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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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가운데 죽는다.
죄 가운데 죽는다.
죄 가운데 죽는다는 명제는 기독교의 존재 이유를 가장 선명하게 제시하는 명제이지만 명제를 풀어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을 뿥임으로 인해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을 정리하면 ‘죄 가운데 있다’는 결과에는 죽는다로 즉. 죄 가운데 있으면 그 결과가 죽는다는 논리는 32절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게 한다’는 대비적 구조는 우리의 이해를 더 쉽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 가운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죽는다와 자유케 한다는 말은 대비적이면서도 결과를 보여주는 선명한 논제가 됩니다. 자유케 된다는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 죽음을 면하려면 해방되는 것,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논리적 구성은 단순히 철학자의 명상으로 정리된 논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읽는 독자를 위해 요한 사도는 어린아이도 놀 수 있을 정도의 접근성, 안전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과 명절을 지키고 있는데 본래의 목적을 앞서 5장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나. 6장의 오병이어외 생명의 떡 7장의 생수 그리고 8장의 세상의 빛과 같은 실제와 이미지를 통해 알게 하셨습니다.
특히 간음한 여자에게 행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율법이 죽이는 기능, 판단하는 기능이 아닌 살리는 기능 ‘나도 너를 죙죄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율법은 살리는 것,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죄가 뭐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따라서 생각해보겠습니다.
21절에 ‘나를 찾다가’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36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앞서 3장에서 살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받는 자에게는 영생이지만 36절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닌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가 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홀하게 여깁니다. 귀 등으로도 안듣는다는 표현처럼 소홀한 정도가 아니라 거부한다는 의미를 담는 것이죠.
믿고 안 믿고늘 내가 결정하기 때문에 내 결정에 따른 위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죠. 철학자 이야기를 이번주에도 에피소드로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합리론의 창시자로 불리는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는 잘 몰라도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었죠. 그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늘 늦잠을 자고 그랬다고 합니다. 학교 시절에는 수학을 엄청 잘했는데 이런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교장도 기숙사에서 유일하게 데카르트에게만 아침 늦잠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정해진 규칙보다 자기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혼자서 많은 사색을 했던 데카르트는 유명해지고 여왕이 배우고자 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는데 새벽에 공부를 가르쳐야 했고 결국 피로 누적으로 몸져 눕고 죽게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좋은 것/ 나쁜 것을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학교도 다니고 함께 살아가는 윤리/도덕을 배우며 함께 살아가죠. 하지만 몇몇의 사람들은 ‘나는 원래 그래’라고 하면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바꾸기 보다는 나쁜 것에 머물러 있거나 나쁜 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쇼츠에 어린 아이 목소리로 ‘요랬는데 요렇게 됐다가 요래 됐습니당’하는 귀여운 멘트와 함께 변화의 과정을 담은 쇼츠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우린 원래 그래’라고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주장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 반란을 모의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잘못된 자세는 허리 목 등 오랜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지 못할 정도로 악화됩니다. 그렇듯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는 원래 그래’, ‘우리 민족은 원래 그렇게 율법을 명절을 지켰어’라는 말이 ‘나를 찾다가’에 들어 있습니다. 자기의 방법으로 믿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7월부터 1월 마지막까지 무려 7개월을 요한복음을 자세하게 살피고 있는데 아직도 ‘나는 원래 그래’라고 하고 있고 들리지 않는 말씀에 ‘왜 그런가’ 나는 왜 말씀의 깊이로 못들어가는가?를 살피는 정도가 아닌 ‘귓등으로 들리는 소리’라면 아직 빛 가운데 있을 때 다시 돌아서기 바랍니다. 이제 다음주부터는 예배 장소가 바뀝니다. 어떤 면에서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대하면서 예배를 드린 것이 더 나았을지 장소가 주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는 얼마지나지 않아서 알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한 두명 함께 참여한다면 또 다른 면에서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7개월 동안 살펴본 말씀에서 유대인들은 여전히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는 ‘나를 찾는 삶’을 살았지만 ‘너희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의 나라에 가지 못하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가 자결하려는가’ 앞서 ‘하나님을 보자’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런 취급하는 자들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사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류는 창세 이래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좋은 것을 알고도 그곳으로 가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 편16편에서 ‘하나님이 나의 복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의 선이시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피의 제사를 드려서라도 다른 신에게서 찾는다고 말합니다. 먼저 2절을 읽겠습니다. 시편 16:2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반면 시편 16:4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다른 신에게 목숨까지 받쳐서라도 찾으려는 자기 방법의 열심은 이처럼 대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주님’으로 오신 분이시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시편 기자는 당연히 그런 하나님을 날마다. 밤마다 ‘송축’하고 ‘즐거워 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편 16:11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해도 물론 부담이 있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인가요? 마태복음 7:11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하시는 것이지만 그러한 부모를 떠나는 자녀들을 어떻게 옳다, 잘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23절에 예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났다’ 이는 앞서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이유입니다. 인간만이 이상한 구름을 보고도 징조라고 하고, 찝찝한 기분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점치는 존재입니다. 동물은 결코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오늘 먹이를 먹는 일을 멈추거나 동굴 깊은 곳에서 사색하지 않습니다. 비록 가시고기나 몇몇의 동물들이 자식에게 자신의 몸을 주거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 눈으로 자녀에 대한 모성이나 부성으로 보는 것이지 본능에 따라서 정해진 자연법칙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만이 이들처럼 ‘그가 자결하려는가’는 존재의 목적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아래에서 났지만’ 그럼에도 ‘위’를 보고자 하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향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구도자의 삶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창조하신 인류인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은 인간과 처음으로 대화하십니다. 혹시 아십니까?
