 많습니다. 즉, 불륜으로 만나는 만남은 결국 주변에 악한 영향과 결과물을 남겨 놓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만남을 위하여 기도 할 때 두 가지를 놓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좋은 만남을 통하여 선한 결과를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만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기도는 만나지 말아야 할 만남은 만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즉, 만남의 복은 만나야 하는 것도 복이지만, 만나지 않게 되는 것도 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바로 이 만남과 만나지 않음을 놓고 항상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우리는 만남이 이루어내는 결과들을 본문 속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50절 51절 말씀입니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이 본문의 내용이 명확하게 구약의 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의 이야기 입니다.
야곱은 형을 피하여 도망하던 중에, 벧엘이라는 곳에 이르러 잠을 청하였는데, 이 때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자들을 보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땅을 줄 것과 그의 지경이 넓어지며, 많은 이들이 야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야곱은 세가지 다짐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 되심과, 지금 있는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 그리고 십일조를 드릴 것을 고백합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에게 이루어질 큰 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나다나엘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의 지경이 넓어지며, 나다나엘을 통하여 많은 이들이 복을 얻게 될 것을 약속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나다나엘은 예수께서 자신의 구주가 되심과 자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제 거듭나게 되는 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앞서 만남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남에 대해 생각할 때, 그래서 만남을 통한 결과는 무엇이냐 질문할 수 있습니다. 즉, 만남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왜 만남이 있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오늘 본문은, 그 만남을 통해 선한 역사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간혹 부탁을 받아 기도 부탁한분의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특별히 사업장에 계신 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그러합니다.
어김 없이 항상 이러한 기도 가운데 저는 만남의 복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 직접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으나, 마음 속으로 항상 기도하는 것은, 바로 만남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도록 간구합니다.
잘 만나서 일이 잘 풀리고, 인생이 풀리는 것이 끝이 아닌, 바로 그 만남 속에 나타난 결과들이 하나님께 영광이며, 이에 속한 이들에게 기쁨이 되는 만남이 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결코 만남의 종착점은 잘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만나서 내가 잘되는 것에서 끝나면 그것은 반쪽짜리 만남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믿음의 고백이 이루어지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는 은혜가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권면드리기는, 선한 주님의 만남이 이루어 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만남이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시길 간절히 축언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고자합니다.
우리는 만나지는 만남과 내가 만들어 만나는 만남 속에서 다양한 만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가운데 우리는 너무도 소중한 만남을 위해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 즉, 선입견을 버려야 함을 살펴 보았습니다.
나와 만나는 이들을 향한 선판단은 내려 놓으시고,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소중한 만남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바로 나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주변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시고, 그 만남을 실제로 이루어가는 일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이러한 만남을 통하여 무엇을 이룰 것인지를 생각하였습니다.
만남이 단지 만남으로 멈추게 되면 썩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물이 고여 있으면 악취를 내듯이 말입니다.
만남은 반드시 방향이 결정되고,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오늘 본문은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믿음의 고백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역사들이 나타나야 함을 살펴 보았습니다.
주 안에서 선한 만남들이 더욱 풍성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하여 선한 소식들이 더욱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그 마음 담아 함께 고백하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나의 만남을 통하여,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러한 고백속에 날마다 주의 크신 역사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선하신 주님. 우리가 주의 만남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의 삶이 잘 풀려지기를 위한 만남 보다 주의 뜻을 이루어가는 만남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낸 날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되며, 주의 뜻을 이루어낸 기쁨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하옵소서. 모든 역사를 이루어가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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