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치유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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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을 치유하시는 하나님 본문: 이사야 53:4-6 찬송: 294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고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는 영원불멸의 삶을 살고 싶어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중국 전역으로 사람들을 보냈다. 하지만 결국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지만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죽음의 때가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기쁘지만, 죽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사람이 태어 났을 때부터 이 땅의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동행하는 동반자이다.
임경근, 교리와 함께 하는 365 가정예배, 개정판.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78, 502호: 세움북스, 2017), 45.
사람이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해 벌을 영원한 죽음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2:17 에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고 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그대가로 영원한 죽음을 벌로 받았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다. 로마서 5:12 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라고 말한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죄는 아담이 져질렀는데 왜 나도 같이 책임을 져야 하냐고 생각한다.
심방을 다녀온 뒤 집에 들어가면 집이 어질러져 있을 때가 있다. 눈에 제일 먼저 보이는 아이에게 “누구야 이것 좀 치워라!”라고 말하면 아이들이 제일 많이 하는 대답이 “제가 않했어요”, 치워도 “여기까지만 제가 한 거에요”라고 대답을 한다. 나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에요!”, “죄는 아담이 저질렀는데 왜 저도 똑같이 벌을 받는 것이죠?”라고 말다.
그런나 성경은 이러한 대답에 있어서도 로마서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다. 범죄는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난 행동이고, 죄는 보이지는 않지만 본질적인 상태를 말한다. 아담이 에덴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불순종 한 것이 바로 범죄이다. 우리는 아담과 똑같은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는 죄인이 되었고, 그 후손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 보모가 키가 남들보다 크면 태어난 자녀도 나중에 키가 남들보다 큰 것처럼 아담의 영적 상태가 유전처럼 우리에게 물려진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며 또 스스로 범죄하고 그 대가로 죽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비참한 일이다. 여러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존재이다.
그런데 사람이 처음부터 이런 비참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모든 피조물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실 때 사람만큼은 손수 흙으로 만드셨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어 주셨다(창2:7). 왜 많은 재료 가운데 흙으로 만드셨는지 의문이 든다. 기왕 강한 존재로 살 수 있게 무쇠로 만드시거나, 아니면 아름다운 존재로 살 수 있게 금은보석으로 만들어 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신 이유는 흙은 생명과 사랑과 정직과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흙이 가진 네 가지의 특징을 간략하게 말씀 드리면 이 땅의 모든 생명은 흙으로부터 시작된다. 흙이 생명의 양식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이세상 어떤 생명도 살아갈 수가 없다. 흙에서는 생명이 솟아 난다. 또한 흙은 것을 품고 안아준다. 온갖 쓰레기와 오물도 마다하지 않고 품고 품어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흙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흙은 우리가 심고 뿌리는 것을 그대로 거두게 해준다. 시금치, 모내기 등등. 그래서 흙은 정직하다. 마지막으로 흙은 토기장이가 물을 부어 반죽을 하고 모양을 갖추어 만들고 난 뒤 구우면 단단한 도자기가 된다. 자신이 원하는 도구가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도구로 흙은 재 탄생되는 것이다. 이것이 흙이 가진 네 가지의 특징이다.
이재철, 새신자반, 개정판쇄. (04084 서울시 마포구 양화진4길 3: 주식회사 홍성사, 2008), 50.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신 이유는 흙처럼 생명을 살리고, 서로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하나님의 도구 된 삶을 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냉정하게 평가하면 생명과 사랑과 정직과 도구 됨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한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달았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선행을 한다. 다른 이를 도와주고 좋은 일을 하면 내 모든 죄가 용서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받아드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마에 시달리다 죽어갈 때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때리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 위한 마음은 옳았다 할지라도 그 방법이 틀렸다.
창세기는 아담의 손자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고 말한다. 에노스의 뜻은 ‘인간’이란 뜻인데,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 사람들은 천년가까이 살았다. 아담은 930년을 살다가 에노스가 607세가 되던 해에 죽었다. 에노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제서야 최초의 사람 아담이 죽는 것을 보게 된다. 죽음이란 것을 경험하지 않고 계속 살아 왔기 때문에 죽음이란 것을 몰랐다. 그러나 아담이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았을 때 비로소 사람이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온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에노스이다. 그 한계가 명확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 우리도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세상 그 무엇도 누구도 우리의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이가 없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4:12 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말했다.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주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생명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4~6절에서 각각 눈여겨 볼 구절들이 있다. 4a절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말한다. 질고는 죄를 뜻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우리에게로 들어 왔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운명은 죄인이고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짊어지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의 운명을 책임지게 하셨다. 5a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요”라고 말한다. 범죄한 사람은 반드시 그것에 합당한 죄값을 치러야 한다. 아담이 저지른 범죄의 죄값은 죽음이었다. 그리고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르게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가 죄가 있다는 것도, 범죄하였고, 죄악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알고도 모른척 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사기 시대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대로만 살아간다. 오늘 고백의 기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탐욕과 게으름, 사치와 낭비, 주님께 대한 불순종, 이웃에 대한 무관심, 고난받는 이들에 대한 외면, 이웃의 영혼을 상하게 하면서 사람들은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어둠에 덮혀 있고, 죄악에 물들어 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이것을 치유할 수가 없다. 누군다 대신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은 예수님께 맡기셨다.
본문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사야 53:6 (NKRV)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아멘!
양은 약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다. 목자의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목자는 늘 양떼를 보호하고 지켜주지만, 몇몇의 양들은 풀을 뜯어 먹느라 정신이 팔려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양들이 먹을 풀은 어디에든 널려 있다. 그러나 모든 곳이 안전한 곳이 아니다. 저 풀밭 너머에 낭떠러지가 있을 수도 있고, 풀숲에 독사의 굴이 숨어 있을 수도 있고, 사나운 들짐승이 출몰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목자는 양떼들이 안전하게 풀을 뜯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안전한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양들은 이것을 모른다. 자기 욕심만 채우느라 무엇이 앞에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러다 사나운 죄악의 덫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6절은 우리 인간의 한계를 명확하게 말해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이것보다 더 큰 선물과 은혜는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슬픔을 당하셨고, 상함을 입었고, 징계를 받으셨다. 모든 양들은 털이 깎일 때라든지, 죽는 순간 구슬프게 운다. 그러나 주님은 잠잠한 양이 되어서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셨다. 대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하시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을 조롱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마지막 남은 물과 피를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함을 받았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나의 죄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하게, 온전히,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죗값을 완전히 치르시기 위해 그처럼 완전한 제물이 되어 주셨기에,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죄는 심판받았고 또 내가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재철, 새신자반, 개정판쇄. (04084 서울시 마포구 양화진4길 3: 주식회사 홍성사, 2008), 107.
우리 모두는 에노스이다. 유한한 존재,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 본질상 진노의 자녀, 죄의 본성을 지내고 태어난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주셨고, 이 세상에 다시 소망을 주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심(딤전 2:5)으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셨다. 주님의 고난받음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의 선물을 받았다. 이 세상이 하나님과 화해고 치유되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 귀한 은혜를 잊지않고 살아가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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