창세기 3:9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여기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말씀이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에게 신이신 하나님께서 던진 첫 말씀입니다. 어쩌면 선악을 알게하는 실과를 먹은 아담에게 ‘왜 먹었느냐’ ‘왜 내 명령을 어겼느냐’라고 묻는 것이 당연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범죄하지 말라는 요구는 ‘너의 자리’ 즉 ‘네가 거기 있다면’ 정죄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디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뿐 그들은 자리를 옮기지 못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고 한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5:9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즉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날, 회복되는 날입니다. ‘진리’는 열매의 단맛입니다. 열매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입니다. 이 열매를 먹으면 진리라는 단맛을 내고 맛본 자는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그가 한 기도의 핵심도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 시켜달라’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시편 51:12–13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24절에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입니다. 그들 눈앞에 보이신 예수는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무엇에 대한 증거입니까. 모세가 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이십니다. 출애굽기 3:13–14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사야 43:10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네가 누구냐’고 말하는 그들에게 ‘나는 처음부터’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성경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부합하며 26절 ‘나를 보내신 이’즉 하나님의 참되심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느것 하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 맞는데 하나만 유사하거나 안맞거나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판단에 달린 것 같이 보여도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내가 판단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처럼 들려도 예수께서는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참되시다’ 그러니 내가 하는 말 즉 ‘나를 믿어야 한다’는 자기 정체성의 말도 참이다는 말씀은 믿음의 관계, 시작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음을 다시 요한 저자가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로 하여금 가르침을 받고, 우리 삶의 고침을 받고 그래서 죄 가운데 거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서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하면서 그가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까지 거둬버리고 홀로 남겨진 자처럼 대하겠습니까? 간혹 뉴스에 고독사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웃으로 살아도 모른척 살고 왕래가 없이 살다가 쌓여진 우편물을 보거나, 겨울에도 사용되지 않는 전기 계량기를 보고서야 ‘무슨 일 있나’하고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자녀가 깨닫지 못하는 것 27절에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개닫지 못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장성해 자기가 부모가 되고, 또는 고치라, 바른 길로 행하라는 말을 저버리고 살다가 돌아온 병치레나 사고 후에 깨닫게 되는 것을 ‘후회하고 깨닫는다’고 말하는 것이죠.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라는 의미는 헛수고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 잃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라’는 행동의 변화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래서 앞으로는 변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 즉 ‘십자가의 죽으심’인 28절에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말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미래적 예언을 주십니다.
안타깝게도 인간 부모라도 엇나가는 자식과 연을 끊기도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결 즉 원래의 회복, 죄 가운데서 벗어나 진리로 자유케 된다는 의미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자유함은 어디에 있을가요? 거실에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피하면서 각자의 방에서 누리는 자유가 아니라 거실에서 아무런 꺼리낌없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말씀은 30절에 많은 사람이 믿었다는 저자 요한의 말로 가름합니다.
성인이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중 하나가 어려서부터 부모와의 분리 불안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벗어나는 순간 즉 분리 불안이 찾아옵니다.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인 개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예수께서는 분리불안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실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기뻐하심이 예수님의 기뻐하심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잠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29절에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관계에 가장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느낌은 그저 느낌적 느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신뢰를 기반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나님의 첫 음성처럼 본연의 자리에 있을때 서로에 대해 전혀 꺼리낌없는 관계가 유지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이러한 법칙으로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