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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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성경봉독】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3:1-10] 입니다.
[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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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앉은 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속에서,
-> 이 사건을 ‘치유의 사건’으로만 보지 말고,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살펴본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데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성전에 문 앞에 두었는데 그 이유는 구걸하기 위하여서 거기에 두었다고 기록한다.
-> 제 구시인 오후 3시는 회중들의 기도가 수반되는 오후 희생제사 시간이었다.
📷 ***희생제사란 무엇인가?***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무슨 뜻일까요?
613개의 율법 가운데 무려 150개가 성전에서 드리던 희생제사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희생제사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는 희생 제사를 의미하는 단어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영어는 희생 제사를 'Sacrifice'로 표현합니다. 이는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불 태운다는 의미입니다. 즉 Sacrifice는 완전한 포기와 단념, 그리고 내려놓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반면 히브리어에서는 희생 제사를 의미하는 단어로 '코르반' (קָ רְ בַּן)을 사용합니다. 코르반은 '가까이 간다' '친밀한 관계를 회복 한다'를 의미하는 '미트카레브'에서 온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희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히브리어의 '희생제사'란 단어 속에는 ‘버리고 포기하고 불 태운다’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코르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친밀한 교제를 떠올리며 그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기쁨의 단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영적인 우리의 삶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비장함에 앞서서, 하나님 보좌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분과의 친밀감 속에서 영적인 복과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 제 구시에 드리는 희생제사의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과 가까이 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기도로 올려드려야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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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미문(the Beautiful Gate)대한 세 가지 가능성? 이 문은 어디인가?
① 성전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성벽의 동쪽에 있던 수산 문(Shushan Gate)이다. 그 문은 성전 밖으로부터 이방인들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② 이방인들의 뜰 안쪽에는 여인들의 뜰이 있었는데, 그곳은 동쪽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오직 이스라엘 남성들과 여성들만이 이 뜰에 머물도록 허용되었다. 요세푸스는 우리에게 니카노르 문(Nicanor Gate, 다른 이름으로는 구리로 만들어진 고린도인들의 문[Corinthians Gate]으로 알려져 있다)이 이곳에 위치했다고 말해 주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문을 미문으로 간주한다.
③ 여인들의 뜰에 난 또 하나의 문이 이스라엘의 뜰(the Court of Israel)로 이끄는데, 그 뜰 안에는 단지 유대인 남성들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랍비 문헌들은 이 문을 니카노르 문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성전에 대한 묘사가 혼동에 의한 것이라는 몇몇 증거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번째의 견해를 채택한다. 5세기부터의 기독교 전승은 첫 번째 견해를 선호하지만, 성전 전체의 동쪽 문은 구걸하기에는 빈약한 장소였을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 그 도시로부터 직접 닿게 되는 서쪽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동행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 두 번째 견해를 따르면, 이 앉은뱅이와 일행들은 ‘유대인들’이었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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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면서부터 못 걷는 앉은뱅이와
1) 그 앉은뱅이를 데리고 사람들과
2) 베드로와 요한의 관심사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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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패턴구성] - 38년된 병자와 앉은 뱅이사건
구걸하는 사람은 ‘간절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간절함’은
오히려 앉은뱅이보다 베드로와 요한이 더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요한복음 5장에 ‘병이 오래 되서 누워있는 병자를 예수님이 바라보시는데’
오늘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주목하는 거와 일치한다.
-> 그리고 똑같은 패턴으로 ‘일어나 걸어라’로 치유시킨다.
->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주목할 때,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이라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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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가 얻고 싶은 것은,
1) 앉은뱅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구걸하기 위해서
이들은, 은과 금이 필요해서였다.
2)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 사도행전 2:45절에 따르면,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라고 기록하는데 그것은 구제를 할 수 있는 돈이 충분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앉은뱅이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이름이(메시야) 필요한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
-> 곧, 희생제사(하나님과 가까이하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가장 절실히 필요함)
-> 베드로는 지금 그것을 앉은뱅이에게 얻게 한 것이다.
지금, 앉은뱅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보배로운 것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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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이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이 앉은뱅이 사건을 이곳에 배치시켰을까?
말하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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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통해서
누가가 말하고 싶은 의도는,
1) 성전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지켜야 할
-> 2) 구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 유대인들의 정체성인 ‘율법’(613개의 율법 가운데 무려 150개가 성전에서 드리던 희생제사와 관련된 것)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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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기능은 무너졌고, 율법의 기능도 무너졌습니다.
* 이제 새로운 성전과 새로운 율법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일으키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어나 걸어라”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들의 무너진 것들, 병든 것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희년 사상’입니다.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못 드는 자들에게 듣게 함을 병든 자들에게 고쳐주심을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이것을 경험한 자들은 오늘 앉은뱅이처럼,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새 성전의 도래 새 율법의 완성 이것은 성전과 찬미를 분리시킬 수 없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