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은 예배를 위한 일상이 아니라 예배로서의 일상입니다

신명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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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의 뜻은 예배를 위한 일상이 아니라 예배로서의 일상입니다
오늘은 한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떤 교회에 그 누구보다도 교회에 헌신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를 맡고있다보니 회사에서도 맡은 양들을 챙기느라고 제대로 회사일을 할수 없습니다.
목자라서 새벽예배도 참석하고 있는데 회사만 오면 너무 피곤해서 졸때도 있습니다.
양들 챙기느라 회사 회식도 제대로 참석하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집에서는 부모님이 한달에 한번 같이 저녁식사하자는데 교회일이 많아 잘 참석하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위해 이정도 희생은 각오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목사님은 자신이 헌신하는 모습을 보며 매번 칭찬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이 친구들 마음 한켠에는 뭔가 찝찝하고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새로운 일상신학이 온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사역과 일상생활의 관계를 네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번째가 사역 그리고 일상생활이고, 두번째는 사역을 위한 일상생활, 세번째는 일상생활 속 사역이고, 네번째는 사역으로서의 일상생활입니다.
첫번째 사역 그리고 일상생활은 사역과 일상생활을 서로 관계가 없는 영역이라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삶과 신앙생활에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그 둘을 무의식적으로 분리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때문에 개독교라는 욕을 먹을 때가 많습니다.
두번째 사역을 위한 일상생활은 일터나 가정과 같은 일상생활이 신앙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의 초점과 목표를 모두 사역에 맞추려 합니다.
제가 처음 말씀드린 사례가 이 경우에 속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태도가 옳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직장, 가정, 친구관계, 모든 일상생활까지 복음 전도와 신앙생활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킵니다.
정말 헌신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는 누가 되는 결과를 낳을때가 많습니다.
세번째 일상생활 속 사역은 교회에서 하는 일들을 평일에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도 똑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정예배를 자주 드리는 것, 전도나 봉사하는 것, 직장에서 신우회 활동하는 것, 직장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런 모습은 첫번째, 두번째에 비해 훨씬 나은 태도이긴 합니다.
그러나 한계는 여전히 사역은 교회와 관련된 일이나 종교적인 활동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네번째 사역으로서의 일상생활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는 모든 일을 ‘사역’이자 ‘예배’로 ‘선교’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는 바로 네번째 입니다.
그럼 우리는 일상생활을 어떻게 이런 태도와 자세로 살아갈수 있을까요?
[본론1]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수없이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구체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지켜야할 율법에 대해 소개합니다.
12-13장에서 모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나안 땅에서 일어날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그럼 이제 할말 다 한거 같습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고 예배하면 다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 아닙니다.
예배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 속에서 지켜야할 거룩한 삶에 대해 다루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삶은 성소에서 드리는 예배에서만 드러나는게 아닙니다.
성소에서 드리는 예배의 궁극적 목적은 일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배를 위한 삶보다 예배로서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목적도 나머지 6일동안 삶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본론2]
1입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자녀이니, 죽은 사람을 애도할 때에 몸에 상처를 내거나 앞머리를 밀어서는 안됩니다.
일상속에서 취해야할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제일 먼저 장례의식이 등장합니다.
왜 일까요?
먼저, 장례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죽음은 너무나 흔한 것입니다.
의학도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쟁, 전염병, 기근으로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니 장례는 그들의 삶에서 일상생활입니다.
의학이 발전한 우리 삶에도 장례는 매우 흔한 일상입니다.
저도 1년에 몇차례식 장례식장에 가곤 합니다.
코로나 기간에는 우리 주변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장례의식이 제일 먼저 등장한 또다른 이유는 장례의식이 대부분 종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만큼 종교와 긴밀히 연결된 영역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종교적 사회였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1절에 따르면 가나안 민족들은 장례식을 하며 자신의 슬픔을 표시하기 위해 몸에 상처를 내거나 앞머리를 밀어 대머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장례문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사람들의 이런 문화를 따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분명 그들의 이런 행동의 뿌리에는 종교적 신념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몸에 대한 종교적 신념입니다.
가나안 민족의 종교에서는 몸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에 상처를 내거나 머리를 밀어서 자신의 신을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2절입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주님께서 땅 위에 있는 많은 백성 가운데서 당신들을 선택하여, 자기의 귀중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귀중한 백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보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자 하나님의 보물이며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몸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함부로 다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럼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몸을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몸을 다루는 태도가 곧 예배로서의 삶이 됩니다.
