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로운 하나님 정의로운 사회(신 16:18-17:13)

매일성경 새벽기도(신명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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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 명기 16장 18-17:13절 말씀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지도자 중 재판관이 따를 규범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재판관은 공의를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를 철저히 조사하여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8절은 하나님께서 재판관을 세울 것을 명령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제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재판관을 두라고 하시는데, 그들이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을 것이 “공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말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니까요, 재판관들은 결국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재판을 공의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판결을 보면서 그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법감정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말도 안되는 판결들이 속출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비싼 변호사를 사서 집행유예나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것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법정은 사람들의 직업과 가진 것을 보고, 또 돈만 많으면 무죄나 솜방망이 처벌을 받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보입니다. 공의와 별로 상관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재판의 행태를 비난하십니다. 그것은 재판관들이 해야할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어서 21절부터는 우상에 숭배자에 대한 재판을 이야기 합니다. 먼저 21-22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우상을 세우지 말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요, 이상한 것은 17장 1절입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우상 숭배를 이야기하는 도중에 갑자기 흠있고 악질있는 소와 양 이야기를 합니다. 문맥상 좀 이상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구절을 삽입하고 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무시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금하신 흠있고 악질 있는 소와 양을 하나님께 드릴 생각을 하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들이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무시하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바치기 싫으니까 이딴것들을 바치려고 가져 오는 겁입니다. 당연히 우상 숭배자이거나, 우상 숭배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합니다. 왜요? 하나님 보다 우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상 숭배를 처벌합니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무조건 말만 듣고 그들을 처단하거나 벌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7장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것이 네게 알려지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 볼지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만 듣고 흥분해서 우상 숭배자들을 벌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먼저 자세히 조사해 보라고 합니다. 증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지 죽일 수 있지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한 감정이 있으면 충분히 이런 고소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증언을 두 세사람의 증언을 듣도록 합니다. 더 나아가서 충분히 조사해서 그 죄가 밝혀지면 돌로 쳐 죽이도록 합니다. 그런데요, 7절을 보십시오. 누가 먼저 손을 댑니까? 네, 증인이 먼저 손을 댑니다. 즉 그 죄를 증언한 자들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을 죽이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요, 쉽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감정으로, 나쁜 마음을 먹어서 누군가를 음해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막고 있습니다. 즉 재판관들도, 무조건 죄를 지적하고 벌을 주기 보다는 철저하게 조사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온갖 사회면을 장식한 기사를 보면 이 기사가 정말 객관적인 것인지, 아니면 풍문으로 떠도는 것을 받아적은 것인지 판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이선균이라는 유명한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기는 마약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경찰이 증인 한 사람의 말만 듣고 계속해서 망신주기 조사를 하고, 매스컴에서는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마약 검사를 해서 음성이 나오고, 경찰에 공개 수사가 아닌 다른 수사를 요구하며 아무리 반론을 펴봐도, 여론 심판을 당해서 결국 세상을 등지는 선택을 했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사라져버리고 한 사람의 증언만 듣고 여론 재판과 망신주기 수사를 통해 아까운 배우 한 사람을 잃게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수사나 재판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처음에는 무죄라는 것을 기억하고 자세히 조사하여 그 죄를 판결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떠도는 여러 이야기들을 가지고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고 쉽게 죄인으로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보다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죄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카더라’통신이 돌때는 무조건 받아들이고 흥분하기 보다는 자세히 조사하여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 일을 통해서 교회가 더 공의롭게 바르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상방의 의견이 팽팽하여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 힘든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 나아가서 물으라”고 합니다. 오늘날로 하면 상급심에 가서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재판 한 번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보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상급심에 가서 상고 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보면 돌로 쳐 죽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오늘날로 하면 참 잔인해 보이고,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따져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로 여기면, 우리의 삶에서 정말 무겁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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