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창조주, 우리 아버지

다시 보는 사도신경➀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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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2-13
오늘부터 우리는 9번의 말씀을 통해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가 믿고 또 믿어야 하는 신앙고백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 Ⅹ 퀴즈를 먼저 내보겠습니다. 화면을 보시면서 한 번 맞춰보시길 바랍니다.
▶ 사도신경은 성경에 나오지 않으니까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 사도신경을 흔히들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이라는 말이 성경에 있을까요?
▶ 사도신경은 정말 사도들이 만들었을까요? 사도들이 만들었다면 왜 신약성경에 한 번도 안 나올까요? 사도들 작품이 아니라면 우리는 사도신경을 버려야 할까요? 이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좀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먼저 말씀 한 구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4:14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믿는 도리’라는 말은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흔히 ‘신앙고백 한다’라고 하죠. 이 ‘도리’라는 말은 원래 ‘같은 말을 하다’라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신앙을 ‘같은 말’로 고백해야 하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신경과 같은 고백문이 필요했던 것이죠. 중요한 것은 이 ‘신앙고백’을 굳게 잡으라고 주님이 명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같은 말로, 같이 고백해야만 우리와 다른 신앙, 즉 이단과 같은 잘못된 신앙을 구별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럼 왜 우리는 사도신경을 함께 배워야 하고 또 신앙 고백해야 할까요? 내용도 잘 모르겠고 사람에 따라서는 아직 믿음이 없는데 억지로 고백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부흥회를 따라가면 강사 목사님들이 꼭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여러분, 믿슙니까?” (믿습니까? 라고 하면 안 돼요. 믿슙니까?) 그러면 다들 “아멘!”하시거나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청개구리 같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혼자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소심해서 크게는 안 했어요.) 뭘 믿으라고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무엇을 믿는지 모른 채로 그냥 “아멘!”이라고 외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저처럼 무엇을 믿는지도 모른 채 남들이 다 읊조리니까 사도신경을 그냥 따라 한 것은 아닙니까?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3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사도바울은 신앙고백에는 2가지가 있다고 했는데요. 첫 번째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가 그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많이 읽고 지식이 많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교리가 아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런 개인적인 체험만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인적인 체험들을 해석해 주는 믿음의 선배들이 전해주는 신앙의 전통, 즉 복음의 핵심을 전수받았다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구나! 성령님은 우리를 이렇게 도우시는구나!” 이런 내용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신앙에 중요했던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핵심을 아는 것, 이 두 균형이 바울의 신앙과 삶을 지탱해주는 뿌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핵심의 일부가 바로 사도신경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도리”인 이 신앙고백을 굳게 꽉 잡아야만 하는데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운연 목사님이 쓴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이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주었는데요. 왜 신앙고백을 꽉 잡으라고 하는가? 첫 번째는 ‘함께 고백’함으로써 그릇된 신앙을 구별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함께’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 아닙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걸러지는 곳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사도신경’이 더 중요한 이유는 교단과 교파에 상관없이 모두가 고백하는 가장 보편적인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사도신경을 통해 성경의 핵심을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은 성경의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배우거나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성경 말씀 가운데 교회가 믿어야 하는 핵심 내용을 정리한 것이 바로 신경(신조)입니다.
아시다시피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열두 사도의 가르침을 잘 요약한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만든 신조가 아닙니다.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을 고백의 형식으로 만든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떤 뛰어난 한 사람이 연구실에 가만히 앉아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럼 왜 매주일 예배 시간마다 이 사도신경을 공동체가 함께 고백해야 할까요? 이 사도신경을 라틴어로 ‘Credo’라고해서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이거든요. 이렇게 선포하며 시작하는 게 사도신경이라는 거예요. 무엇을 믿는다고 선포하며 예배가 시작됩니까? 화면에 있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구조]
나는 믿습니다 : 하나님 ➜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
나는 믿습니다 : 예수님 ➜ 그리스도,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주
나는 믿습니다 : 성령님 ➜ 거룩한 공교회, 성도의 교제, 죄를 용서받는 것, 몸의 부활, 영생
이렇게 보니까 좀 더 분명해지죠? 사도신경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백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 아닙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구합니다. ‘삼위’라는 말은 이 세 분의 서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개의 존재로 다르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일컫는 말인데요. 삼위는 세 분 하나님이 독립적이라는 것과 동시에 세 분이 ‘하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사도신경의 옛날 버전이 기억나십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교회를 좀 다니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는 우리말 사도신경의 옛날 버전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이렇게 눈만 감으면 술술 나왔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는 이 말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이 단지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일까요?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깊이 묵상해 봤으면 좋겠는데요. 옛날 버전과는 약간 달라진 것이 우리가 예배 시간에 고백하는 새번역 사도신경입니다. 이렇게 시작을 하죠.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여도 두 번역은 완전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라틴어로 된 사도신경을 보면 새번역 사도신경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 번역와 새 번역의 제일 큰 차이점은, 옛 번역에서는 “전능하사”가 “천지를 만드신”에 걸리고, 새 번역에서는 “전능하신”이 “하나님 아버지”에 걸린다는 점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말하자면 옛 번역은 “전능하셔서 천지를 만드셨다”라고 말함으로써 전능이 ‘창조 행위’와 연관된다면 새 번역은 “전능하신 아버지”로 하나님의 전능이 그분의 ‘아버지 되심’과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작은 차이점이 가져오는 “전능하신”의 의미를 묵상해 보면 좋겠는데요.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분이라고 할 때, 이 “전능”을 옛날 버전의 사도신경처럼 단지 그분이 하시는 일에 걸리도록 읽으면, 하나님의 전능이란 인격이 없는 창조 행위와 연결될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참 대단한 분인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분이 되고 마는 것이죠.
