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개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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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2024년이 시작되면서 가장 뉴스는 인류가 70억을 돌파 할 것이라는 것과 많은 나라를 이끌 지도자들이 새롭게 선출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름바, ‘슈퍼선거의 해’ 입니다.
얼마전 끝난 대만 총통 선거를 시작으로 4월의 대한민국 국회의원 총선거, 11월에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 등 전세계 76개국, 40억명 이상이 선거에 참여 합니다. 이 선거의 결과는 지금 진행중인 전쟁과 세계정세와 세계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렇게 선거가 끝나고 나면 승리한 자는 새로운 리더가 되어 취임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정권이 시작되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서 행해지는 취임식은 선거의 승리를 축하하고 앞으로 나라와 지역을 이끌어갈 지도자로서 위엄을 보여주는 이벤트로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취임식에 특별히 공을 들이기 마련 입니다.
그 옛날 로마에서도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 로마로 입성 할 때, 성대한 행진을 했습니다. 그것을 개선식 이라고 불렀습니다. 전장에서 얻은 전리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사로잡은 고위층 포로는 포박하여 행렬에 동참 시켰고 환영하러 나온 백성들은 그들을 조리돌림 하였습니다. 개선식은 승리한 장수가 정치적으로 발돋움하는 개기 이자 백성의 인기를 높이는 기회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기사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순간은 일종의 개선식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구속사적으로 전 인류적으로 아주 중요한 순간 이었습니다. 또한 주님의 공생애의 최종 마무리를 위한 순간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살아간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라는 질문에 예루살렘 입성 전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지속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몸서 보여주셨다면 이제 예루살렘의 사역을 통해 그 사랑의 크라이막스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구원의 개선식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공생애를 통해 삶의 모범을 얻었듯이,
오늘 말씀의 아주 특별한 개선식을 통해,
우리의 삶이 화려함 보다 진실됨을 취해야 하는지 깊히 묵상해보는 시간 가져보겠습니다.
1. 화려함 보다 충성되게 따르는 마음
1. 화려함 보다 충성되게 따르는 마음
우리는 지난 누가복음 시리즈를 통해,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 처럼 산다는 것은 끊임 없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간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은 그것을 실천 하기 위해서 그 시작부터 이땅의 삶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습니다.
낮고 낮은 신분으로
누추한 곳에
성대한 환영식도 없이
그렇게 우리의 구세주는
하늘의 천사와 천군의 호위와
조용 하지만 밝게 빛나는 큰 별의 빛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의 탄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그분의 탄생과정에는 눈여겨 볼만한 화려한 요소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모든 공생애 사역을 매듭짖고
예루살렘 사역의 시작을 알립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우리 주님의 삶은 군더더기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와 뜻에 따라 착오 없이
그뜻에 따라 실행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삶에는 잠시의 방황도 없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고뇌 조차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적인 고뇌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주저함 없이 “앞서서 가시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종려주일의 개선식은
골고다에서의 ‘가시면류관 대관식’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골고다의 대관식을 앞둔 주님의 개선식은 정말로 특별했습니다.
주님이 제일 먼저 준비시킨 것은 탈것이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보통, 로마시대의 개선식의 장군은 수 많은 인파에 싸여 행진 합니다.
개선 장군은 화려하게 치장된 사두마차를 타고 입성 합니다. 식민지를 굴복시키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는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기 위함 입니다.
우리 주님은 백마도 아니고 하다못해 평범한 말도 아닌, 나귀의 새끼를 타고 입성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수많은 귀신과 악령들과 싸워 몰아내셨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여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포로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승리의 개선장군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충분히 개선장군의 대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그분의 본 모습을 인정했다면 아마도 그 어떤 개선 장군보다 귀하고 융성한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 자신이 그런 대접을 원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업적이 있거나 선한 일을 했다면 인정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분이셨습니다.
온전하게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스가랴서는 구약성경중에 38번째로 기록되었고, 그 시기는 BC 520년 경으로 추정 합니다.
약 500년 전에 이미 예언된 일을 성취하시는 일에 집중하셨던 것입니다.
2024년을 시작한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얼마나 명확히 알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수 많은 문제의 해답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혜를 갖고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그 지혜와 해답을 얻지 못해 낙심하거나 방황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그 지혜를 얻겠다고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언제나 그 지혜와 길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구했습니다.
