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8 말씀은 우리를 강하게 세워줍니다. (에스라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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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우리를 강하게 세워줍니다.
여러분 이 에스라는요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온 대로 아론의 16대 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디서 태어났느냐? 바로 바벨론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이가 몇 살인지 몰라요. 언제 태어났는지 몰라요. 그러나 에스라가 사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 한 것은 소위 2차 귀환이죠. 그때는 주전 458년입니다. 남 유다가 멸망한 것이 주전 586년이에요.  그때 포로로 잡혀갔죠. 포로로 끌려 간 다음 약 130년 다음에 에스라가 돌아왔다구요.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없는 자의 후손으로서 포로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나라 없는 시대에 일본이나 중국 혹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과 똑같이!!! 여러분 이것은요 그 사람의 가슴속에는 수없이 많은 한과 서러움을 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존재감에 대한 강력한 무력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랄때에는 꿈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내가 이 나라와 이 역사에 기여할 어떤 꿈이 있어야 하는데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 꿈을 갖을 수가 없어요. 내나라가 아니니까 포로의 자녀들이니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죠. 아무리 몸부림 쳐도 어떤 한계 가운데 빠질 수 밖에 없는 어떤 절망감에 빠질 수 밖에 없고요. 뿐만 아니라 성장하면서 수없이 받았을 주변으로부터의 서러움과 비만과 조롱과 무시는 그 마음속에 상처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말이에요. 자 그런데 여기 말씀을 읽어보면 여기에 에스라가 나오는데 이 에스라는 절대로 그렇게 나약한 사람, 무너진 사람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볼 필요가 있어요. 분명히 그런 상황 가운데 있으면 분명히 어떤 서러움과 한으로 복받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에스라는 절대로! 그렇게 무너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어떤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삶 가운데 어떤 패배주의나 부정적인 생각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주 강하고 아름다운 내면의 소유자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 6절 말씀을 한 번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여러분 여기에 우리가 주목할 표현이 무엇입니까?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이 한마디 속에 지금 에스라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 지금 서 있는지 다 드러나 있어요. 이 한마디 표현 속에 그가 지금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고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가 다 드러나고 있다 그 말이에요. 여러분 왕이 에스라에게 뭐가 부족해서 혹은 뭐가 캥기는 것이 있어서 에스라가 부탁하는 것은 다 들어주겠습니까 아니 에스라는 가진 것이 무엇이길래 왕에게 원하는 것을 다 요구할 수 있으며 그 왕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냐 그 말이에요. 에스라에게 군대가 있습니까? 에스라에게 권력이 있습니까? 에스라에게 어떤 돈이 있습니까? 혹은 백성들의 지지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에스라는 그 페르시아의 다스림 가운데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방인 포로된자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방인에 불과하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고대 근동의 가장 강대국인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1세 아닥사스다왕이 그가 구하는 것이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겠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그말이에요.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에스라 그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 때문에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어요. 그는 권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에스라가 구하는 것은 다 들어준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왕이 그 마음을 에스라에게 빼앗겼다! 그렇게 볼 수 밖에 없어요. 왕이 에스라를 인정한다 그런 이야기에요. 매력이 있다 그말입니다.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에요. 그래서 왕이 그가 말하면 무시하지 못하고 들어준다 그런 이야기에요.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 자체에서 나오는 어떤 힘! 이것 때문에 왕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언젠가 청년들이 쓰는 말을 보니 ‘자체발광’이라는 말을 쓰더라구요. 그 말이 뭐냐? 그랬더니 조명을 받지 않아도 혼자 스스로 빛나는 것을 말한대요.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빛나는 사람 누가 주목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는 사람을 자체발광이라고 한 대요. 이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세요. 그게 본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사세요. 괜히 너무 빛나려고 노력하지 마시고 그냥 소박하게 사세요. 그래도 빛나니까! 괜히 스스로 발광하려고 무리하고 난리를 치면 어떻게든 눈에 띄어 볼려고 그러면 자체발광이 아니라 지랄발광이 되시니까! 이게 우리 사회의 정말 안타까운 현실아니에요. 저는 그런데 이 자체발광이라는 말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이 되요. 여러분 신앙인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하튼 간에 자체발광이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과 상관이 없이 그 사람 자체가 빛이나고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말이에요. 어떤 상황 때문에 어떤 환경 때문에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신앙 때문에 그 사람 자체가 말이죠 정말 빛나고 아름다워야 한다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다라고 저는 믿습니다. 