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원효섭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25 views
Notes
Transcript
1. 서 론
제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반장선거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몇 표를 받았을까요? 많은 표를 받아 반장이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1표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키도 크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원래는 제가 2표가 나와야 했습니다. 1표는 제가 스스로 저를 찍은 거였고, 나머지 한 표는 짝궁이 저를 찍어주기로 했으니 2표가 나와야 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1표가 나왔다는 것은 짝궁이 저를 찍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짝궁에게 추궁을 했는데, 주변 친구들도 이것을 보고 다들 짝궁에게 뭐라고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효섭이가 너 때문에 한 표밖에 못 받았잖아!”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굴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편 들어주는 건 고마운데, 내용이 좀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렇게 저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주변 친구들까지 싸움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뜩이나 1표 받은 것도 서러운데, 전체로 싸움이 번지니 인생이 참 서글펐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서 모든 사람이 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2. 본 론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안 주고 살아가면 다행이지만, 사람들은 서로 간에 얽혀있고, 영향을 주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한 사람으로 인하여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내용이 나옵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것은 이전에 나왔던 내용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나왔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방금 읽었던 12절에서 왜 죄가 들어왔고, 우리가 어떻게 되는지 세부적인 내용으로 이끌어갑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죄의 특성은 여러 가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되어야 하지만 바울은 단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죄는 실체가 없고,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은 죄라는 단어를 의인화까지 시키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이 죄가 살아 움직이고 있고, 적극적으로 행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죄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최초로 존재했던 한 사람, 즉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나는 도덕책에 나온 모든 내용을 다 암기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이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 자체가 살아 있고,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을 향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죄가 가져온 것은 무엇입니까? 사망이었습니다. 죄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죄가 가져온 사망 또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죄의 최종 도착지가 바로 사망인 겁니다. 사망은 다른 말로 죽음이라고도 불립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은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나는 시점이며, 다른 출발점이 없는 상태입니다. 셸리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책에는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라는 논의가 나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래서 죽음을 맞길 두려워합니다. 죽음은 죄로 인하여서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가장 무기력한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때로는 사상으로, 신화로, 행동으로 그랬습니다. 고대 근동 시대에 여러 가지 문화는 죽음에 관해서도 다양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죽음은 죽은 자가 어떤 형태로든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이집트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은 자들이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 지역적으로 항상 있었습니다. 동양지역에서 다뤘던 도덕경에서 “도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도는 영원하며 죽지 않는다는 영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만큼 죽음이라는 끝을 보지 않고, 영원함을 얻고자 하는 도가 특유의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양은 어떻습니까? 소크라테스가 나오는 파이돈이라는 책에서는 죽음에 대한 철학적 변증이 나옵니다. 자신이 맞이하는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고 단순한 육과 혼의 분리하는 겁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죽음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상과 문화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 자체가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누구 한 명도 죄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죄가 가져오는 사망 앞에서 누구 하나 어깨를 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천하장사였는데, 지금은 사라져가는 이슬과도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소싯적엔 유리병도 씹어드셨다고 합니다. 정말 드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유리병 맛이 저도 궁금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죽음 앞에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 영향을 받고 있다면, 우리 또한 당연히 영향을 받고 있겠지요. 우리 스스로가 죄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3절의 말씀에 잘 나와있습니다. 다같이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이 있기 전에 죄는 이미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죄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선험적으로 존재했던 죄는 관념적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셔서 죄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율법을 통하여서 우리 자신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지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따라 행동할 때 구원을 이루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율법의 또 다른 기능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때 죄의 인식을 가능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선한 기능과 더불어 죄를 인지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양면성인 거죠.
성도님들은 이런 율법 아래서 말씀을 더 잘 지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더 없는 죄인입니까? 예전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기독교 서적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제목 하나에서 벌써 우리의 가슴이 확 옥죄어 옵니다. 우리 삶의 핵심 질문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내가 가족들을 대하는 모습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모습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나도 바뀌지 않는 모습이 참 답답하죠. 주일을 지키고 난 이후 한 주간 살아가는 내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할 때도 있습니다. 아담이 행위언약을 받아 선악과를 먹고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행위 자체로는 구원에 이를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요?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4절 뒷부분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으로부터 기인했던 죄를 모두 이겨내주실 누군가가 오신다는 겁니다. 아담의 행위언약이 선악과 때문에 무효화 되는 시점부터 하나님은 이미 은혜언약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첫 번째 아담이 가져온 것이 사망, 범죄, 정죄, 불순종, 죄인이었다면 둘째 아담이 가져오신 것은 생명, 의, 은혜, 순종, 의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둘째 아담이 되셔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떠안으시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체험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죄의 유혹 속에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비로소 그것을 경험하셨습니다. 성육신을 통해 직접 우리 입장이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이 성육신의 신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을 제가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러한 예수님이 이제 우리의 모든 죄를 떠 안으시고자 결심하셨습니다. 다같이 로마서 5장 18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예수님이 행하셨던 한 의로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죄를 모두 십자가로 짊어지고 가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대신해서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죽음은 가벼운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북새통이었던 시장 거리를 지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롱과 모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래되고 황량했던 나무 십자가 위에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처절한 절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대신해서 생명의 값으로 대속해주시는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한 의로운 행동 덕분에 이전에 있던 구시대의 법은 무효화 되었습니다. 이제는 새시대의 법, 새언약, 은혜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어둠의 시대가 끝이 나고 여명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당신의 의로운 행위와 완전한 순종으로 인하여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 또한 의롭다 여겨주셨습니다.
루이스 스미즈의 용서의 기술이라는 책에는 성경 속 하나님의 용서에도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점진적 과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단계로 하나님은 죄로 인한 장벽을 제하심으로 죄인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되찾으십니다. 그 다음, 복수의 권한을 버리시고 친히 그 몸으로 죄값을 치르십니다. 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칭할 길을 찾으시며 법정적인 선언으로서의 칭의, 즉 의롭다 여겨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녀의 모습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범죄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더 이상 정죄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할렐루야!
너무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들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20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로 인하여 사망이 오지만, 죄로 인하여 은혜도 옵니다. 우리 안에 죄가 넘쳐났지만, 더 큰 은혜가 우리를 덮었습니다. 죄가 살아 역사하지만, 이제 내 안에 죄가 살지않고 내 안에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이 내 자신을 덮습니다. 비은혜가 은혜의 길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이 이제 나를 위해 사십니다. 내 자신이 못나서, 눈물과 한숨짓고 바보같아 보일 때에, 그 숨소리조차 싫을 때에 예수님은 우리의 등 뒤를 떠나지 않고 항상 보듬어 주셨습니다. 오랜 세월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죄책감을 품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열심히 찾는 내가 한심하십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내 감정의 골은 스스로를 향해 더욱 깊어만 가십니까? 여러 가지 중독을 이기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볼 때, 스스로가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십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3. 결 론
구시대는 신시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됩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께 은혜를 더욱 구하는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나의 신분은 이제 더 이상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더 큰 은혜의 강물 안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것에 흠집을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미 구부려진 것을 곧게 펴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같은 일을 이루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 구하면서 나아가게 되길 소망합니다. 죽음 이후 영원한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