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인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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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찬송가 365장, 통일찬송가 484장
‘마음 속에 근심 있는 사람’ 찬양하시겠습니다.
(1) 마음속에 근심있는 사람 주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슬픈마음 있을때에라도 주예수께 아뢰라
후렴:주예수앞에 다 아뢰어라 주 우리의 친구니
무엇이나 근심하지말고 주예수께 아뢰라
(2) 눈물나며 깊은 한숨 쉴때 주예수앞에 다 아뢰어라
은밀한죄 네게 있더라도 주예수께 아뢰라
(3) 괴로움과 두려움 있을때 주예수앞에 다 아뢰어라
내일일을 염려하지 말고 주예수께 아뢰라
(4) 죽음앞에 겁을내는 자여 주예수앞에 다 아뢰어라
하늘나라 바라보는 자여 주예수께 아뢰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8장 9~14절 말씀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시간 드려진 예물을 위해서 기도드리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벽에 나아와 하루를 시작하며
말씀앞에 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시간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를 사모합니다.
성령의 임재를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능력으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건강의 문제로 기도하는 성도님들 있습니다.
오장육부, 관절, 골수, 마디, 세포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회복되어 다시 살아나고, 강건해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연약함, 피곤함, 아픔과 질병, 고통과 고난, 어려움 속에 있는
상황과 환경 모두 떠나가게 하여주시고,
마음의 모든 염려,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사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생의 무거운 짐들이 가벼워지도록 주님의 평안을 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오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주실 은혜를 사모하는 심령으로 귀한 예물 드리는 손길들 있습니다.
감사헌금, 일천번제, 00헌금, 00헌금을 올리오니
받으시고, 만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드릴 것이 차고 넘치게 부어 주시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의 지혜로 깨닫게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믿음도 부어주소서.
이 모든 말씀을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 앞뒤 옆사람들과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큰 은혜 받으세요.
담임목사님께서는 한국설교선교회 코칭세미나를
2박3일 동안 총 진행 총무로 섬기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목사님의 일정과 사역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8장 9~14절 말씀을 통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추운 지방에서 자를 만들어 파는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30cm 기준자를 사용하여
정확하고 품질 좋은 30cm자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인근 동네에서 그가 만든 자는 정확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기술자는 자신이 살던 추운 지역을 떠나서
아주 무더운 지역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서도 이미 이 기술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의뢰를 해서
그가 만든 자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더운 나라에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술자가 만든 자를 사용한 사람들이 일을 할 때,
문제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정확하게 측정해서 만든 것들과
새로 만든 것들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혼란이 커지자 나라에서 그 원인을 찾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자를 만든 기술자가 가지고 있던 기준자가 실제 30cm보다
조금 더 길었던 것입니다.
추운 지방에서 30cm였던 자가 더운 지역으로 오자
조금 팽창되어서 늘어난 것입니다.
그 기술자는 자신의 기준자가 날씨 때문에 변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잘못된 기준자를 사용하여 만든 자와
그 자를 이용해 만든 물건들은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속에서
더운 나라 사람들의 모든 노력들이 헛수고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사람들이 일을 잘못했거나, 자를 만든 기술자가
무언가 실수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헛수고의 원인은 바로 기준자가 기온에 따라
길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유명한 수학자, 물리학자, 공학자들은
이 세상의 절대 기준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계속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만든 어떤 기준이
절대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스스로 절대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 인생에는 더운 나라의 불상사가 발생하게 됩니다.
내가 세운 기준과 가치관을 절대 기준이라고 여기면,
그나마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질고에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꼴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에게 편리한 기준이나 가치관이
누군가에게는 자의든 타의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큰 짐을 지워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정말 피곤하고 힘든 일 중에 하나는
내가 동의하지 않은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저울질하며 판단할 때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그 기준에 못 미치면
우리는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반대로 그 기준보다 과하면, 조롱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짐을 부과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자주 봅니다.
나의 기준이 자녀들에게 큰 짐이 되어
그들의 일생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물론 인생에 기준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서 온 기준인지, 나의 욕심인지,
누군가의 강요나 압박에 의한 기준은 아닌지.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비유를 누구에게 하신 것일까요?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며 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비유입니다.
