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의 사람,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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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8:10–22 NKRV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기도>
사랑이 많으신 삼위 하나님, 이 시간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주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의 심령 가운데 함께 하시며, 주님께서 사랑과 성령의 띠로서 저희를 하나로 묶으시며, 한 몸된 예배를 올려드리기 원합니다. 먼저는 은혜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시선을 두게 하시고, 나아가 성령의 감화하시고 교통하심이 모든 지체들의 마음과 함께 하시어 보다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날마다 주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이 더 뜨겁게 하시고, 말씀을 듣고 삶에 자리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의 지경을 깊고도 넓게 하소서. 주의 말씀을 들을 때에 주님의 마음이 저희들에 마음에 부어주셔서 현재의 문제가 과거의 문제되게 하시고 찬양과 영광돌리는 심령되게 하소서.
이 시간 삶의 중심을 저희들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모든 중심을 옮기게 하시고, 주님만을 더욱 사랑하며, 주님께서 나의 모든 삶의 주인 되시며, 주님께 온전한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되게 하소서. 또한 주님의 주되심과 범사에 감사하여 드리는 예물을 기쁘게 받으시고, 드리는 자의 삶과 동행하시며, 드린 예물과도 함께 하시어, 주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옵소서.
오늘 예배의 주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광고>
1.수련회를 위한 집중적인 기도를 부탁
2.말씀 묵상과 수품 기도회에 대한 참여 부탁
3.찬양팀, 방송팀으로 지원을 부탁
<짧은 간구>
우리 공동체의 주인이시고, 아버지되시며, 목자되시는 주님, 말씀이 주님의 호흡이시며, 주의 이름보다 높이 두셨습니다. 사모하는 심령으로 저와 모든 지체들이 말씀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문>
창 28:10-22
<OUTLINE>
창세기, 3주간 살피고 있음
[부르심의 사람들, 창세기의 인물들]
-창세기는 성도의 시작을 보여준다. 모세가 기록한 것이고, 교회이자 성도의 출발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래서 신약의 많은 부분이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지 조망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의 개척자와 같은 시작을 보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지면상으로 보아도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5% 정도 비중을 차지한다. 아담과 하와도 2%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얼마나 이 아브라함을 주목하고 있는가.
지난 에베소서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성도의 기업, 교회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고자 ‘부르심의 사람들’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인물별로 어떤 약속이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핵심 키워드는 ‘복’이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가장 큰 핵심이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극한 복이 ‘하나님 자신’ 이심을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증명하신다. 아브라함의 삶은 그렇기에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삶이었다. 큰 민족과 모든 이들이 기억한 창대한 이름을 약속하셨지만, 그의 삶에서 얻은 약속의 자녀, 이삭을 다시 하나님께 내어드리길 요구하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신 약속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아끼지 않는다.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시고, 가장 포기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도 순종과 행동이 늦어졌다 하더라도, 그가 자녀를 드릴 때에는 지체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좋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이 곧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지난 설교의 핵심을 논한다면, ‘약속과 명령’은 함께 온다는 것이다.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 걸음 나아가는 만큼 약속이 또한 성취되는 경험을 보게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삶은 믿음의 삶이자 동시에 순종의 삶이 가장 중요했음을 보게 된다.
오늘은 우리가 야곱의 삶을 살핀다. 야곱 또한 아브라함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다음주에는 요셉이라는 인물을 살펴볼텐데, 아브라함, 야곱, 요셉을 합친 분량은 조금 엄격하게 잡아도 70%에 육박한다. 엄청난 분량이다.
[야곱은 어떤 사람인가?]
먼저 아브라함과 야곱의 차이를 논하자면, 야곱은 신앙 3대이다. 모태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산적인 인물이다. 전략적인 인물이다. 여전히 내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 따져가며 믿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출발은 그가 모태신앙이지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도 모태신앙이었다. 그러나 이삭은 그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데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삶의 면면들이 겹쳐지고, 아브라함의 방식에 이삭은 거부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며, 아버지의 믿음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잠언에서 말하는 신앙하는 부모님에 대한 순종과 공경은 중요하다. 일 순간에 순종보다도, 부모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긴 시간 가운데 응시해보면 좋겠다.
