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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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복음을 살고 있나요

갈라디아서 2:11–21 (NKRV)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제가 청소년기까지 다녔던 고향의 교회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먼저 선짓국을 먹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피째 먹지 말며라는 구약의 율법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순대도 드시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순대에는 피로 만든 소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주일에는 돈을 쓰지 못했기에 미리 사야 하는 것들을 사 놓고는 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일조와 헌금들은 나쁜 일을 막아주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하셨던 이유는,
마태복음 5:17–18 (NKRV)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성경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시절 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가 없었습니다. 어쩔 때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성경에는 율법은 폐하여 졌다고 하고 기준을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이유 없이 믿는 것이 더 복되다는 마음으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심지어 어려서는 나중에 우리는 장례를 화장으로 하면 안된다고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린시절 기억에 나중에 묫자리를 알아 놔야 하나라고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가요? 일단 우리는 화장이나 무덤에 묻는 장례나 다 상관이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재창조되고 회복 될 테인데, 우리는 지금 우리의 몸을 가지고 가지만, 그것이 어떻게 됩니까? 마치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나는 것 처럼, 재창조 되고 회복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가 화장을 했다고 해서, 우리의 가루가 되어 세상을 떠도는 우리의 몸을 못 찾으실 리 없으시죠.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 입니다.
율법은 어떤가요? 율법은 기본적으로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율법은 작은 의미에서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 ‘작은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왜냐면 율법의 아주 광범위한 역할은 바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마주함으로 무엇을 느끼냐면 ‘내가 뼛속까지 아주 타락했구나’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율법을 다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처절하게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폐하여지지 않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지만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복음은 동등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복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예비적이었고 복음은 완성적입니다. 율법은 정죄의 기능을 하는 것이었으며 복음은 죄를 없애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복음의 시대에 와서, 지켜야만 하였던 거룩한 날과 달과 절기가 없어졌으며, 정결하고 부정한 음식물의 구별이 없어졌으며, 짐승으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성전의 제사가 없어졌습니다. 그 모든 율법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이 완성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완성을 이루신 것이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실체가 되시며, 율법은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새롭고 완성된 법이 공표됨으로 예전의 법은 이미 그 새로운 법 안에 포함되어 지는 것입니다. 법을 지킴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의 죄를 알 수 있는 그런 기능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헤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1-2)
바울은 율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할 수가 없음을 단호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거나 율법이 우리에게 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쓴 성경에서 율법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기도하고 부정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 중 하나 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바울은 바른 복음에 방해되는 그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아디아포라’라고하는 하나님께서 금하지도 명하지도 않는 부분들에 있어서는 자유롭게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제사 음식을 먹는 것과 오늘날의 예를 들면 술, 담배, 게임 중독 등의 것들이죠?
바울의 결론은 그것들로부터 자유하라고 하나, 교회의 덕이 되기 위해 기꺼이 그 자유함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이고, 이것은 우리의 입장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율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때는, 윤리적인 차원에서 율법의 좋은 면을 설명할 때입니다. 삶의 권면을 위해서이죠. 그러나 바울이 강력하게 율법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명확합니다. 복음을 가로 막을 때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거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된 것들을 율법으로 다시 되돌리려 한다면, 바울은 강력하게 부정적으로 율법을 설명하였습니다.
오늘 이렇게 서론이 긴 이유는 바울이 지금 율법을 부정적으로 말하면서 베드로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기에, 율법에 대한 기능을 먼저 설명해드리고 어떤 부분을 바울이 강조하는가를 같이 살펴보고 싶어서 입니다. 바울은 지금 성취의 면에서 율법을 강력하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안디옥에서 사건이 일어 납니다.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들이 방문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 ‘함께 먹다가’라는 의미는 그때 딱 한번 이방인과 먹은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예전부터 해온 행동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율법의 음식 규정에 어긋나는 음식을 먹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들이 방문하자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멈췄습니다. 이 베드로의 행동을 ‘위선’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마음에 경건한 척 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이부분에 대해서는 총신대 조호형 교수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욥바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담대하게 전파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것을 담대하게 전한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지금 이 상황에 와서 위선을 행했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저 좋은 마음에서의 걱정와 우려로 그런 행동을 했을 것 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이나 유대교 관습에 익숙한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율법의 긍정적인 것,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나 덕을 세우기 위해 안하는 정도의 것으로 보아서는 안됐습니다. 어찌 보면 그냥 유대인 신자들의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서 베드로가 긍휼의 마음으로 그 행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 바울은 강력하게 그의 행동을 구속의 역사, 즉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된 것을 부정하는 행동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을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복음을 따라 정 중앙으로 걷고 있지 않다는 의미 입니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의미를 되짚어서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의 방향을 복음의 정 중앙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복음의 선로를 이탈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그 이탈된 선로를 재 정렬하고 재 정비해서 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오늘 이 본문을 본 이유는, 우리가 오늘 베드로와 같은 복음의 선로를 이탈하는 실수를 쉽고, 의식 없이 범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실수 한 것은 무엇이냐면, 민족주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상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주의 또한 우리가 앞서 보았던 율법에 대해서 자유하지 못한 태도와 동일합니다. 이 민족주의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만 가졌던 특별함이 아니라 우리도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는 것을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짱깨”라는 표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중국인을 낮게 보아 이르는 말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도로 쓰지 않았어도, 조롱의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똥남아라는 단어도 들어 보셨겠지요.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비하하는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줄인 ‘외노자’라는 단어는 원래 뜻이 부정적이거나 비하의 뜻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없이 개그의 요소로 소비하곤 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유대인과 같은 민족 우월주의의 한 종류입니다. 한국은 특이한 생각이 우리들의 사고 아래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구권의 문화를 동경하며, 한 없이 저자세로 나아가지만, 우리들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문화에는 가차없이 차별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시절 공장에서 알바를 할 때에, 미얀마에서 온 형과 같이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 형님은 한국 와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욕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한국인 고용주들이 외국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한 단면인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두가 공감할만한 것이 중국과 일본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고, 미세먼지나 외교의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에게 까지 혐오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착짱죽짱이란 단어를 아시나요?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편견을 가진 표현입니다. 근데, 오늘 성경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의식적이던, 무의식간에 행했던 행동과 말들이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가로막는 심각한 행동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가로 막는 것이 다름아닌 우리의 그런 사고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얼마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냐면, 한 사도가 다른 사도를 심지어 책망 받을 일이 있어서 대면해서 책망했다고 합니다. 우리 그거 잘 아시죠? 어느 날 아내가 남편의 이름을 풀네임으로 부르거나,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갑자기 이재혁! 이리와! 하면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끼는 것이죠.