대기업의 자녀들이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 합니까? 내가 그 집안의 사람이 아니면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말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객관적으로 볼 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신이지만, 사도신경에서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전능하심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 하나님의 전능이란 단지 ‘객관적인 뛰어난 능력’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라는 선언은 “그 전능하신 분이 아버지시니 자녀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 주실 수 있다”는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의미는 그분이 ‘온갖 일을 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자’라는 객관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그분이 자녀인 ‘우리를 위하여’ 온갖 일을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신경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하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7:11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비는 자식이 구하는 것을 주는데 그것도 좋은 것으로 줍니다. 자식이기 때문이지요. 그런가 하면 로마서 8:15요.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기에서 “아빠”라는 말은 아람어의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신기하게도 우리말과 발음이 비슷한데, 우리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전능하신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처음부터 이렇게 소개를 하시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더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합독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불가능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나와 별 상관이 없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진짜 전능이야말로 당신의 친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보내주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슈퍼 히어로처럼 온갖 힘자랑을 하는 데서 그 능력이 드러난 게 아니라, 바로 자기의 외아들까지라도 우리에게 주시는 데서 그 능력이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이시기 때문이죠.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 그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신가요? 아버지를 생각하면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 속에 나타나는 ‘아버지 하나님’은 때로는 무서운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속의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아버지의 모습에는 어머니와 다른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어머니처럼 다정다감하지 않아도 늘 뭔가 표현하지 않아도 깊이 있는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그런 사랑 같은 게 있습니다.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야말로 그런 아버지의 모습 아닙니까? 단기적인 생각이 아니라, 장래를 바라보면서 준비시키시는 모습 같은 것이죠.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아브라함과의 관계입니다. 창세기 15:13-14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창세기 15장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번 약속을 확인시켜 주는 장면인데요. 하늘의 별을 보게 하시고 그렇게 무수히 자손을 주시겠다는 축복의 약속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민족을 이루는 것을 그렇게 쉽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의 노예 생활을 통해 민족을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바로 좀 이루어 주시면 안 됩니까? 400년이나 지나서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닌가요?
‘경영수업’이라는 말을 아시죠? 재벌들이 자녀를 훈련 시키는데 밑바닥에서부터 훈련을 시켜 올라오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훈련받지 않으면 복잡한 큰 기업을 경영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축복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는데요. 모두 예수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었던 자들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히브리서 11:1-3 합독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시고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아닙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을 바랐습니다.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소망의 근원으로 믿었다는 것은 그분을 나의 아버지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을 보면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120년간 방주를 지었습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맑은 날씨에, 그것도 산꼭대기에 100년 넘게 큰 배를 짓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을 것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와 그의 가족들은 사람들의 모욕을 받으며 인내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초점을 맞추고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7 합독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세상을 정죄하고” 즉 세상의 여론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살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가 방주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동시에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약속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방주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나와 내 가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 그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을 주고 계시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노아는 하나님께서 전능자로서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로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은 75세가 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정말 꿈같은 약속을 주셨지만, 그 축복을 먼저 주신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시키시는 먼저 하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축복이 아니라, 축복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점점 더 느끼는 것이지만, 편안함과 안락함이 결코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 축복을 지킬 수 없는 자녀가 축복만을 받는 것은 자녀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단지 창조주로서 이것도 만드시고, 저것도 만들어서 주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시되 그것들을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이러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분명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데, 우리를 훈련 시키시는 아버지의 손길이 보이기 때문이죠.