에스라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무시당할 수 밖에 없는 아주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 자체가 힘이 있고 그 사람 자체가 아름다워서 그 나라 왕이 무시할 수 없는 그 나라 왕이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에요. 자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그런 상황가운데 그렇게 힘이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을까? 어떻게 했길래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그 대답을 우리는 이미 읽은 6절 말씀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또 읽겠습니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한가지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다 이 말 밖에 없어요. 에스라가 그 상황 속에서 정말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된 까닭은 힘이 있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선 까닭은 딱 한가지인데 그 이유는 바로 말씀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말씀때문에! 말씀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에요. 여러분 에스라는요 모두가 인정하는 하나님의 사람, 말씀의 종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며는요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라고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섰는데 이것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경받는 자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유대 율법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율법에 익숙했다면 유대교 안에서만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람이었을 법 한데 그것뿐만 아니라 유대교 안에서 존경받고 인정받는 것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상관이 없는 종교와 상관이 없는 페르시아 왕에게도 존경받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종교의 교리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그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사람은요 단지 신앙적인 종교적인 면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 그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되게하는 역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그를 좋아할 수 밖에! 모-든 인간이 그를 인정할 수 밖에! 종교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인간이라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에요. 특히 내면을 바꾸기 때문에 말이죠. 그야말로 자체발광이 가능하다 그말이죠. 목회는 말씀사역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목회는 다른 것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에요. 예수님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수없이 많은 목회 이야기가 있어 왔지만 다른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바꾼적이 없어요. 오직 말씀으로만 사람을 바꾸어 왔어요. 이게 전 분명하다고 믿어요. 언젠가 어느 목사님이 조언을 구해 오셨습니다. 이 분이 어느 교회에 부임을 했는데 이 교회가 문제가 많은 교회에요. 전임 목사님이 은퇴를 하면서 문제가 생겨서 교회가 싸우고 갈라지고 그래서 일부분은 교회를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다 사나워져 있고 이런 상황에서 이 분이 그 교회에 부임하신 것에요. 그러니까 교인들의 한 쪽에서는 다른 한 쪽이 잘못한 것을 줄줄이 고해 오고요 다른 쪽에서도 마찬가지이고요. 이 분이 어떻해야 할지 어려워서 조언을 구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 교회에서 목회한 경험이 없어서!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한가지 믿음이 있는데 다른 어떤 것으로 할 생각하지 말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말씀만 전해라! 말씀에만 집중해라 다른 생각하지 말고 사람만나서 밥먹으며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무조건 말씀만 전해라! 그러면서 제가 조언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절대로 전투복을 입지 말고 수도복을 입어라!!! 그러면서 그런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의 역사 가운데 사람을 바꾼 것은 말씀밖에 없었다! 그러니 모든 예배마다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열심히 전해라 말씀으로 승부를 열어라! 정말 그렇습니다. 말씀만이 사람을 바꿀수가 있는 거에요. 바로 그래서 말씀이 임할 때 사람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 에스라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말씀은 그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의 내면을 어떻게 바꾸느냐?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우리의 내면을 바꾸지만 특별히 말씀의 시편이라고 할 수 있는 시편 119편 176절이나 되는 시편을 통해서 그 비밀을 보기를 원해요. 이 시편 119편은요 176절이나 되고 있는데 이 시편을 자세히 읽어보면 세가지를 말하고 있어요. 이 세가지가 말씀이 어떤 것이냐?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내면을 만지느냐에 대해서 세가지로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말씀은 어떻게 역사하느냐? 1. 말씀은 내면을 강하게 세워주고 지켜줍니다. 첫 번째 말씀은 내면을 강하게 세워주고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내면을 강하게 세워주고 지켜준다! 여러분 마음이 무너지고 힘들때에 그야말로 마음이 녹아 내릴 때 그때가 문제 아니에요. 어느 순간 마음이 녹아 내릴때가 있어요. 내 마음이 무너질때가 있어요. 마음이 부서질때가 있어요. 그때 어떻게 이 마음을 세울수가 있느냐? 어떻게 이 마음을 추수릴 수가 있으냐? 여러분 이때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조용한 카페에 가서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 한잔을 마신다 그러면 더 무너져요. 방법이 없어요. 오직 말씀으로만 세워질 줄 믿습니다. 시편 119편 28절 말씀을 보니까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내 영혼이 눌림으로 녹아 버릴때! 무엇으로 날 세울것인가? 말씀으로 날 세워 주시옵소서. 전 이것이 분명히 역사하는 사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 말씀은 마음을 세우는 힘이에요. 또 유혹이 다가올 때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 어떻게 그 마음을 지킬 수 있느냐 그말이에요. 정말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확고한 신념 이것이 흔들릴 때 어떻게 그것을 다시 세울 수 있느냐 그말이에요. 앞에 닥친 삶을 향해서 힘있게 나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열정이 새롭게 솟아 오를 수 있느냐?