이러한 생각의 방식은 어디까지 확장시킬 수 있냐면, 바로 교회끼리의 문화에도 적용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여행을 가서 시골의 교회에 하루 참석했을 때, 그 교회의 시설과 시스템의 낙후된 것을 보고 우월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배타적인 사고 방식의 하나 입니다.
이게 가장 교묘하게 베드로가 실수하고, 바울이 심각하게 다룬 복음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또 우리 믿는 사람끼리는 이런 배타주의적 우월주의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바로 가장 교묘한 우월주의는 영적 우월감입니다. 영적우월감영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기도 많이 하기를 사모해야 하고 애써야 하지만, 기도를 제일 많이 했기 때문에 기도를 적게 한 사람보다 우월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많이 읽기를 사모 해야하고 애써야 하지만, 성경 통독 횟수가 영적 우월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였어도 이 예수님의 몸된 교회안에 흐르면 흐를수록 온갖 분열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베드로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작은 우월주의까지도 꺼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형태의 우월주의든 구원의 복음를 가로 막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복음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심각한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든 우월주의는 그 안에, 그 본질에 뭐가 있냐면, 행동으로 더 나아지려고, 의롭게 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작은 은혜로 주어진 복음이고, 중생의 시작점에는 그 어떠한 행위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을 잊은 결과입니다.
위대한 복음의 시점으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보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복음의 시점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 우월주의는 그 반대도 복음을 가로 막는 것이 되기도합니다. 왜냐면 차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은 차별을 받아왔기 때문에 더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억압과 차별을 받았지, 억압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보다 좀 더 순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개의 태도 모두,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지 못했거나, 그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입니다. 복음에는 그 어떤 행위나 우리의 상태가 낄 자리가 없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온전하며, 오직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성취된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우리가 낄 수 있는 자리는 복음을 받고 변화된 삶을 살아갈 때에, 그 속에 수많은 선한 싸움 가운데에서, 고민 가운데에서 성령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자리입니다. 구원의 시작에 우리의 행위를 끼워 넣으려는 행동이 바로 이 우월주의이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심각하게 베드로를 불러서 직접 책망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이 베드로를 심각하게 불러 대면했는데, 그 대면한 방식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타인을 변화시키고, 깨닫게 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된 복음의 규칙을 어겼습니다.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심각한 행동을 했습니다. 비록 그 의도가 위선이 아닐지라도, 그 행동은 복음을 가로막는 영향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근데 지금 바울은 베드로에게 ‘베드로 너는 지금 규칙을 어겼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졌다는, 그래서 복음을 얻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이야기 해줍니다.
그 죄를 행한 행동을 책망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책망하는 방법은, 죄를 지은 행동이 아니라 우월주의를 일으킨 깊은 내면의 원인을 터치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코막힘을 해결해기 위해서 코 혈관 확장제를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를 강건하게 하는 방법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회사에서 동료가 어떤 실수를 했을 때, 그 실수를 책망하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종류의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회사의 시스템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어떤 우월감 때문에 선택받아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아들여졌다는 그 사실을 다시한번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망과 교훈의 방법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들은 결국 복음의 메시지가 해결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복음을 듣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현대인의 삶의 문제는 너무나 다양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저만 해도, 짧지 않은 기간동안 회사를 경험했고, 그 속에서 많은 갈등과 문제를 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저보다 더욱 많은 경험을 하신 성도님들과, 변화가 많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문제를 겪으며 살지는 제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뭔가 교회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느낌도 또한 받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인 해답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저 또한 청년의 시절에 담당 교역자분의 설교를 듣고 항상 머리속에 물음표가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라는건데?
근데 복음을 이해하면 할수록, 복음의 무한함을 경험할수록 그 답을 찾게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고 그 속에서 만나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지만 결국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세한 삶의 지침들을 성경을 통해서 뽑아내고 그것을 실천할수도 있겠지만, 오늘 베드로의 이야기 처럼 우리가 마주한 삶의 문제들은 사실 복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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