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포기할 때 열리는 하나님의 길 2024 0122 (창12:1-9)

날마다 말씀따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 views
Notes
Transcript
찬송가 323장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창세기 12:1–9 NKRV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무엇을 떠난다는 뜻인가?

3단계 떠남 :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신다.
고향은 땅. 당시 고대근동사회의 목동, 유목민들에게 땅은 생계수단이다. 이미 자리잡고 자신들의 가축들을 키우는 유목민들에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굉장한 결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동 중에도 계속해서 가축들을 먹여야 하기 때문이다. 또 땅은 그 땅에 거주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의미.
친척은 가족. 후손을 의미. 친척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후손, 즉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가문이 다음 세대를 이어갈 수 있게 함. 또 조상의 장례와 그의 이름을 기림으로 사후 세계를 편안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당시 사회에서 강했음.
아버지의 집은? 바로 상속권.
고향과 친척은 떠날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말은? 의미와 무게가 다르다.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말은 아버지 사후 모든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어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말은, 그 모든 아들로서의 권리와 상속권을 모두 포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브람의 떠남은 자신의 생존과, 정체성, 미래와 안전, 상속권 등 모든 것을 우리 주님의 손에 맡기고 있음을 의미함.

역설적이게도 모두 포기 할 때, 그 때 하나님의 길이 열린다

하나님은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순종할 때 받게 될 복에 대해서도 알려주신다.
큰 민족을 이루겠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약속은 주어졌고, 순종은 했으나 긴장은 여전하다. 아브람에게 레크-레카 하시면서 약속한 말씀은 당장에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사라와 아브람은 늙었고, 자신들이 가야할 땅은 잘 알지도 못했다. 땅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지만, 그곳이 나를 살게할 만한 땅인지는 불확실하다. 자신의 대를 이어줄, 자신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상속권이 없지만, 이제 하나님의 상속권자로서 자신의 대를 이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될 후손도 기약이 없다. 이러한 긴장감은 성경을 대하는 독자로서, 신앙인들로서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한다. 단순히 글로 표현되는 긴장감도 이정도인데, 실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취를 기다리는 일은 얼마나 큰 긴장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한 번 붙들었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당대에 이뤄지지 않더라도 후손을 통해서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한다. 왜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난 새벽에 족보를 통해 우리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신앙의 전수를 통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이야기 했던 것처럼, 한 번 약속을 붙들었으면, 우리에겐 계속해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힘이 있게 된다. 현실은 그러한 인내를 계속해서 평가절하하고, 포기하게끔 속삭인다. 그러나 아브람도 그러한 여러 위기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반복되는 약속과 확증을 받았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쌍무계약이다. 약속을 주셨고, 우리가 순종함으로 우리는 단순히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면,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계신다. 하나님이 직접적인 계약 당사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내할 수 있다.
아브람은 100세에 겨우 아들 하나를 얻었다. 그 아들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씨앗을 본 것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이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일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래서 기도응답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람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저 우리는 그 약속만 붙잡고 약속을 이뤄주실 주님만 기대하며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다. 약속은 하나님의 때에 가장 적당한 때에 이뤄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믿음이 쉬운가? 이 보이지 않는 약속을 붙잡는 것이 쉬운가? 신앙생활이 쉽기만 한가? 인내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인생의 쓴맛을 누가 곱씹으며 참고 싶을까? 그래서 이러한 본문에서 등장하는 아브람의 믿음을 우리는 본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이 괴리감은 자칫 잘못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무력감을 준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당신의 능력을 구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일생을 잘 살펴보며 나도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생겨난 믿음이 아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별개로 발현되는 믿음은 더더욱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생명보장을 위한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해서 사라를 뺏겼다면, 하나님과의 언약은 파괴되었을 것이다.) 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아내가 한 명 더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힘으로 태어난 후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가 아니었다. 정말 특이한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엘에 대한 연민이 굉장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스마엘을 쫓아내고, 이제 하나 남은 자녀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까지 하셨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자신의 인생 속에서 믿음을 지켜나갔다.
믿음을 지키겠다고 결단한다고 해서, 내 상황과 환경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환경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기억하라.
기도는 길지만, 응답은 순간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레크-레카 하고 끝난것이 아니라, 그 땅에 들어갔을 때, 한번더 다시 이야기해주신다. 창세기 12:7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땅에 도착했어도, 아직 복의 근원이 되려면 멀었다. 그러나 그 복의 근원이 되는 일은 아브람의 후손을 통해서, 이삭과 야곱의 후손을 통해서, 나아가 다윗과 유다 가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계산으론 2천년이 걸렸다. 그러나 천년이 하루 같으신 분께는 인간의 시간 개념은 무의미할 뿐이다. 다만 그 약속의 실현과, 그 약속의 무거움이 반드시 우리에게 실행되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아브람의 후손이 민족이, 세상의 다른 민족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 인류의 구원, 온 피조세계의 구원이 임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아브람의 떠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 구속사의 시작이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