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3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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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를 전하는 질그릇
보배를 전하는 질그릇
여러분 오늘도 함께 만나 말씀을 나누게 되어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이제 거진 한주 반 정도 남은 캠프를 준비하며 여러모로 분주함과 걱정과 긴장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요, 오늘 말씀을 나누면서 말씀을 통해 그 모든 것들을 날려버릴 수 있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지난번 말씀에 이어서 고린도후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번에 어떤 말씀 나누었는지 기억하시나요? 2장 말씀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향기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우리 앞에 여러 고난들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고, 개선식의 향기로운 냄새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게 하실 것이다는 것을 나누었죠.
오늘은 4장의 말씀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2장을 나누고 4장을 나누는 거니까 중간에 3장의 내용을 넘어간 건데요, 3장의 내용은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바울의 직분에 대한 변호였습니다. 어떤 이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가지고서 딴지를 걸었다는 것을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을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의 추천을 받아야 사도로서 인정도 해주고, 말씀을 전할 수도 있을 텐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를 추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3장에서 성도들에게도 우리가 다른 이들의 추천을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죠.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로부터 전달된 편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영으로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 후에 등장하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에요. 그래서 1절부터 그 이야기를 이어 이 내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영으로서 새 언약의 일꾼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 직분을 은혜로 받았으니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신을 증거하는 추천서나 어떤 지위가 없더라도, 또 그로 인해 여러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주의 영이 우리의 증거가 되시니 부끄러워하거나 시험에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그 직분을 얻은 자로서 해야할 일들에 대해서도 바로 언급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2절에 등장하는데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얼 말하는 것이냐,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잘못된 것들을 행하는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뒤이어 등장하는 속임으로 행하는 것,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들을 포괄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죠.
다시 말하자면, 새 언약을 전하는 자들이라면, 말씀을 가지고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집어넣고, 다른 것들로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뭘 전한다는 거에요?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증명한다는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이 일들, 준비팀으로서 캠프를 준비하는 이 일들이 온전히 여러분들이 이것들을 잘하기 때문일까요? 물론 우리 각자가 잘하는 부분들도 있기는 하겠지만, 온전히 그것은 아닐거에요.
그럼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거겠어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섬길 수 있는 이 자리, 이 직분을 주신거에요.
결국 우리는 다른 어떤 이들의 추천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도 더 크신 주님의 추천서를 받은 이들이라는 거에요. 그렇기에 우리는 준비팀의 과정에서 두려움과 떨림과 낙심함이 있더라도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자리에 있는 자들로서 어떻게 해야한다는 거에요? 오로지 우리가 주님께 받은 말씀 그대로만, 그 진리 그대로만을 우리의 캠프를 통해서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전할 때, 우리의 준비팀으로서 세상에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직분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캠프를 여러번 준비하신 분들이라면 느끼는 것들이겠지만, 어떤가요? 그게 그렇게 뜻대로 안될 때가 많다라는 거에요.
나는 나름대로 주님께 받은 말씀대로, 내가 받은 사랑대로 해나가고 있는데, 그것이 잘 전달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또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내가 너무 부족하다. 내가 지금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겠죠.
하지만 그러한 우리에게 바울은 이어지는 3절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래요. 바울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못하고 가리어진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이라는거에요? 그 받는 이들 가운데, 혹은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 가운데 망하는 자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듯 모든 것이 순탄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어떤 걸림과 고난이 있게 되죠.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어요?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4절을 보시죠.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잡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한다는 거에요.
우리가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주님을 전하고자 할때, 사단의 세력들은 지속적으로 그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여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다가가지 못하게 한다는 거에요.
뭐 이런 식이겠죠. 지속적으로 우리 재학생들의 마음에 불안감과 걱정을 심는거에요. 마치 3일동안 캠프에 오면 많이 뒤쳐질 것 같은 걱정을 넣고, 오히려 그때 다른 것들을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이 캠프에 자리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려는 시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고난들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해야겠어요? 그러한 고난들에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하겠죠. 그냥 막 ‘내가 잘못해서’, ‘내가 부족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해버린다면, 우리의 캠프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마치 겸손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겸손은 나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잘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준비팀으로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들이 있더라도 자신의 준비팀으로서의 위치를 잘 기억하고 그것을 위해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라는 거에요.
사실은 이런 생각들 역시도 사단의 공격일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무런 힘이 없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서 주님의 일에서 떠나도록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자체는 부족한 사람일 수 있고, 그렇게 뛰어나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셔요? 바로 하나님이시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우리는 절대 부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사단의 공격들이 있을지라도, 담대히 그것들과 맞서 싸워 이기고, 다시금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이 모두에게 비춰질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이 있어요. 이어지는 5절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바울이 뭐라고 하죠? 우리가 행하는 이 사역은 오로지 누구를 전한다는거에요? 바로 그리스도 예수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올바른 겸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우리 자신을 절대로 부족하게, 낮게 보지 말라고 제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너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 또한 맞지 않다는 거에요.