그러면 야곱은 왜 이토록 어긋났는가. 너무 따지지 말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셨다.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이것이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을 야곱에게 보이셨다.
창세기 25:22 (NKRV)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야곱은 그의 생명이 시작될 때부터 경쟁이었다. 엄마의 뱃속에서 경쟁을 했다.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쌍둥이니 그 시작은 사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이 없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 형과 동생으로 인생을 누리게 된다. 나에게도 쌍둥이 누나가 있는데, 한번도 누가 억울하겠다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는데, 문득 야곱을 보면서 조금 뒤에 태어난 누나가 얼마나 억울할까. 이런 생각이 든다.
보통 조금 더 순한 사람이 뒤에 태어나지 않나 생각된다. 조금더 차분한 사람이 뒤에 태어나는게 아닐까. 야곱도 따지고 보면 그랬다. 형 에서는 매우 활동적이었다. 산과 들로 쏘다니길 좋아했다. 야곱은 장막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성품은 그랬지만, 야곱은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형이 되고 싶었다. 세상 물정을 아무 것도 모르는 뱃속에서부터 그랬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시작할 때부터 뱃속에서 다퉜다. 뱃속에서부터 승기를 잡고 싶었다. 엄마 뱃속에서 서로 치고 박고 싸웠다면 믿겠는가. 야곱과 에서가 그랬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에서가 먼저 태어났다. 하지만 야곱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형 에서의 발꿈치을 잡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특이한 인물인가.
야곱은 그래서 발꿈치를 잡다라는 의미가 그의 이름의 1차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의적인 이름인데, 속이다라는 뜻도 가진다. 여전히 야곱은 형의 자리를 쟁탈하려고 힘이 아니라, ‘머리’와 ‘속이는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간다.
그래서 들에서 사냥하느라 지쳐 배고픈 에서에게 ‘팥죽 향’으로 유혹한 후, 장자권을 팔도록 한다. 이것을 팔아넘긴 에서도 어리석었지만, 야곱 또한 얼마나 집요한지 보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야곱이 집요하다고만 볼수는 없다. 사실 야곱이 뱃속에서 다투고 투쟁할 때, 어머니 리브가가 하나님께 묻는다. 왜 이토록 싸우는 것인지, 이 싸움은 어떻게 해야 그치는 것인지. 하나님의 질서는 무엇인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은 곧 야곱이 진짜 큰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창세기 25:23 (NKRV)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의 인생에 정말 복잡한 문제는 이것이다. 자신이 정말 형의 위치를 차지고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이것이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편 야곱은 전율하지 않았을까. 정말 자기가 원하는 건데, 또 동시에 하나님이 원하신대, 자신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앞서 야곱은 한 차례 더 형의 것을 강탈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축복권이었다. 장자권과 축복권이 무엇이 다르냐라고 할 수 있다.
장자권은 가문을 지키는 존재로서, 가장의 권위와 책무를 계승한다. 어찌보면 통치권과 맥을 잇는다. 이것이 명목상 장자권이라면, 그 안에 세부적으로 살피면, 사실 재산도 다른 형제에 비해서 2배를 유산받는다. 세대가 거듭되면서 집안의 재산을 제대로 보전하는 의미가 있기에 그렇다. 또한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의미도 된다.
축복권은 장자권과 점차 구분되는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물질적인 번영함과 관련되어 있다.
야곱이 형을 속여서 장자권을 쟁취했지만, 아버지 이삭의 마음은 여전히 형 에서를 향해있었다. 그런데 이삭이 눈이 굉장히 어두웠는데, 아마도 녹내장 등이 원인으로 보인다. 거의 실명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기회로 어머니 리브가가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야곱도 이를 받아들여 아버지의 축복도 빼앗아가고 만다.
