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의 사람,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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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9:1-9, “부르심의 사람, 요셉”
<기도>
사랑이 많으신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주의 날, 주의 시간과 장소로 저희들을 불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받으시고, 임재하시는 거룩한 시간, 거룩한 장소로 불러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우리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그 주님을 바라보며 상한 심령을 드리기 예배되기 원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정직한 심령으로 주 앞에 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대속의 핏값을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우리는 무자격하지만, 예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서 우리를 품어주시니, 주를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이 시간 예배하는 모든 지체들 정결하고, 거룩한 마음 주시옵고, 저희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함께 예배하는 동역자들을 한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 시간 되게 하소서.
또한 주 앞에 나아오며 정성을 드리는 지체들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복의 근원되시는 주님께서 요셉과 같이 함께 하시며, 형통케 하시는 자들, 복의 통로,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의탁드립니다. 저희 모두 이 시간 믿음으로 주 앞에 서게 하시고, 믿음으로 주를 보게 하시며, 믿음으로 주와 동행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하실 주님이시기에 감사드리며,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인생에 대한 무지]
인생은 때때로 우리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시험을 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차라리 시험을 보는 것은 쉬운 편입니다.
오히려 취업하는 것이 더 어렵지요. 면접도 통과해야하고, 내가 원하는 분야에 사람을 모집해야합니다. 취업은 또 더 높은 인생의 목표에 비하면 쉬운 영역이기도 합니다.
요셉 또한 야곱을 통해서 인생이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을 겁니다. 야곱은 결핍으로 말미암아 요셉은 풍족하게 키웠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부족함이 없는 인생일 줄 알았습니다. 무조건 신앙이 있으신 부모님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또 그 사람에 맞는 새로운 일들은 늘 펼쳐지기 마련입니다.
요셉 또한 풍족하고 찬란한 미래만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역으로 형제들의 시샘을 받게 됩니다. 야곱은 요셉을 높여주고 싶었지만, 오히려 요셉의 인생을 수렁으로 빠뜨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물론 요셉이 어머니를 일찍 잃었기에 야곱의 마음은 더욱 그를 챙겨주는 것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 편애가 너무 심했기에 형제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맙니다.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아들이었기에 많은 사랑을 받음(채색옷)
-고자질을 많이 함(창 37:2, 단, 갈, 납달리, 아셀)
-야곱의 편애로 형들과 관계가 더욱 단절됨
-꿈을 꾸었는데, 형들이 절하는 꿈, 형들과 부모님이 그에게 꾸는 꿈을 꿈
창세기 37:9 (NKRV)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사실 요셉은 이러한 꿈이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과 부모님들도 자신을 높이게 되는 일들이 발생할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범상치 않는 꿈은 아주 길게 기억하게 됩니다. 특별히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기억하게 됩니다. 요셉의 꿈은 그런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요셉이 형들에게 자랑했을 때, 그의 인생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창세기 37:24 (NKRV)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고난과 형통에 대한 새로운 정의]
<1> 요셉이 겪은 고난 1과 형통 1: 무조건적인 함께 하심, 즉 지켜주심
창세기 39:1 (NKRV)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원래는 요셉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1) 형들에게 먼저 죽을 수 있다.
2) 애굽으로 가는 상인에게 팔려서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다. 비관할 수 있지만, 그가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창 37:35-36 은 요셉이 죽었다는 야곱의 인식과 실제로는 그가 죽지 않고, 안전히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음을 비교해준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잠시 막간으로 38장 유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39장으로 다시 넘어간다.
창세기 37:35–36 (NKRV)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요셉은 형들이 그를 구덩이에 넣은 순간부터 침묵한다. 원래는 말이 없던 자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요셉을 말 없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언에 가깝게. 또는 죽은 자와 같이 마음의 근육이 모두 꺾인 요셉의 모습은 아닐까. 갑자기 침묵하는 요셉을 보면, 우리는 충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했는지, 아닌지 어떤 언급도 없다. 단지 말이 없어진 요셉만 있을 뿐이다. 가족들에게도 매매 당하고, 죽은 자처럼 여겨진 요셉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를 인위적으로 지우고, 또는 그를 위해서 죽듯이 울 뿐이다. 그를 도우러 올 자가 없다. 스올에 갇힌 상태라 해도 무방하다.