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말씀이에요.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그런 힘을 준다는 것이죠. 시편 119편 5절 말씀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예!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레를 지키게 하소서! 말씀이 그렇게 역사하는 능력이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에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내면을 강하게 하는 것, 지켜주는 것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들어가는 사람은 흔들리는 마음이 아니라 강한 마음이에요. 세워진 마음이에요. 확신이 있습니다. 선명하다구요. 오늘 에스라의 본문을 보면 족보가 나오쟎아요.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신 분들이 적잖을 것에요. 왜 우리가 이런 지루한 족보를 읽어야 되나? 발음도 하기 힘든데... 그런데 필요가 있어요. 에스라의 족보를 쫙 읽어보며는요 그 족보 가운데 주목할 만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비느하스입니다. 5절 말씀에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그러니까 에스라의 14대 조상인 비느하스 이 비느하스와 에스라는 너무나 비슷해요. 이 두사람은 시간 차이가 많이 나는 시대를 살았지만 너무나 비슷한 하나님의 어떤 사람이에요. 에스라는 정말 비느하스의 성품과 스타일을 닮았어요. 특별히 신앙의 선명함에 대하여 믿음의 확실함에 대하여 두 사람은 정말 비슷합니다. 이 비느하스는요 무엇으로 유명하냐? 비느하스의 창으로 유명해요.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헤매이다가 돌고 돌고 또 돌아서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직전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모압땅에 가서 이들의 최대 위기를 만납니다. 왜냐하면 이 모압땅에서 모압 여인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기 시작했어요. 거기에는 모압의 신을 섬기는 흔히 신전창기들이죠 거기에 넘어가지고는 모압의 신들을 섬기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다 타락하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이 타락이 얼마나 무서운지 몇몇 못된 남자들만 넘어간 것이 아니라 족장들 까지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어요. 그래서 모세가 거기에 넘어간 족장들을 죽여 가지고 햇볕에 매달았습니다. 경고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이 모압여인과 음행한 사람들을 다 쳐죽이기 시작했어요. 뿐만 아니라 그 죄악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염병이 돌은 것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이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니까 울면서 난리를 치는 것에요. 하나님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죠 그렇게 죄 때문에 공동체가 무너지고 고통스러워 하는데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시므온 지파의 족장중의 하나인 시므리라는 사람이 모압여인중의 고스비라는 여인을 데려다가 자기 장막으로 끌고 가서 음행을 했습니다. 여러분 죄가 이렇게 무서운 것에요. 죄 때문에 고통을 겪으면서도 끊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그렇게 끊지 못하고 음행을 하는 그 순간 그때 비느하스가 아론의 손자이죠. 젊은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따라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찔러 죽여버렸습니다. 이게 유명한 비느하스의 창이에요.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느냐? 그때에 염병이 그쳤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그 죄를 끊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비느하스의 창이에요. 여러분 여기서 성경은 절대로 폭력을 옹호하거나 살인이 괜챦다고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고서 폭력도 때에 따라서는 괜챦은 가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말씀하면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며는 신앙의 선명함입니다. 모두가 죄에 끌려 들어갈 때 그 죄를 끊지 못하고 그 죄를 막지 못하고 그 죄에 흘러 동참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 죄를 끊어 버리는! 영적인 선명함과 결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비느하스의 창이라고 하는 것에요. 바로 그 비느하스의 영적인 선명함과 영적인 확고함 흔들리지 않는 어떤 확신, 믿음의 모습 그것을 그대로 닮은 사람이 에스라입니다. 그런데 비느하스는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졌는가 할 때 저는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질투심으로 질투했다는 거기에 있다고 봐요. 비느하스가 품은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봤으면 넘어갔을 것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니까 죄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는 것에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니까 안타까워서 견딜수가 없는 것에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니까 틀린 것은 틀린 것에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에요. 바로 그것이 비느하스의 선명함의 이유였어요. 에스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마음은 어떻게 들어오는가? 말씀으로 들어오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받으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 시작해요. 그래서 무너지지 않고 일어서며 흔들리지 않고 지키며! 말이죠. 선명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말씀은 이렇게 내면이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사람을 만드는줄 믿습니다. 이게 말씀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갖다가 무시할 수 없어요. 말씀의 사람들을 함부로 볼 수가 없다는 것이죠. 2. 말씀은 마음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합니다. 두 번째로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또한 그 마음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한다. 여러분 말씀을 영의 양식이라고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한 사람은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사람인 것이에요. 그래서 여유가 있어요. 그 마음이 아름다워요. 여기 시편 119편 76절과 77절을 보니까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그래서 말씀이 가득한 사람은요 영혼이 윤택해요. 