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전 16: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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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기도하시겠습니다.
찬송가 219장(새 540장)
우리 이시간 예배를 위해서
선포될 말씀을 위해서
우리 마음 밭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코로나 전염병과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전쟁 속히 종식시켜달라고 기도하시고
몸이 불편한 우리 산성 식구들과 장기 결석하는 식구들 위해서 우리 나라를 위해서
주여 한번 부르짖고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16:35-40
35.날이 새매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38.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40.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사도행전 16:35–40 NKRV
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38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오늘 말씀은 어제 말씀에 이어서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어제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억울하게 심한 매질을 당하여서 온몸이 부서지고 찢어진 채로 피를 흘리며 중범죄자들이나 갇히는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깨어나 기도하며 찬양하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진을 보내주셨고, 그들을 매고 있던 모든 매인 것이 풀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나가지 않고 기다리며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던 간수를 말리면서 살려냈고, 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그와 온 가족이 믿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몸을 씻겨주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합니다.
이 일은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와 루디아에 이어 세 번째로 온 집안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은 사건입니다.
여기까지가 어제 우리가 나눈 말씀입니다. 이 모든게 밤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6:35 “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5절에 기록되어진 말씀대로 날이 새었습니다. 간수의 상관들이 부하들을 보내어서 바울과 실라를 내보내려 합니다.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유대인이기에 마음대로 재판도 없이 마구 때리고 바울과 실라를 가두었습니다.
사도행전 16:36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간수의 상관이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고 하니 간수는 기쁜마음으로 바울과 실라를 보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평안히 가라는 인사는 유대인들의 인사입니다. 이 인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였던 유대인식 인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용하시던 인사입니다.
누가복음 8:48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평안히 가라.
이 간수도 밤사이에 죽을 뻔했던 자신을 구원해주고 천국 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과 실라에게 기쁜마음으로 “선생님 여기서 이제 나가셔도 됩니다. 다행입니다. 얼른 나가셔서 평안히 가십시요”라고 인사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했을 때 사도바울과 실라도 “아 이제 끝났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채찍에 맞게 하시고 고통당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돌아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실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37 “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사도 바울은 간수의 상관들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 였습니다. 37절에 보시면 “로마 사람인 우리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실라도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 시민은 본인의 동의하에서만 지방 법률에 따라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승복하지 못할 경우 로마 황제에게 직접 항소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잡혔을 때 가이사랴로 끌려가서 총독 앞에서 “내가 황제에게 상소한다.”라고 했기 때문에 로마로 끌려갑니다.
그러므로 로마제국 내 각 행정구역의 총독이나 집정관은 명백한 죄의 규명 없이, 다시 말해 재판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로마 시민에게 매질이나 태형 혹은 고문을 가하거나 투옥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또 피고가 로마 시민이라면 언제든지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로바법은 피고인의 변론권을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노예제도가 있는 사회였는데도 불구하고, 로마제국 내에서 최하층이었던 노예의 변론권까지도 로마법이 인정해 주고 있었습니다. 노예에게도 이러한 제도가 있었는데 로마 시민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로마 시민의 자기 변론권은 정당한 법적 권리였기 때문에 정식 재판을 통한 유죄 선고 없이 이렇게 로마 시민을 때리거나 감옥에 가두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귀신들려 점치던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유대인’이라고 외쳤고, ‘로마 사람인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일을 한다’라고 하며 아고라에 모인 집정관들과 시민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을 ‘로마 사람인 우리’라고 구별하여 불렀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로마 시민이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는 것에 불을 지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인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소란스럽게 하고 거짓모함을 하며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습니다. 그렇게 집정관들은 바울과 실라를 재판도 거치지 않고 채찍질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산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인 우리를 불법적으로 때리고 가둔 사실에 대해 간수의 상관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석방시켜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8 “38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래서 부하들이 상관들에게 이 일을 보고했습니다. 그 상관들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적법한 절차대로 일을 진행하지 않고 선동당하여 마음대로 일을 진행했기에 사도 바울이 로마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 와서 청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16:39 “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서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도 바울과 실라를 심각하게 때리고 옥에 가두었는데 이제는 와서 권하고 청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의 말과 행동에 따라 이들이 자신들이 재판을 받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울과 실라에게 청하는 것입니다. 이 성에서 떠나주세요. 아마도 자신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변명하고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성경에서는 사과한다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마 자신들의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로마인이라는 것을 밝혔을까요?
로마 시민의 덕을 보려고 한 것일까요?