군부대 훈련소에서 한 장교가 이제 막 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군인 정신이 뭔지 아는가?” 훈련병이 대답을 합니다. “네, 군인 정신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우스갯소리인 것 같지만, 저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년 가까이 부모의 슬하에서 궂은일 피해 가며 보호만을 받다가 2년을 훈련받으며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 훈련병이 제정신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훈련병 시간을 피할 수 없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비로소 군인다워지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훈련을 받고 있는 이 기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정금같이 되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축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모든 자가 똑같이 하나님의 신뢰를 받은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훈련을 감당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상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끝까지 하나님의 훈련을 잘 감당하여 아버지께서 주시는 상급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언젠가 ‘원코리아’라는 청년연합수련회에 참석했다가 그곳에서 한 탈북 청년의 간증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남한에 내려와서 한동대를 졸업하고 국내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믿음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간증했는데요.
그가 탈북하기 전에 그의 새어머니가 그 청년을 불러서 충고했다고 합니다.
“네가 정말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라.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세요, 아버지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마도 그의 새어머니는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 중 한 명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당시에는 믿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간 그는 다른 탈북자들과 한 건물의 방 안에 숨어 있었는데, 갑자기 중국 공안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탈북자들이 공안에게 발각되면 모두 북한으로 압송되어 대부분 죽게 되는 것 아닙니까? 함께 숨어 있던 모든 탈북자들이 다 사색이 되고 죽음의 공포 앞에 그대로 다 얼어버렸다고 합니다.
다들 어쩔 줄 모르고 ‘이제 죽었구나’하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새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청년은 눈을 감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난생처음 기도를 했습니다.
‘아버지 살려주세요. 아버지 살려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가 끝나자 공안의 말을 통역하던 조선족이 와서 그 청년을 흔들었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하며 눈을 뜨자, 전혀 예상 밖의 말을 꺼내는 거예요.
“당신 혹시 한국 사람입니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산다고 들었던 것이 생각나서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공안은 두 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한국 어디에서 왔습니까?” “서울에서 왔습니다”
서울 말고는 아는 곳이 없어서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제 주소를 대라고 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 더 이상 묻지 않고 또 예상 밖의 질문을 하더라는 거예요.
“이 사람들도 다 한국에서 왔습니까?”
괜히 그렇다고 대답했다가 한 사람이라도 들통나면 모두가 죽기 때문에 머리로는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입술에선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젠 정말 끝이구나’하는데 공안이 또 예상 밖의 말을 꺼냅니다.
“한국 사람들이니 다들 이곳에서 나가주세요.”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가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좁은 문으로 한꺼번에 나가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자 서로 못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안이 뒤에서 그의 어깨를 딱 잡는 것입니다.
‘들켰나보다’ 그런데 또 이상한 말을 꺼냅니다.
“그렇게 한꺼번에 도망치듯 나가면 한국 사람들을 의심한 제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천천히 나가세요.” 그래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 청년이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저는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연약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저를 살려주신 하나님을 제가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제 인생은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신경 첫머리에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지만,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분이십니다. ‘창조하신 그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대’ 이것을 받아들이고 자녀로 살아가는 인생과 머리로만 알고 받아들이지 못한 인생은 분명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요14:18)”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아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없이 아버지가 없는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다들 그렇게 고백을 하니 나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만, 내 삶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단지 세상을 지으시고 돌보신다는 사실, 이 물질세계를 어떤 능력으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창조론을 부정하지 않는 정도로만 알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거기에만 그치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아버지 없이 내던져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라는 고백에서 우리의 아버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나를 안으시고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창조론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이 오직 그분께만 기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만 오직 나의 모든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 주십시오.
“육신의 부모인 나는 너와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너를 지키실 것이다. 어렵고 두려운 일이 있을 때 ‘아버지 도와주세요’ 하나님께 기대거라. 너는 결코 고아가 아니다. 부모인 나보다 너를 훨씬 더 안전하게 지키는 피난처가 되어주실 거다.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이것이 창조주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믿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임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고아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어려움 속에 있을 때 사람에게 뛰어가지도 마십시오. 우리의 아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로 달려 나와서 노아처럼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며 자녀의 권세를 누리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아바 아버지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는데요. 천지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분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에 여러분들 마음이 따뜻해지십니까? 부디 우리의 신앙고백이 머리에서만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고아와 같이 신앙 생활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가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이런 고백을 담아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저 성경에 있으니까 창조론에 동의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닌, 크레도!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그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 하름의 성도님들이 고아와 같이 신앙생활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노아와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그 크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전능하신 창조주라는 신앙고백에서 우리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함께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고 고백하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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