사실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의 의가 자신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보다 더 노력하지 않는 자들은
당연히 자기보다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무시하고 멸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은 틀린 것이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매우 독선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만하여 다른 사람들과 잘 연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적용하는데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내려다보며
무시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의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자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멸시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남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지적하는
바리새인들의 기도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데
내용이 뭔가 좀 이상합니다.
내가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불의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이 옆에 있는 세리랑 달라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의로운 몇몇 모습을 타인과 비교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정말로 감사해서
감격함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난 모습을 타인과 비교하여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이 감사기도 외에 또 어떤 내용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까요?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사실 바리새인이 금식하고 십일조 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리새인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규례와 지침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바리새인은 당연히 행할 바를 자랑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이런 교만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예배 출석을 게을리 하는 성도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나는 새벽예배부터 교회의 모든 예배, 행사에 다 참여하고,
준비하고, 시간과 물질을 쓰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는데,
왜 직분자라고 하는 분들이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을까.
그런데 제 자신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과연 내가 목회가가 아니었으면,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헌신할 수 있었을까?
사실 열의 하나는 책임감 때문에, 누군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섬겼던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의로 여기며 성도들을 정죄했던 모습을 보면,
나도 바리새인과 똑같구나.
나도 내 기준으로 성도들을 판단하는구나.
그렇다면, 예수님이 칭찬하신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무엇이 달랐을까요?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대부분 하늘 높이 손을 들고
남이 보란듯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했습니다.
물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의미일 수 있고, 너무 절박해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찾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모습을 보면, 기도를 받으시는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인간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세리는 바리새인처럼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렇게 기도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도 바리새인들이나 다른 유대인들처럼
같은 방법으로 구원과 자유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그의 사회 종교적인 위치가
그를 가장 합당한 기도자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 앞에
피조물의 하나로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로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가장 본질적인 기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세워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세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불의함,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그 분 앞에 자신의 죄를 감출 수 없기에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불의함을 탄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드려야 할
가장 기도다운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입으로만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가슴으로 하는 기도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드러냈지만,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죄를 토해냈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기도와 마음으로 하는 기도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더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인간이 언제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구원하고,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의 보호를 물리치고 스스로 성을 쌓았습니다.
노하의 후예들은 홍수 사건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다시 도전하여 바벱탑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삼촌보다는
자기를 풍요롭게 해줄 것 같은 소돔과 고모라의 문명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아브라함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이 늘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그 가운데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가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 없이 성공한 사람들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하는 인간의 삶을
세상에서 성공했든, 실패했든 똑같이 “곤고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 의와 기준으로 사는 삶을
곤고합니다.
마치 아버지를 떠나 타국에서 돈만을 의지하며 살았던
둘째 아들 탕자와 같은 인생입니다.
잠시 잠깐은 세상 쾌락과 정욕에 기쁠지 모르지만,
의미없이 떠도는 곤고한 삶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해하다’는 뜻의 영어 단어 ‘understand’는
under 아래와 stand 서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그 보는 것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남보다 낮은 자리에 서서 본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낮추고 보면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마음을 많이 낮추느냐에 따라서 귀한 천국을
얼마나 누릴 수 있는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얼마나 마음을 높이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더 무거운 인생의 질고를 지게 될지가 결정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만큼 인생이 고통스럽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만큼
그 인생이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생각하며
마음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림으로
말로만 하는 기도가 아닌, 삶으로 올려드리는 기도의 삶을 사는
모든 서울제일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이시간 함께 기도하실 때, 내가 바리새인처럼 나의 의를 드러는 기도와 삶이 아니었는지 돌아보고
세리와 같이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주의 긍휼함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특별히 3월 31일까지 새생명 전도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품은 태신자들이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로 준비하고, 우리의 삶이 그들에게 예수님의 향기처럼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도록
주변에 몸과 마음이 아픈 영혼들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각자의 기도제목을 위해서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 세번 부르고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