이렇게 보면, 모든 것을 쟁탈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얻어낸 것처럼 보인다. 야곱이 이를 얻어낸 것이 자신의 인생 반평생(약 70세/147세)을 보내었을 때이다.
창세기 28:11 (NKRV)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야곱이 빈털털이가 되어서, 그것도 집에서 도망치듯 밖으로 도피하는 모습이다. 그의 형이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이 또한 어머니가 눈치를 채고서, 약 800km 떨어진 외삼촌의 집으로 보내려 한다. 야곱은 이후로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어머니도 표면적인 이야기로는 야곱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이곳으로 보낸다고 한다.
이곳은 물론 어머니 리브가의 고향이지만, 마냥 환대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리브가 또한 떠나올 때에, 결연하게 떠났던 곳이기 때문이다.
야곱은 이 떠나는 길은 표면적으로는 결혼을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형의 위협으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한편 야곱이 떠나온 길은 약 70km 정도 된다.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가는 길. 이 길은 하루 동안 부지런히 간 길이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인근이다. 창세기 13:14, 아이와 벧엘 사이다. 한 세대를 건너서 동일한 곳에서, 동일한 약속을 주시고 계시다.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야곱으로 하여금 언약의 장소, 하나님께서 중심되시는 곳으로 이끄셨다는 점이다. 하란으로 가는 길은 크게 3가지의 길이 있다고 한다. 보다 편한 길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야곱이 이 길로 왔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이끄심이 이 자리 가운데서도 함께 하신다고 보아야 한다.
야곱이 가야할 거리는 상당한 거리였다. 해가 졌고, 들에서 유숙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러나 이곳은 위험한 곳이다. 야생의 장소이고, 또한 형의 은밀한 추적이 있을지도 모를 장소이다. 광야와 더불어 온갖 불안이 함께 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들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야곱이 많이 곤했고, 자신의 몸을 돌보거나 잠자리를 쾌적하게 정돈할 여력이 없이 피곤에 지쳐 잠들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비전과 약속은 무엇인가?]
창세기 28:12–15 (NKRV)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가장 놀라운 일은 지친 꿈 속이고, 도피의 꿈 속이라면 꿈 자리가 사나운 것이 보다 정상이다. 그러나 오히려 신비하고, 하늘과 연결되는 꿈을 꾸는 좋은 의미의 꿈을 꾸게 된다. 야곱의 인식을 점차 하늘로 끌어올리신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닥다리가 땅에 서 있다. 이 사닥다리라는 것은 굉장히 높은 곳에 기대어서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는 도구이다. 즉 하늘 허공에 그저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늘 끝에 닿아서 연결되고 있다.
약속이 흔들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다시금 약속을 강하게 재확신케 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익숙한 약속의 키워드들을 다시 주신다. 기억케 하시는 것이다. ‘티끌’, ‘서쪽, 동쪽, 북쪽, 남쪽’,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신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좌절되었던 약속이 여전히 살아있고, 여전히 야곱에게 있음을 상기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향해서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이 아닐까. 두려운 그의 마음을 녹여주신다. 아무도 자신과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의지가 되었던 어머니를 떠나야하는 상황이다. 철저히 홀로 떠나가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편재하신다. 특히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심지어 죽음의 영역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지옥에도 계신다고 말이다.(사도신경과 벧전 3:19) 그렇기에 야곱이 실수한 길에도 계시며, 야곱이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서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함께 하신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일화가 여전히 기억에 많이 남는다. 사형수들이 자신이 아들을 잃은 슬픔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형상을 회복하는 모습을 고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형수들은 말 그대로, 사회적으로 모든 측면에서 사실상 끝이 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여전히 소망을 불러일으키신다. 그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는 일들을 보게 된다. 심지어 그 정결하고 뛰어난 학식의 교수도 오히려 사형수들에게 배웠노라고 겸허히 머리를 숙일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다시 이끌어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 모든 약속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상실될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회복될 것을 이야기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면, 우리는 늘 돌아갈 자리를 염두에 두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주는 뛰어난 점들이다. 여러분들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늘 낭떠러지로 빠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이끌어내시며, 이 자리로 되돌이키신다.