1)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그냥 간 것이 아니라, brought down 으로 표현한다. 요셉의 사회적 경제적 모든 위치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이다. 그곳에서 요셉은 매매당한다. 형들에게 은 20(창 37:28)에 팔렸다. 그리고 이스마엘(미디안) 상인이 보디발에게 판매한다. 매매를 당했기에 그에게는 자유가 없다.
이때 요셉을 사는 사람은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이다. 친위대장일수도 있고, 고관일수도 있다. 나중을 보면,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알면 이 또한 크신 섭리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 39:2 (NKRV)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2)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된다. 그 결과로서 주인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다고 말한다. ‘집’에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JPS 주석을 참고하면… ‘가사 관리’나 ‘재무 관리’ 같은 주요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매순간 밀도있는 순종이 인생을 다르게 한다.]
창세기 39:3 (NKRV)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3) 이러한 요셉의 형통함은 주인도 인정하는 바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는 말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는 요셉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주인은 요셉이 말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일의 결과로 볼 뿐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일 잘하는 요셉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요셉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투철한 신앙으로 그가 회복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요셉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었음을 주인이 알도록 생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39:5 (NKRV)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4-6a) 요셉의 지위는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서, 가정 총무 즉 자신이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맡겼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의 형통하심은 요셉과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의 손을 통해서 형통하게 하신다. 처음에는 요셉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요셉을 회복시키셨고, 또한 이후로 요셉이 손대는 작은 일들을 성공하게 하셨고, 주인의 모든 가정을 관리하니 그의 소유가 번성하게 하셨다.
창세기 39:6 (NKRV)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6b-7) 그러나 요셉은 용모가 매우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라헬의 아들이니 충분히 그럴듯 하다. 그러나 이것이 악용되기도 한다.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주다가, 동침하기를 청했다.
오히려 요셉이 가진 장점들이 위험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채색 옷을 벗기셨고, 이제는 그의 뛰어난 외모가 오히려 걸림돌과 같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험한 유혹들이 계속 이로 말미암아 던져진다.
세상은 뛰어난 외모, 채색 옷 등을 반긴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적인 인식으로 바라보면, 오히려 이것이 나를 위태하게 할 수 있는 양날의 검과 같은 것임을 보게 된다.
7) 은혜가 가득한 곳에 이처럼 시험도 함께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 여인은 물론 아주 매혹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잠언에서 등장하는 ‘음녀’와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인물이다. 걸리면 그냥 사망행이다(잠언 7:13-27). 만약에 요셉이 자신의 능력만 의지하여 살았고, 중간중간 자신의 정욕대로 살았다면, 이러한 시험을 이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잠언이 중요한 것은 늘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야한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귀를 열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Genesis 39:9 NKRV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8-9) 요셉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 담대하고 또 분명하게 거절한다. 요셉은 분명히 그가 이제는 안정되고 높은 위치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주인 다음으로 높여주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아내는 금지된 것임을 분명히 알고, 그 위험한 선을 절대로 넘지 않는다.
요셉이 보디발의 가정을 운영하면서, 한편으로는 보디발이 자신 또한 도달할 수 있는 존재, 그다지 대단해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여겨졌다면, 선을 넘었을 것이다.
