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8 청년교회
Notes
Transcript
낮은 자의 하나님
낮은 자의 하나님
마가복음 10:1–16 (NKRV)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은 이곳 저곳을 다니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얼마나 피고하고 힘이 들었겠는가? 개인적으로 주일 사역을 마치면 얼마나 몸이 피곤하지 모른다. 설교 한번을 하고 집회 한번을 인도하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수 없이 사람들이 몰려온다. 오늘날 처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공간이 있는것도 아니기에 그리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때로는 무리를 피해 한적한 곳에 기도하러 가셔도 그곳까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따라왔다. 얼마나 피곤 하셨겠는가?
오늘본문에서도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무리들이 따라왔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하신 행동이 무엇인가? 전례대로 다시말해 이전에 하시던 대로 모인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과 환경일지라도 예수님을 보러 온 무리를 향해 ‘제발 귀찮으니 따라오지 말아라’ 말씀하지 않으셨다. 늘 언제나 예수님은 모인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시고그들의 병든 몸을 치료하심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주에 전한 말씀처럼 예수님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고,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내려오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무리를 향해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우리도 우리각자에게 있는 사명을 밝견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Keep Going 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 있는 사명을 온전히 바라보고 깨달을 수 있는 눈이 뜨이길 원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중에 예수님을 어떻게해서든 걸려 넘어뜨리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바리새인 이다.
이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척 예수님께 질문하지만 그 질문에는 많은 함정이 있다. 오늘 본문도 그렇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순진한 얼굴로 나와 물어보는 것이 ‘이혼을 해도 되냐’ 이다. 이 질문은 매우 민감한 질문이고 이 질문에 대해 잘못 대답을 했다간 여러 사람의 비난과 비판 뿐만 아니라,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질문이다.
과거
왜냐하면 먼저는 그 수많은 무리중에 이혼을 한 사람들도 있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당시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인 헤롯은 자신의 부인을 죽이고 새로운 부인을 얻고 심지어 동생의 아내까지도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래서 그것이 잘 못되었다고 이야기한 세례요한을 감옥게 가두었고, 끝내 죽였다. 당시 헤롯은 6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하였다.
그러기에 바리새인들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절에 그 질문의 목적이 정말 이혼에 대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묻는다고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질문을 한 바리새인들에게 모세가 어떻게 말하였는지, 다시말해 율법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에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바리새인들이 말을 한다. 이들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었다는 것으로 인해 이혼을 정당화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모세가 이혼의 타당한 사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이혼에 대해서 2가지 주장이 있었는데 먼저는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의 주장이다. 이들은 배후자의 간음 외에는 이혼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고,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힐렐학파는 다양한 여러 조건 중에 한 가지만 들어맞더라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남편을 불쾌하게 하는 이유에도 이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실제로 밥을 태웠을때도 이혼이 가능하였다.
결국 이들은 어떤 이유이든 이혼을 해도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우리가 결혼식에 가면 많이 듣는 말씀이다. 본문 9절이다.
(NKRV)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반대 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본문 11-12절이다.
마가복음 10:11–12 (NKRV)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아내던 남편이던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면 간음을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시말해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는 것은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멘붕 아닌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문자 그래도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적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당시 이혼문화 또 부부생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당시 이혼은 주로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당시 여성은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의 수를 셀 때 남자 장정만 수를 세었다.
여러분 여기에 개가 10마리 있고, 고양이고 10마리가 있고 남자가 10명 여자가 10명이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 사람은 모두 몇명이 있는가? 20명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람이 10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여자는 사람을 취급 당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여자에게 인권이 어디에 있는가? 2천년전 유대땅에서만 그랬는가? 아니다. 몇십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은 힘들게 살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애를 못낳으면 정확히 이야기를 한다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거나 다른 여자를 들여 대신 애를 낳게까지 하였다. 오늘날과 달리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는 살기 참 힘든 시대였다.
