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1_주일예배_요7: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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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라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라
본문: 요한복음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한해가 시작되고 어느새 한달이 거의 다 되어 갑니다. 간절한 소망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한 해, 한달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그 한결같은 소망을 표현하는 우리의 세시풍속 가운데 하나가 복조리를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정미 과정에서 돌을 다 골라내 버리기 때문에 밥할 때 조리가 불필요해졌지만 옛날에는 밥을 할 때 꼭 필요한 도구가 조리였습니다. 쌀에 섞인 돌과 이물질을 골라내고 꼭 필요한 쌀만 건져내는 필수도구였습니다. 그렇게 꼭 필요한 쌀만을 담아내듯이 액운은 걸러내고 복만 가득 담아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복조리를 함께 나눴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바라는 간절한 소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성경에도 그 간절한 소망을 표현하는 비유 또는 상징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물과 관련된 비유적 표현들입니다.
물은 때때로 혼돈의 상징이요 두려움의 대상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노아의 대홍수라든가, 출애굽한 무리들 앞에 가로놓인 홍해는 그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 경험에서 물은 그렇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절실히 필요한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에서 물은 삶 그 자체, 생명 그 자체로 여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샘물을 두고 경탄했습니다. "이제 주께서 우리가 살 곳을 넓히셨으니, 여기에서 우리가 번성하게 되었다."(창 26:22) 우물이 삶의 터전의 근본이었던 것입니다. 두려웠던 홍해를 건넌 출애굽 백성들에게도 물은 언제나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말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왔느냐? 자식들과 집짐승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출 17:3)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바위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어 그 백성의 갈증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갈증으로 애 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환경이 사막과 같은 환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목마름에 대한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유격 중 갈증이 심한 순간에 받아든 물로 인해 너무나도 감사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하는 이 말씀은 마치 그와 같은 구원의 목소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유대인들의 3대 명절(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초막절)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 마지막 날 선포하고 계십니다. 초막절은 가을걷이가 다 끝나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에 지키는 명절입니다. 아마도 포도원에 초막을 쳐놓고 연일 포도와 과일을 추수했던 데서 이 명절의 이름이 기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명절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 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살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절기로 그 의미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일주일간 계속되는 이 명절 기간중에 행한 독특한 의식 가운데 하나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 성전에 바치는 의식이었습니다. 초막절은 일종의 물의 축제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추수가 끝난 바로 그 절기 직후부터 우기가 시작되는 팔레스타인의 자연환경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우기 곧 겨울에 충분한 비가 내려야 밀과 보리가 잘 자랄 뿐 아니라, 포도와 그 밖의 과일 농사도 풍작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물을 긷는 의식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충분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의식의 의미 역시 역사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바로 광야 생활에서 목말라했던 조상들의 갈증을 해결해 주었던 그 우물을 재현하는 것으로, 그 갈증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로 바꿔 이해한 것입니다. 한 해의 농사와 살림살이, 아니 삶 자체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절실한 것을 구하는 기원이요 동시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 의식이 치러지는 현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날 것이다." 육신의 삶에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개별적인 육신의 삶 이상의 그 어떤 차원을 암시하시며 진정한 생명수를 마실 것을 권하고 계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먹고 마실 것이 있어 자족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반문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여러분 목마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게로 오십시오." 그 말씀입니다.
육신의 생명 존속을 위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충족된다고 해서 삶의 허기, 삶의 갈증이 다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단순히 밥 세끼 해결하지 못해, 마실 것이 없어 우리들이 허덕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나 처하는 곤궁함을 꿰뚫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던 그 차원을 우리에게 다시 환기시키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정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갈망하는 그 무엇을 지금 당신께서 선사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진정으로 우리 삶의 생기를 북돋아주고 기쁨을 넘치게 하는 그것을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니 바로 당신께서 사람들이 그렇게 갈망하는 그 무엇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우리의 생명수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목말라하는 그 갈증을 해결해주실 생명수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예수께서 생명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 생명수를 마시는 사람 역시 생명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게 주는 특별한 말씀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피동적으로 그저 은혜를 받는 사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 몫을 다해주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의 구현 내지는 재현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현 내지는 재현이 된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일방적으로 구하고 받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구하고 받은 것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한 존재이듯이 우리들 또한 그 누구에게 절대로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복 많이 받기를 다들 소망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받고자 하는 복들 가운데 가장 큰복이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그 가장 큰복으로 삼고 싶습니다. 내가 누리는 만큼 내가 베풀 수 있는 사람,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하듯이 내가 그 누군가에게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그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내가 그 누군가에게 기다려지는 사람이 되는 것만큼 큰복이 있을까요? 그런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