말씀이 가득한 사람은요 그 영혼이 즐겁습니다. 시편 119편을 보면 그래서 즐겁다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이 가득한 사람은 사랑할 줄 알고요 용서할 줄 알고 품을 줄 알고 기다릴 줄 압니다. 말씀이 있으면 왜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에 말씀이 가득한 사람은요 사랑할 줄 알고 용서할 줄 알고 품을 줄 알고 기다릴 줄 안다 그말이에요. 아픈 사람과 함께 아파할 줄 알고 즐거운 사람과 함께 즐거워 하면서 함께 기뻐합니다. 에스라의 부흥의 때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온 백성이 함께 울고 함께 기뻐했거든요. 오늘 시편 119편 말씀을 보면서 아주 특이한 표현 하나가 나옵니다. 그것이 70절 말씀인데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이것이 무슨 표현이냐? 마음이 살져서 기름덩이 같은 사람이 있지만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여러분 마음이 살져서 기름덩이 이다! 무슨 뜻이에요? 여러 번역을 보니까 재미있게 번역을 했어요. 먼저 새번역에서는요 “그들의 마음은 무뎌 분별력을 잃었으나 나는 주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지방덩어리가 있으면 감각이 없어지죠. 그래서 마음은 무뎌 분별력을 잃었으나!!! 쉬운 성경은 뭐라고 번역했냐? “그들의 마음은 차디차고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의 법을 기뻐합니다.” 그 다음에 현대어 성경은 보니까 “저들은 걱정거리 하나 없이 아무런 깨달음이 없으나 이 몸은 주님의 법만을 즐거워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아파하든, 상황이 힘들든 어떤 상황에 있든 그냥 느낌도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 사람은 사람들이 좋아할 리 없어요. 한마디로 말하면 밥맛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말씀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역사하면 그 마음은 더 이상 무감각한 차디 찬 마음이 아니라 무뎌진 마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그 고통을 같이 느끼고 그래서 사랑할 줄 알고 같이 감동할 줄 알고 품을 줄 알고 같이 나눌 줄 아는 그런 사람으로 바뀐다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씀이에요. 정말 말씀은 마음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능력이에요. 그래서 말씀이 가득한 사람의 마음을 보며는요 거기에는요 풍부한 감성과 따뜻함이 있구요 그리고 서로 인정해주고 축복해 주는 그런 인격이 만들어집니다. 냉소적이고, 비판적이고, 까다롭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어요. 말씀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싫어한다면 그것은 말씀이 그 안에 임한 것이 아니에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말씀이 그저 지식적으로, 정보적으로 가득한 것이 말씀이 그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이 그 안에 가득하면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따뜻하니까! 3.말씀은 마음을 가치있고 존경스럽게 만듭니다. 세 번째로 말씀이 내면을 어떻게 바꾸냐할 때 세 번째는 이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가치있고 존경스럽게 만든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며는요 제일 중요한 것중의 하나가 우리 마음에 가치 밸류를 만들어 내요.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정직하게 합니다. 여러분 세상 없어도요 더러운 마음은 가치가 없습니다. 세상 없어도 깨끗하지 못한 마음은 존경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우리를 정직하게 하고 깨끗하게 한다! 시편 119편 7절 말씀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그랬어요. 또 시편 119편 9절 말씀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요 거짓을 행할 수가 없어요. 더러운 것을 용납할 수 가 없어요. 말씀 때문에 부끄러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말씀의 고발을 받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부끄러워해요. 그래서 스스로 정직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를 존경해요. 함부로 보지 못합니다. 어리더라도 무시 못해요. 이게 바로 말씀의 능력이에요. 또한 말씀이 왜 우리 마음을 가치있게 만드느냐? 두 번째 보며는요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가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존중하고 따를 수 있게 해요. 사람들은 지혜를 존중하게 되어 있어요 시편 119편 98절 말씀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시편 119편 104절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편 119편 130절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말씀을 들어오면요 그것이 지혜가 되요. 가방끈 길다가 지혜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 가운데 있는 사람은 정말로 지혜롭습니다. 말씀은 내 눈을 들어 보게 한다구요 무엇이 소중한지를 무엇이 중요한지를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씀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에스라가 그 힘든환경, 그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음에서도 그렇게 아름답고 힘이 있는 사람으로 선 것을 보면서 우리는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살아가면서 어떻게 해야 힘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우리는 분명히 붙잡아야 한다 그말이에요. 말씀의 도전을 받으세요. 말씀의 꿈을 꾸세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땅가운데서 존경받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우리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꿈을 꾸세요. 어떻게 그 아이들이 힘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 말씀을 그 가운데 심어주면 말씀을 있으면 그의 내면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힘있게 만들어서 정말로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강한 사람 그 마음이 정말로 따뜻하고 풍부한 사람 그러면서 그 마음에 지혜가 넘치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어서 이 땅 가운데 우뚝서는 에스라와 같은 인물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불러 일으키시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대로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은요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힘있는 사람입니다. 멋진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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