욥은 28장에서 금은 보화는 깊은 땅속을 파고 들어가 얻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는 어디서 얻느냐고 질문 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이어서, 그 질문의 답을 자답 합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 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하나님은 과거의 모든 사건의 이유와 현재의 일어나는 일의 해결법과 미래의 있을 모든 일들을 대비하시는 “모든 길을 깨달으신 분” 입니다.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지혜의 근본은 그런 하나님을 경외함이고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을 통한 우리주님의 공생애를 바라볼때,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이부분 입니다.
항상 지혜를 구하고 항상 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권한이 있음에도 항상 아버지께 의탁하고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고 의뢰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사역 또한 그분의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 따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2024년을 주님의 뜻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며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들을때, 읽을때, 기도할때, 이 점에 촛점을 맞춰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받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마치, 깊은 땅을 파고 들어가 귀한 보화를 캐내는 마음으로 우리 삶을 지도해주실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애써야 합니다.
화려한 금은보화 보다 우리가 찾고자 갈망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믿음 일줄로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충성되게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개선식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충성되었고 명확하였습니다.
2.화려함 보다 진실됨
2.화려함 보다 진실됨
이렇게 ‘새끼 나귀’가 상징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뜻에 중심을 둔 사람은 외형적인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보통 자신의 입지나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더 열심히 정사를 돌보고 자신의 일을 열심하는 리더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외형적인 모습을 통해 사람들을 기만하고 압도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지난해 영국 찰스 왕의 대관식이 있었습니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이후 처음 열리는 대관식이었고 찰스왕의 기행과 아내인 카밀라와의 재혼 문제 등으로 정통성이 많이 흔들렸기에 대관식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관식에 무려 1700억을 섰다고 합니다.
대관식에는 여러 절차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차 마다 등장하는 화려한 보물들이 등장 합니다.
황금오브, 왕의 장갑, 왕의 반지, 왕의 롭, 황금마차, 왕의 검 그리고 운명의 돌. 이 운명의 돌은 야곱이 벧엘에서 베고 자던 돌베게 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화려한 대관식은 지난 1000년 동안 대영제국에서 행해졌습니다.
외형적으로 골로세서 1:9-20절 말씀을 낭독하는 등 성공회 전통을 따라 예배의 형식을 갖추고 있고 겸손한 왕의 모습을 부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 화려함은 그 의도를 무색하게 합니다.
현대에서 왕은 정치를 하거나 치세를 하지도 않는 그야말로 명예직인데도 이런 큰 돈과 물자를 퍼부어 대관식을 치룹니다.
1977년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보카사는 군사쿠테타 이후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대관식을 하는데, 지금으로 환산하면 1300억원에 이르는 돈을 대관식 하루를 위해 사용합니다. 이 돈은 그 나라의 GDP의 1/3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입니다.
그 외에도 수 많은 독재자들이 자신의 입지를 과시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외적인 치장에 돈을 아낌없이 쏟아붇습니다. 사이비 교주들이 그들의 옷이나 건물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짜는 굳이 치장하는데 자원과 시간을 쓸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정도의 형식을 갖춰야 하지만, 비본질보다 본질에 더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인생은 33년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사는데는 장수도 필요 없고 부도 영화도 필요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성공을 하면 신앙생활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멀리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외적으로 무엇인가 갖춰져야 신앙생활도 잘하고 열심히 해야지 라는 말은 이제 접어두고 바로 결단하여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즉시 실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명 받은 것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일에 일생을 받쳤습니다.
멀리 사모아나 인도나 오지로 가야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주님은 그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화려하고 내세우는 삶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정확히 일치하는 삶을 위해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사람을 들어 쓰시기 보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아주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을 쓰십니다.-장광태
예컨데, 아주 유능하고 영성 깊은 부흥사 였던 윌리암 부스에게 흑암에 앉아 신음하는 가난하고 헐벗은 형제들을 보여주셨고 그들을 돕고 하나님께로 인도하겠다는 일념으로 사역하다보니, 구세군이 창립되고 151년 동안 127개국에서 그 귀한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놀라운 결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부터 광대하거나 화려한 꿈으로 시작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웨슬리도 하나님을 순수하게 진실되게 만나기를 소망하였고 그 결과 신학적인 일가를 이루게 되었지, 신학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겠다고 생각하여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려함 보다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행해야 합니다.
3.화려한 예루살렘보다 속죄/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
3.화려한 예루살렘보다 속죄/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시, 유대교의 상징이자, 삶의 중심은 단연 예루살렘 이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의 도성의 의미를 뛰어넘습니다. 하늘과 연결되는 지상의 유일한 곳, 성스러운 하나님의 처소 입니다.