그러니 2천년전 유대에서는 더하면 더하였지 덜아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밥하다 밥만 태워 남편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면 그것이 정당한 이혼 사유가 되어 여자를 버렸다는 것이다. 잘 못한 것이 없어도 남자의 마음에 들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 여자는 이혼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이혼 당한 여자는 어디에서도 살아갈 수 없다는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회적 약자는 어린아이, 과부, 나그네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이혼을 금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오늘날 적용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장하였던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주면 이혼해도 된다는 주장을 예수님은 너희들이 잘못 적용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10:5 (NKRV)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너희의 마음이 완악해서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모세가 이혼을 하려면 이혼증서를 써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이혼 증서만 있으면 이혼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혼하기 전에 이혼증서를 써야 하는 또하나의 관문을 만들어 둠으로 인해 이혼에 대해 한번더 생각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혼하기 위해서 이혼 서류에 서로 도장을 찍고 법원에 가져다가 제출하면 바로 이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혼하기까지 여러 과정이 있는데 그중에 이혼 조정 기간이라는 것이 있다.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말 “4주 후에 뵙겠습니다” 이것이 이혼 조정 기간이다. 오늘날에는 3-4개월 소유가 된다. 이혼 조정기간을 두는 것은 그 사이에 다시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야 이혼이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혼하고 재혼하는 사람은 간음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처럼 이혼을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더 나아가 결혼 또한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혼이 쉬우면 결혼도 쉽다. 왜냐하면 마음에 안들면 이혼하면 되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남자에게는 이혼이 아니라 여자를 버린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다.
예수님은 이것을 원하지 않으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잘 보아야 한다. 정말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혼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에 대해 착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결혼하기 위해 연애를 하는 것이다. 연애는 그저 스킨십하며 좋은 감정을 가지고 놀러다니는 시간이 아니라, 이 사람을 잘 관찰하는 것이다. 그의 부모님들도 만나보며 어떤 사람인지를 관찰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결혼이 끝이 아니라, 결혼이 시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결혼하면 다 행복하지 않다. 나와 다른 삶을 살던 사람이 나의 공간에서 나와 같이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션은 이렇게 말했다. 결혼은 원석을 만나 보석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결혼은 보석을 만나 보석을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생활을 통해 원석이 나를 배우자가 보석으로 만들어 가는 시간인 것이다. 반대로 내가 원석인 배우자를 보석으로 만들어가는 시간이 결혼생활인 것이다.
그러기에 결혼도 이성교제도 신중해야 한다.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하때 이런 생각을 했었고 설교를 통해서도 말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 이냐면 우리 청년교회 공동체 안에서 커플이 생기면 광고시간에 소개를 하는 것이다. 충분히 축복받을 일이 아닌가?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헤어졌다면 동일하게 광고시간에 헤어졌다고 광고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는 의도는 공동체 안에서 이성교재를 하는 것을 쉽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충분히 고민하고 심사숙고하고 정말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 때 교재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날 때는 좋은데 헤어지고 나면 그 두사람도 힘들지만 공동체 전체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전부는 아니지만 한사람은 공동체를 떠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생각도 해봤다.
여튼 모세의 의도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의 뜻도 이런 것이다.
예수님의 시선은 늘 사회적 약자에게 가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단순히 이혼을 하는 것은 죄다! 라고 말 할 것이 아니라, 이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고통받고 어려움에 처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런 사회적 약자를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회적 시스템을 바꿔 이러한 약자들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고 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무엇인가? 어린아이에 대해 말씀하신다.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려고 하는데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꾸짖었다. 왜냐하면 당시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로 늘 무시당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같이 훌륭한 분에게 감히 어린이를 데려와?! 이러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14-15절이다.
마가복음 10:14–15 (NKRV)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예수님 제자들을 향해 화를 내시며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그 뿐아니라 그들이 무시하고 천대하고 인정하지 않은 그 어린아이를 모델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자기 못하리라”
지금 제자들이 무시하는 그 어린아이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란듯이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꼭 안아주시며 축복기도를 해주신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시선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도모르게 그저 그렇게 세상의 가치과으로 높은대만 바라보고 높은 사람들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럴 때 일수록 우리는 낮은 곳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그곳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낮은 곳에 계신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