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04주일예배_왕상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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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를 기대하는 믿음

본문: 열왕기상 17:8-16
열왕기상 17:8–16 NKRV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오늘 우리는 그 엘리야가 사르밧의 과부집을 찾아가 일으킨 기적을 전하는 본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저 흥미로운 옛 이야기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엘리야가 어떻게 민중들의 가슴 속에 메시야의 한 원형으로 기억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전해주는 이야기인 동시에 고단한 삶으로 지치고 스러져가던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삶의 희망을 불태우게 되었는지를 전해 주는 진실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중요한 배경은 이스라엘과 인근 전역에 내린 가뭄입니다. 그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어 죽음 직전에 이른 과부와 그 아들의 집에 엘리야가 나타나 그들을 도탄의 상태에서 구해준 사실을 오늘 이야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그 인근 전역에 내린 가뭄의 실체가 무엇이었을까요? 사르밧 과부 이야기의 앞뒤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여다  보면 그 가뭄의 실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민중들을 도탄에 빠트린 그 가뭄은 단순히 우발적인 자연적인 재해로서 가뭄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뭄은 당시 북 이스라엘을 다스린  아합 왕의 통치 성격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기근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절은 기원전 9세기 북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 아합 왕 시대입니다. 오므리 왕조 시대 북 이스라엘은 최고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오므리는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펼쳐 유다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며, 대외적 교역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일찌기 선진문명을 누린 페니키아(시돈)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그 문물을 도입했습니다. 그는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을 며느리로 받아들였고, 이렇게 하여 페니키아의 종교인 바알 종교가 이스라엘 내부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습니다.
풍요종교요 다산종교로서 바알종교는 야훼종교 이전에 이미 가나안 지역의 토착종교로 자리잡고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렇게 낯선 종교는 아니었습니다. 오므리 왕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그 바알종교는 사실상 국가종교와 다름없이 되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허울 뿐 실질적으로 북 이스라엘을 지배한 것은 바알종교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성장을 통한 국가발전 전략을 택한 통치체제의 문제요, 사람들의 일상적인 가치관의 문제였습니다. 바알에 대한 숭배는 물질적 풍요가 그 사회의 최상의 가치관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합 왕이 부당하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사건(열왕기상 21:1~29)도 그와 같은 배경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 배경 속에서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경고합니다. “내가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17:1). 그것은 바알숭배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바알숭배가 가뭄과 기근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경고였습니다. 바알은 비와 자연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를 주관하는 그 신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엘리야는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 풍요가 오히려 빈곤을 낳고, 경제적 성장의 추구가 오히려 성장의 퇴보를 가져온다고 하는 경고입니다. 그 경고는 곧 당시 현실이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하나님의 사람인 예언자 엘리야 자신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요단강 가에서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먹을거리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 아직 남은 시냇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냇물마저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시돈 지역의 사르밧에 이르고 그곳에서 과부와 아들을 만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전하는 상황입니다. 사르밧으로 들어간 엘리야는 뗄감을 줍는 한 여인을 보고 마실 물을 청합니다. 절박한 목마름의 상황입니다. 여인은 순순히 물을 뜨러 움직이는데 ‘염치 좋은’ 엘리야는 또 다른 청을 합니다. 먹을 것도 좀 갖다 달라 합니다. 기가 막히게 배고픈 상황입니다. 그 청을 받은 여인의 상황은 더 기가 막힙니다. 그 여인에게 먹을 것이라고는 빵 한 조각도 없거니와,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뿐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밝히는 여인의 이야기는 더 기가 막힙니다. 그에게 남은 밀가루와 기름 몇 방울은 자기와 자기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을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 절박한 상황을 전해 듣고도 엘리야는 ‘뻔뻔한’ 요청을 합니다. 그 남은 것으로 만든 음식을 먼저 자기에게 갖다 달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입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은 도탄에 빠진 민중과 하나님의 사람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그 상황에 매몰되지 않은 주인공들의 태도를 모순되게 겹쳐 놓고 있습니다. 먼저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한 줌의 밀가루와 몇 방울의 기름이 남아 있습니다. 희망의 근거가 다 사라진 것 같지만 남아 있는 희망의 불씨를 뜻합니다. 인생이 바닥을 쳤다고 느낄 때조차도 자신의 삶을 떠받쳐주는 어떤 근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 희망의 근거는 그렇게 남은 밀가루와 기름 곧 물질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먹더라도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정한 희망의 근거는 마지막 남은 그 물질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희망의 근거는 스스로 절박한 상황에서도 역시 절박함을 호소하는 타인의 요청을 뿌리치지 않은 여인의 태도에 있습니다. 여인은 목마른 나그네에게 물을 떠 나르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배고픔을 호소하는 나그네에게 먹을 것을 건네는 일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말하는 태도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그 나그네에게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말합니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17:12). 모든 사람이 바알숭배에 빠져 있는 것 같지만, 바알숭배의 본산지인 시돈지역에서조차도 그 숭배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의 존재를, 이 여인은 증거합니다. 그 여인에게 비가 내릴 때까지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여인 앞에 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여인이 지닌 희망의 불씨를 확인하고 살려내는, 사실상 기적의 촉매자로서 역할을 할 뿐입니다. 어쨌든 오늘 이야기는 이 단락만으로는 행복한 귀결로 끝을 맺습니다. 비가 내릴 때까지 그 여인은 죽음에 이르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혹독한 세월을 견뎌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린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그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사실을 전합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과 대결 끝에 비로소 비가 내립니다(열왕기상 18).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홀홀단신으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과 맞섭니다. 바알 예언자는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는 400명이었습니다. 이들이 별짓을 해도 그의 신들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엘리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 때서야 백성들은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고, 바알 예언자들의 기만을 알아차렸습니다. 백성들은 나서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모두 처결하였습니다. 그때서야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렸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이 이야기는 가뭄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경제적 풍요가 오히려 빈곤을 낳고, 경제적 성장의 추구가 오히려 성장의 퇴보를 가져오는 현실, 그것이 곧 가뭄의 실체였습니다. 비를 주관한다는 바알에 대한 숭배가 극에 달했을 때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돌보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었을 때 비가 내렸습니다. 엘리야는 그 일로 아합 왕의 미움을 사 죽음의 위협을 겪고 도망자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야는 자신의 당대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인물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제자 엘리사에게 계승되었고, 그는 하늘에 오름으로써 죽지 않은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후 문맥에 한정해 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을 때 기근이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풍요를 추구하는 바알숭배가 기근을 불러일으킨 반면, 도탄에 빠진 백성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회복될 때 기근이 끝났다는 성서의 증언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늘 저는 우리 현실에 대해 더 장황하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실상 바알숭배로 가득 찬 현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바알숭배가 판치는 현실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기를 기원할 따름입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그 믿음의 회복이 우리의 살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 믿음이 회복될 때, 오늘 이 역사의 가문 땅에 시원한 단비가 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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