우리가 자신을 우리의 사역에 드러내는 순간,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 나 자신을 전파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캠프 때 내가 어떤 것을 멋들어지게 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끝났을 때,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에 뭐가 남아야겠어요? 그리스도의 복음의 아름다움이 남아야겠죠.
그런데 그게 남는게 아니고, 특정 누군가의 대단함, 멋짐 이런 것들이 보이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역들을 통해서는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신 것,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그의 종, 그가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 나타나야 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사실, 우리가 정말 주님이 주신 진리, 온전한 주님의 진리를 전하려고 했다면, 우리는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6절 말씀에 나타나죠.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 즉 창조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셨다는 거에요.
여기서 말하는 영광을 아는 빛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참고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아요.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셨던 변화산 사건의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입으시니 그 옷에서 엄청난 광채가 나타났다고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얼마나 강한지 아무도 희게 없을 정도로 흰 빛이라 기록을 하고, 베드로는 너무 두려워 아무말을 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말씀이 말하는 것은 뭐에요? 이렇게 하나님의 위대하신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강한 빛으로 나타난 것처럼 그 빛이 우리 마음에도 아주 강하게 비추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강한 빛이 우리에게 비춰진다라면, 당연히 우리의 모습은 보이겠어요? 절대로 보일 수가 없겠죠.
그러니 우리가 정말 제대로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빛을 전한다면 우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어지는 7절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 영광이라는 보배를 어디에 가졌다고요?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합니다.
질그릇은 당시 근동지역에서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그릇입니다. 편하게 쓰다가 깨지면 바로 버려버리는 그릇이었죠.
그런데, 엄청나게 귀한 보배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질그릇에 담겨서 보여진다는거에요. 그만큼 하나님의 빛을 통해 나타나는 능력은 우리의 능력이 존재한다는거에요? 전혀 없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죠.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보배가 질그릇이라는 별거 아닌 것에 담겨있다보니 어떻게 보이겠어요? 만만해 보일 수 있다는거에요.
그러다보니 이어지는 8절과 9절에 등장하는 것처럼 질그릇인 우리는 수많은 공격과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죠.
그러나 8절과 9절에서 또 뭐라고 하고 있어요?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질그릇이라는 아주 약한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보배이신 주님께서 우리 질그릇과 함께하시며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보배를 담는 그릇이 보배를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보배가 질그릇을 지켜주는 상황이라는 거에요.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정말로 큰 은혜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주님을 전하는 질그릇들에게 필요한 것을 바울이 이어지는 10절과 11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뭐라고 하죠? 예수의 죽음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방금 말했던 것처럼, 보배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심으로서 우리를 살리셨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죽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그 사역을 행하며 죽어져갈 때, 우리의 이 노력을 통해서 예수 부활의 생명이, 그 강한 빛이 더욱 세상 속에 비추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역시도 수없이 많은 고통과 고난의 상황에 자신을 내던졌고,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 역시도 기꺼이 그러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많은 헌신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주님의 크신 빛이 전달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 구절과 같이, 사망은 우리, 즉 전달자들에게 역사하고, 그를 통해 생명이 전달받는 이들에게 역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 준비팀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죽어져야 한다? 캠프를 하다가 막 과로사로 죽고 그래야 된다는 걸까요? 그건 아니겠죠.
말씀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은 삶, 또한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복음에 헌신했던 헌신자들의 삶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초대교회 당시 헌신했던 이들의 이름을 얼마나 아시나요? 아마 사도들에 바나바 아볼로 정도, 그리고 집사들 정도 이름을 알 수 있을거에요.
하지만 그 외에 헌신했던 수많은 교회의 성도들, 특히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복음을 사수했던 순교자들은 우리가 그 이름조차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아쉬움을 가지고 있을까요? 또한 주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알고 새기기를 원하실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셨던 이러한 질그릇의 삶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의 이름을 위해 나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 것.
만약에 그들이 세상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어디든지 자신의 존재를 역사에 남기고자 했다면, 그들의 헌신이 빛으로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로지 그들이 주님의 이름만이 전달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했기 때문에, 그들의 헌신이 주님의 영광의 광채로서 우리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캠프 준비팀의 모습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준비의 과정을 통해 오로지 주님만이 드러나시기를, 주님의 광채가 주님을 모르는 어두움 속에 있는 모두에게 크신 은혜로서 비추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준비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드러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주님의 이름은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죽어질 때, 그 순간 주님의 광채는 너무도 크게 빛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모든 준비팀이 얼마 남지 않은 이 귀한 시간, 함께 주님의 광채를 비추기 위해 모든 고난들을 이겨내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귀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