억울함을 풀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의 전도여행속에 빌립보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루디아와 가족들, 간수와 가족들 그리고 귀신 들려 점치던 여종도 귀신이 쫓겨나간 후에 예수님을 믿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일들을 보고 믿었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도구로 사용할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1:18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둘째로는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 였습니다. 물론 고난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참으면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겟지만, 그 고난 자체가 즐거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19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간수의 상관들은 계속해서 사도바울과 실라에게 떠나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에로톤’은 청하다라는 뜻인데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제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떠나기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사도바울 일행이 떠나지 않으면 문제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자신들이 법을 어겼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의 주인들이 또 다시 몰려와서 처벌을 요구할 경우에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6:40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나와서 루디아에 집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서 위로하고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디모데와 누가도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잡혀갔을 때 디모데와 누가 그리고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믿게된 루디아와 다른 형제들이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던 그들에게 사도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어떠한 은혜를 베푸셨는지 어떠한 역사를 보여주셨는지 간증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간증을 통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위로받았을 것입니다.
위로하고에 쓰인 헬라어는 파라칼레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위로하고라는 뜻도 있지만 권면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에게 나타난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하시고 복음을 간수에게 전할 수 있게 하심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힘써 기도하고 울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는 위로가 되었을 것이며 사도바울의 권면을 들었을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이 단어가 구별되어 사용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위로였을 것이고 그 일들을 겪고 얘기하는 바울에게는 권면이라는 단어로 쓰였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사건을 통해서 고난에 대해서 분명히 말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간증으로 고난이었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어떤일을 행하셨는지를 분명하게 말했을 것이고 그들에게 권면 했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고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의 이야기입니다.
16장 16절을 보시면 “우리가” 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우리가”라고 말할 때는 누가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와 디모데가 포함됩니다.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구절에서는 “그들”이라고 분명하게 지칭합니다.
40절에 보면 “두 사람이”라고 말하며 바울과 실라를 분명하게 지칭합니다. 그 두 사람이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라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를 떠납니다. 빌립보의 다음행선지인 데살로니가로 떠났습니다. 빌립보를 떠날 때 실라와 디모데는 함께 동행했지만 디모데는 나중에 다시 빌립보로 보내기도 합니다. 확실한 것은 누가는 빌립보에 남았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에 남아서 빌립보 교회를 위해 힘써 사역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과 실라에 대한 말씀이 주이지만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떠나고 나서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힘쓴사람은 누가인것을 오늘 40절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세운 여러 교회들 중에 특히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한 번도 꾸중하지 않고 사랑의 편지를 썼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또 바울의 전도 사역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교회입니다. 이러한 빌립보 교회를 위해 수고했던 이가 바로 누가인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모범적이고 훌륭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가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러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준 사도 바울과 실라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뿌려진 이 복음의 씨앗이 자라나게 해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자라났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 누가같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십시요. 아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여러 생각과 감정이 있습니다.
누가 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바울과 실라처럼 고통을 감수하고 복음을 전하고 누가와 디모데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고 섬기어서 바로 세울까?
다음세대를 보면 암울합니다. 희망도 없어보입니다. 그런데 더 암울한 것은 마땅히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이 다음세대를 보면서 참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들이 받았던 것처럼 고난과 헌신의 자리에 서지 않으려고 하는 기성세대를 보면 마음이 참담합니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천국 본향집을 향해서 간다고.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누어주고 섬기고 고통을 감내하면서라도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 있기보다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 적당히 하나님을 섬기고 나아갑니다.
제가 아주 신물나게 본 것중에 하나가 내가 받고 누리고 했던 헌신과 사랑을 다시 흘려보내지 않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는것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이게 안흘러갈것 같습니까?
흘러갑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받았던대로 헌신하지 못함이 흘려보내지 못함이 다시 우리의 모습이 다음세대에게 반복되어진다는 것 그것이 흘러갑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씨를 뿌리고 고통과 고난을 감내해 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역할이 있을 것이고 누가처럼 헌신을 통해 세워주고 자라나게 하는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자 주신 은혜대로 역할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마음이 있는 가 입니다.
어떠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시게습니까?
어떠한 삶을 살아가시길 원하십니까?
오늘 함께 나눈 말씀처럼 힘들고 어려울 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을 다시 흘려보낼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빌립보 교회처럼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되어지고 부흥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지고 권면이 되어지는 주님의 말씀의 통로가 되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릴통해 복음이 흘러가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찬송가 102장(새 94장)
이시간 말씀 붙잡고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의 복음의 통로가 되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마음을 쏟고 우리를 통해 그들에게 복음이 심겨지고 자라나도록 헌신하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정성범 집사 님을 위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주여 한번 부르짖고 기도합니다.
우리 이시간 주여 한번 더 부르짖고 각자 주신 은혜 붙잡고 기도하시다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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