화려함의 정점에 예루살렘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가장 위세가 높은 사람들의 활동의 거점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41절 이하 절에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대한 슬픈 예언을 하십니다.
요하자면, 적들에게 포위되어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한 잔인한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예언의 말씀은 실제로 서기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20일의 저항 끝에 참혹한 멸망을 보게 됩니다.
이 멸망의 이유에 대해 주님은 의외의 말씀을 합니다.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평화”에 관한 일…… “네 눈에 숨기웠도다”
평화를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평화의 반대는 전쟁 입니다.
화해하고 협력하는 것이 평화 입니다.
적대 시 하지 않는 관계를 평화 라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의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말합니다.
그 평화를 완성 하는 분은 예수님 입니다.
예수님이 입성 할 때,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영 하지만 곧 주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염두해둔 예언 입니다.
즉, 주님을 통한 평화, 주님을 통한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의 성읍, 예루살렘은 곧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공동체인 예루살렘이나 인간 개인은 멸망을 맞게 됩니다.
구세군 설립자 윌리암 부스는 참모사관들에게 전하는 설교에서 이 ‘속죄’의 개념에 대해 설명 했습니다.
영어로 속죄 Atonement(At-one-ment) 아토오멘트
따로 분리 되었던 두 존재가 다시 하나되는 것
죄로 인해 분리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하나되는 것을 속죄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제사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속죄가 이뤄지는 공간 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다시 하나되는 거룩한 장소 였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 불화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주인인 공간이 되었고 거룩함 보다 죄에 더 가까운 곳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속죄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악하고 속된 존재가 하나님과 연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악하고 속된 존재가 하나님과 평화하기 위해 존재 했던 성전이 이제는 그 역할을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는데 앞장서니 그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불행한 상황을 타계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일은 성전을 정화 하는 일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다시 기도하는 집으로
속죄가 일어나는 곳으로 하나님과 평화가 회복되는 곳으로
다시 회복 시켜야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와 공동체가 거룩한 모습을 회복해야 소망이 있습니다. 더 이상 본질에서 멀어진 행위들은 용납하여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는 다툼이나 시기, 증오와 같은 죄악 보다는 사랑과 돌봄과 배려와 헌신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물질의 힘으로 일하기 보다는 한 사람 한사람의 믿음과 헌신과 정성으로 사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치 성막을 건설하기 위해 자신의 가진 은금 폐물을 아낌 없이 넘치게 헌신하고 자신의 재능을 순수하게 바치던 이스라엘 백성의 옛 모습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해야 합니다.
올 한해 우리 교회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소망 합니다.
또한 성도 개인들은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을 이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 Atonement(At-one-ment)가 이뤄지지 않는 문제 입니다.
개인의 삶에 속죄 즉, 아토온먼트가 일어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거룩하니 나도 거룩해야 함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하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의 일치
예배와 일상의 일치
말하듯이 살고
노래하듯이 살고 기도한 것을 실천 하는 삶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닌, 더 나아가 그 뜻데로 사는 것이 진정한 속죄의 삶이라는 것을 기억애햐 합니다.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으로는 죄를 사함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는 그 죄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으며 선하게 살기로 다짐하고 그렇게 살아갈때, 그 회개와 반성에 진정성이 있는 것입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물이기에 언젠간 무너졌듯이,
만약 교회가 건축물로만 남는다면 언젠가는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을 모신 성전으로 살면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을 줄로 믿습니다.
결론
결론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세상의 군왕들과 장군들의 개선식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전장에서는 더 많이 죽이고 더 많이 약탈하는 편이 이기고 개선장군이 되지만
우리 주님의 개선식은 더 많이 살리는 승리에 대한 환호 입니다.
주님은 이 구속의 개선식으로 죄는 발아래 두고
하나님의 뜻은 높이 올려지는 영광의 순간을 보이셨습니다.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속죄하는 자가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고 다시 화평하고 평화를 누리는 영혼이 한 명 한 명 늘어나는 것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 영광이로다 호산나!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삶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평화의 관계로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 처럼 충성되게 실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또한 내 몸이 성전이니, 내 안을 거룩하게 정화 해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을 몰아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나에게 향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힘을 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해봅시다!
하나님, 화려함 보다 진솔함으로 헌신하게 하소서!!
하나님, 저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추수할 곡식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어디로 가서 무엇으로 헌신 할지 알려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교회에 가장 필요한 곳에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
모든 여건이 외적으로 준비될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때와 하나님이 원하는 때에 내가 헌신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