[야곱의 반응은 무엇인가?]
창세기 28:20–22 (NKRV)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한편 야곱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고 하셨는데, 야곱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오면, 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어찌보면 하나님과 줄다리기가 아닐까. 하나님은 계속해서 야곱을 벧엘로 부르신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기를 소원하기보다는, 이 땅의 아버지의 유업을 받는 것을 더 관심가진다. 어찌보면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앞세우고 나타난 것은 야곱이 장자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아버지의 축복권을 주장한다면 여전히 그를 대적하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야곱은 오히려 아버지의 유산 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거부가 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과 야곱의 소원은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미묘한 차이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줄다리기 하며, 씨름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간구를 무시하시지 않으신다. 왜냐면 야곱의 이 기도는 서원의 형태인데, 그가 중요한 서원을 드리기 때문이다. 들판이지만, 이곳이 정말 예배의 처소로 만들겠다는 약속이 있다. 제단의 회복일까. 야곱은 35장에 이르러서 제단을 새롭게 회복한다. 또한 두번째의 야곱의 서원은 십일조를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급자이심을 인정함과 동시에, 제사장적인 삶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통해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야곱은 이렇게 서원했지만, 그가 이 서원을 갚았다는 말은 이후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소득의 십분의 일이라면 상당한 양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특기할 만한 일로서 기록되었어야 옳다. 그렇다면, 야곱의 거짓말했고, 이 약속은 이뤄지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찾으시고, 야곱의 후대로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이 십일조를 드린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제사의 제도와 십일조를 통해서 생활을 영위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태동케 된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시 통합하시고, 멜기세덱읠 반차를 따르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십일조의 마음을 받으시고, 한편으로는 더욱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와 모든 기반들을 지원하신다.
오늘날도 십일조가 필요없다. 사라졌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주받거나, 지옥가거나 그렇지 않다. 십일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며, 현대의 교회도 목회자가 십일조로 말미암아 생활을 지원받는 것이기에 이를 약화시키며, 목회자 또한 생업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결국은 사사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지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생업으로 뛰어들거나, 재정에 목줄이 묶여 사유화되는 현상과 오늘날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사역자들의 이중직을 허용하느냐의 문제는 시대의 상황과 맞물린다.
창세기 28:19 (NKRV)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여호수아 16:2 (NKRV)
벧엘에서부터 루스로 나아가 아렉 족속의 경계를 지나 아다롯에 이르고
이곳의 이름은 벧엘이라 이름한다. 거룩하고 경건한 장소에서 벧엘이라 지칭한다. ‘베이트-엘’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다. ‘루스’라는 지명은 살구나무라고 불린다. ‘루스’ 말고 다른 의미는 없을까. JPS 주석에서는 ‘피난처’의 의미도 지닌다고 한다.
한정건과 동일하게 벧엘과 루스의 지역이 서로 인접한 다른 곳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여호수아 16:2 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종합하여 본다면, 오히려 성읍이 루스이고, 벧엘은 들판이고 밖인 곳인데, 벧엘의 이름이 후에는 더 유명해져서 반전이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서 통찰하게 되는 부분, 하나님께서 야곱과 약속하셨고, 약속을 그의 인생 가운데 이루시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지명까지도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저 들판에 불과했던 곳에서 이름이 생기고, 원래의 ‘루스’라는 마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바꾸기까지 하신 역사가 있다는 점이다.
<기도제목>
내 인생에서 실수가 많고, 아직도 이룬 것이 없어 허망하다고 할지라도 내게 주시는 말씀이 나를 지키시고,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어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르심과 사명을 이루시기까지 떠나지 아니하심을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수련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정결한 그릇되게 하시고, 우리들의 삶을 정리되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시며,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들로 우리의 빈 그릇을 채우시며, 하나님께서 귀히 사용하시는 그릇으로 나아가게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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