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23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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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사도신경
찬송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헌금명단 낭독 후 대표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주의 크신 은혜로 우리를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주시고 존귀하신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사도바울의 고백과도 같이 우리 각자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인생을 살아가길 소원합니다. 날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만 사는, 예수만 드러나는, 예수만 증거하는 우리의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드리는 예물들을 주님께서 흠향하시고 드리는 마음과 정성까지도 주여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마가복음 8장 27절 – 9장 1 절
마태복음 21장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때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들이 나아와 나귀를 타고 가시는 주님의 길에 자신의 겉옷을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함성을 지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 성경은 그 무리들의 함성소리가 성이 요동할 정도로 컸다고 기록합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주님의 예루살렘 성 입성을 기뻐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무리들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광기어린 목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기까지는 불과 며칠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자신들을 압제하던 로마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 세계 최강대국으로 세우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목적으로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들은 승리와 영광의 왕을 기대했지만 주님은 수치와 죽음의 어린 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이 기대했던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모습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자 주님을 따르던 “팬”에서 “원수”로 돌변해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제자와 무리, 제자와 팬[Fan],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는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울타리 안에는 주님을 진정으로 따라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제자들이 있는 반면, 이해관계를 따라 주님을 섬기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앞서 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를 따르려는 제자들이 있는 반면, 내가 좋을 때만 주를 섬기고 내가 편할 때만 주님을 위하는 팬들이 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은 “팬인가? 제자인가?” 라는 책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남과 비교하며 자기 자신을 제자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팬에 불과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기준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을 때에만 진정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했던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을 지나가시며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27절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동일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십니다. 29절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때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주님과 동행하며 눈 앞의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제자들이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음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 주님은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주님이 당하실 고난, 주님이 당하실 죽음, 그 이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위대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영광을 버리고 친히 종의 형체가 되어 낮고 천한 이 땅 가운데 내려 오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의 죄책을 짊어지시고 징계를 받으셔야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완전한 죄인으로 채찍에 맞으셔야만 우리는 나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셔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항변하다”라는 말은 “꾸짖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귀신들과 폭풍을 꾸짖으실 때 사용되었던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수제자로서 장차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자신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헛된 야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께서 고난받아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분명 그는 주님께서 실언을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되도 않는 농담을 했다고 주님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훼방하려는 사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사탄이라는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앞서가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24 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 길, 고난의 길, 자기 부인의 길을 따라 걷는 자 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자, 자신이 주님의 제자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지 않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려 하지 않는다라면 그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저 주님 곁을 맴돌며 환호하다가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순식간에 돌변하여 광기어린 목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 외치던 “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34-38절까지의 내용을 보십시요.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부인해야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고, 주님을 위해 고난을 감당할 때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요! 고난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세상은 남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진정 강한 자요, 남들보다 더 많이 움켜쥔 자가 복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을 따르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은 모두 사망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먼저 걸어가신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길을 걸어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길을 걷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말합니다. 벧전2:21 에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발자취를 따라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가신 길을 나도 걷는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 수치의 길 같습니다. 실패의 길 처럼 보입니다. 멸망과 죽음의 길처럼 보입니다. 실로 예수를 따르는 것은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무엇보다 현명하고 지혜롭습니다. 왜그렇습니까? 비록 우리의 목숨이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그것을 버림으로서 얻게될 복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짐 엘리엇 선교사의 일화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기독교 명문대학이던 휘튼대학에 진학하며 선교에 대한 마음이 불붙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선교훈련과정을 배우다가 가장 잔혹하기로 유명하던 에콰도르의 아우카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짐 엘리엇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 몇명과 함께 경비행기를 타고 아우카족속의 영토로 투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센터와 연락이 두절됩니다. 이에 선교센터는 그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는데 해변가에서 이들이 사용했던 경비행기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뒷편에는 원주민들의 창과 화살에 무참히 살해당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동료 선교사들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이들이 무엇 때문에 먼 남미까지 가서 제대로 인생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개죽음을 당해야 했는가! 젊은 이들의 인생이 불필요하게 낭비되었다!” 라고 기사를 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된 짐 엘리엇 선교사의 일기에 이러한 한 대목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저들은 예수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꿈을, 기꺼이 자신의 미래를,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 말세의 때에 주님께서 찾으시는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 아닐까요?
내가 이 땅의 것들을 다 손에 움켜쥔다한들 주님께서 인정하는 삶이 아니라면 그 삶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내가 명예를 얻을만큼 얻어보고, 재물을 모을만큼 모아보아도, 주님께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입니까? 거룩하신 주님께서 반드시 영광가운데 재림하실 것이다. 그 날에 주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그간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짊어지며 주님을 쫓던 삶을 인정해주시고 위로해주시며 눈물을 닦아주실만한 그 복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몸소 본을 보이시며 앞서가신 주를 따라가는 우리가 됩시다. 단지 이해관계에 따라 주님의 팬으로서 이 땅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주님의 뒤를 따르는 주님의 제자로 이 땅을 살아갑시다. 내 죄의 소욕들을 끊어내고, 더욱 말씀으로 나 자신을 성결하게 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의 삶으로,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이 시간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가운데 죽기까지 주님의 뒤를 따르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합시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드사 죄의 소욕을 끊어내게 하시고, 날마다 의와 거룩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앞서가신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로서 살아가는 나 자신과 우리 가좌동광교회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교회를 위해, 직분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개인적인 기도제목들로 기도하신 후 자유롭게 돌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