우리 몸을 어떻게 드려야 예배가 될까요?
우리는 몸으로 예배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같은 종교적 행위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착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몸을 소중히 여기는 일들 모두가 예배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절제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열심히 운동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신앙생활을 더 잘 하기 위해서만 우리가 건강해야 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건강하게 만드셨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건강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몸은 육체만 가진게 아니라 정신도 몸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정신 건강에 나쁜 핸드폰과 게임을 자제하는 것도 몸의 예배입니다.
음악을 통해 우리의 정신을 고양하는 것도 몸의 예배입니다.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면 그것 자체가 예배인 것입니다.
물론 몸을 우상시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현대의학으로 내 몸에 너무 많은 돈과 시간 에너지를 쏟는 것도 경계해야만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육체과 정신을 건강하게 지킴으로써 우리의 종교적 신념을 드러낼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과 가장 밀접한 것들중에는 몸뿐만 아니라 음식도 있습니다.
3-21절입니다.
읽지는 않겠습니다.
이 구절들은 레위기 11장에도 매우 유사하게 등장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해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지 위에 있는 짐승, 수중 속에 있는 짐승, 공중에 날아다니는 짐승 구분하고 있습니다.
육지 짐승을 구별하는 기준은 갈라진 굽과 새김질입니다.
수중 짐승은 기준이 지느러미와 비늘입니다.
대표적으로 먹지 말아야할 짐승은 돼지입니다.
돼지 발굽은 갈라져있는데 되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돼지를 먹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분류하는 진짜 기준이 무엇인지 여러가지 이유를 거론합니다.
위생과 건강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또는 장례의식처럼 종교적 의식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만족스러운 답은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음식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21절이 그 근거입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므로,
2절에 나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이러한 독특한 음식문화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 음식을 먹음으로써 스스로를 구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음식의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라졌습니다.
마가복음 7장 15-16절입니다.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정결한 음식, 부정한 음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음식도 먹을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일상생활속 음식문화를 통해 주님을 예배할수 있을까요?
디모데전서 4장 4-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첫째, 음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성찬식 음식만 거룩한 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주신 모든 음식이 거룩한 음식입니다.
5절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식기도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음식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기도를 통해 이 음식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게 중요합니다.
또한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라한 음식, 일용할 양식일지라도 맛있게 먹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식기도는 얼마나 빠르고, 얼마나 간단하며, 얼마나 습관적이고 얼마나 상투적입니까?
식기도를 길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식기도에도 진심을 담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희 집도 음식물 쓰레기가 참 많이 나와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버리는 모든 쓰레기의 3분의 1이 음식물 쓰레기입니다.
이런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로 인해 세계 식량의 3분의 1이 낭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음식물 쓰레기에서 배출되는 메탄가스는 대표적인 온실가스입니다.
온실가스의 3분의 1이 우리가 먹는 음식과 관련되어 나온다고 합니다.
수많은 기후변화에 우리의 음식 과소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둘째, 생명을 중시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저절로 죽은 것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당신들이 사는 성에 있는 나그네에게 먹으라고 주거나, 이방 사람에게 파십시오. 당신들은 새끼 염소를 제 어미의 젖에 삶지 마십시오.
이러한 관습은 가나안 민족들의 음식문화입니다.
그들은 더 많은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새끼 염소를 제 어미의 젖에 삶아 그것을 땅에 뿌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동물의 생명을 잔인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엄마의 젖을 죽음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생명조차도 하나님의 것이기에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가나안의 타락한 음식문화를 따라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음식의 풍요속에 버려진 음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현대인들은 비만으로 인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들이 뚱뚱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 전세계 인구의 11프로가 하루 끼니가 없어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한끼 식사의 돈으로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수십명의 아이들이 식사를 해결할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과도한 소비 문화가 수많은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음식문화로부터 우리를 구별하는 삶이 바로 예배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당부이자 경고입니다.
우리가 올 한해 가야할 곳도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명기를 통해 올한해를 위한 당부와 경고를 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신명기는 먼저 예배를 다루고 일상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배의 거룩함은 반드시 우리 삶의 거룩함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예배로서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두가지 장례의식이나 음식은 모두 우리의 일상생활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을 유지하려면 중요한 것이 바로 구별됨입니다.
그래서 2절과 21절에서 두번씩이나 강조한 말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의 타락한 문화와 구별되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이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몸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며, 거룩한 음식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몸으로 예배나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성찬식 음식을 먹지 않아도 우리는 주님을 예배할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과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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