특히나 요셉이 그 자신이 지위가 중요했다면, 꿈에서 본 바대로, 형들이 자신을 섬기고, 아버지가 자신을 섬기는 것처럼 지위가 중요했다면, 위험한 선을 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한 그의 고백은 여기서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이다. 성경에서 드디어 요셉이 입을 연 대목이다. 그런데 그 고백에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마치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처럼 묵묵한 존재로만 요셉을 묘사하다가, 또는 상처입은 양처럼 신음하는 존재처럼 그리다가 입을 열었는데,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죄에 지배를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숨는다. 하나님을 인식하기 싫어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다. 그러나 요셉은 불안한 상황이나 안정된 상황을 떠나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셉이 가지는 지위는 이스라엘 전체를 크게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곡식단과 별… 사실 거기서 부터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부르셨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사고, 죽게될 처지까지 떨어졌다.
처음에 요셉은 고자질 했고, 또 한편으로는 자랑했다. 그는 그에게 미친 화가 자신의 입술 때문임을 자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동안 긴긴 침묵의 시간을 보낸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인도하고 계셨다. 야곱과 다른 점은 그가 애써서 뭔가 쟁취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형통함이 있다. 고난 속에서 형통함이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요셉을 보면 그렇다.
[매순간 밀도 있는 순종이 인생을 다르게 한다.]
Genesis 39:22 NKRV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창세기 41:46 (NKRV)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이후로 결국은 보디발의 아내, 즉 음녀로 말미암아 감옥까지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형통함을 경험한다. 이 상황을 그만두어야겠다하고 로그오프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다 내팽겨치는 것이 아니다. 더 어려운 상황으로 떨어지지만,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다.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오히려 많은 것을 포용하는 요셉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인내의 시간은 그가 30살에 대제국에 일순간 총리로 임명되는 순간까지이다. 그는 향후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대비할 총리로 세움받는다. 그가 능력이 없었다면, 세움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밀도 높은 시간을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 안에서 준비되고 훈련되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셉이 담당한 지위는 사실 그 스케일을 뛰어넘는다. 원래는 한 가정에서 존귀한 자로 세움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열방을 위해서 쓰임받는다. 구속사 속에서는 이스라엘의 번영을 위해서 쓰임받았다. 극심한 대흉년의 시기에 야곱의 권속들을 살리는 역할이다. 그러나 비단 이 야곱의 가정만 살린 것이 아니다. 온 민족들을 살리는데 사용되었다. 애굽을 건졌으며, 애굽과 왕래하는 주변 민족들을 모두 건져냈다.
그러한 일에 요셉이 쓰임받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시고, 그를 존귀히 여겨주셨다.
3.한 절, 또는 핵심 키워드 묵상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가족이 그를 팔았고, 가족에게서 존재가 지워졌다. 그렇기에 요셉은 깊은 고난 속에 있다. 어디 하소연할 수 없는 침묵하는 요셉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사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만, down, 그리고 또 down 계속해서 인생의 하강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통하다. 고난의 연속인데 형통하다. 야곱은 스스로 애씀으로 인해서 고난의 연속이었다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고난의 연속이다. 그러나 형통한 고난이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종국적으로 빛을 보는 것은 요셉이 30세에 총리로 세움받는 때에 긴 고난의 터널을 마치게 된다. 하나님은 이 때를 준비시키신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요셉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주인에게 자신은 여호와를 믿는 사람이다. 여호와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그의 주인 또한 여호와꼐서 그와 함게 하심을 보며,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이렇게 말한다.
4.적용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가치를 아는 자였다. 중요한 것은 9절에서 드러난다. 위기의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위기의 때에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시기, 지금의 순간이 고난과 시험이 많다 할지라도, 나를 단련하시고, 연단하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믿으며 나아가길 소망한다.
우리 또한 9절과 같은 믿음의 고백을 위해, 오늘의 밀도 있는 순종으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지난날 나를 지키신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나와 하심이 내게 복이라. 고난이 있더라도 나와 함께 하심이 복이라. 이렇게 외치며, 오늘의 순종, 오늘의 말씀과 오늘의 기도의 자리를 삶 속에서 보다 철저히 의지하며 나아가길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선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형통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인정할때, 세상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보십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