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밑에 군상(群像)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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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온갖 누명을 덮어 쓰고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 십자가에는 다양한 종류의 군상들이 존재 했습니다.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주님을 참소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회피하고 누군가는 모른다 하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주님의 십자가는 처절하리 만큼 혼자 감당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전 인류를 위한 희생인데 말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명을 받은 주님이지만 이 십자가의 순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십자가, 그 고귀한 희생을 묵상하고 그 십자가 밑에 모여 있던 다양한 종류의 군상들을 살펴 볼 때, 큰 은혜 있으시기를 축원 합니다.

1.대적과 배신자

베드로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2:60 KRV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베드로는 배신자일까요?
주님이 잡혀가시던 그 밤에 베드로는 주님을 지키겠다는 혈기로 가득했습니다.
요한복음 18:10 KRV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다른 복음서에서는 어떤 이가 라고 말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 사람이 베드로 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랬던 그가 주님이 잡혀 가시자 “멀찌감치” 물러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54 KRV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하지만 그 누가 당당하게 베드로를 욕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저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베드로 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를 변호해보자면, 따르고 사랑하던 예수님이 무력하게 잡혀가는 모습에 베드로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평범한 어부였던 베드로가 특별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전적인 주님의 택함이었고 주님이 없으면 베드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고 배신을 했습니다.
가장 신뢰하던 수제자의 배신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닭이 울기전에 세번 부인 할것이다’
누군가가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이 벌어졌을때, 마음을 잘 추수리고 다시 일어나라는 미리 주는 응원이 아닐까요?
처음 주님의 예언이 떠올랐을때, 베드로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부활하시어 그를 다시 만나고 나서야 주님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인간의 연약함을 보듬어 주시며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돌아가서 질문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배신자일까요?
만약, 베드로가 다시 어부가 되어 그의 인생이 마감 되었다면 어쩌면 그는 배신자라는 낙인을 품고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후세에도 그는 배신자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베드로를 배신자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한번도 그를 배신자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부인 할것도 알고 계셨지만 다시 일어날 것도 알고 계셨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단면만을 보며 살아갑니다.
코끼리의 꼬리를 만지고 뱀이라고 말하고, 다리를 만지고 기둥이라 말하는 시각장애인 처럼 우리는 부분으로 전체를 평가하려 합니다.
만약에 잡혀가시던 날 그 곳에 있었다면 주님을 위해 용감히 칼을 드는 용사로 기억할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를 대제사장의 집 뜰앞에 모닥불 앞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그를 아주 신의 없는 겁쟁이로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베드로의 인생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그를 누구도 겁쟁이라던가 혈기 왕성한 용사로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십자가 밑에 있었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우리는 그분의 참혹하고 연약한 모습만보고
대중의 광기에 휩쓸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3:18 KRV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또한 주님을 조롱했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5 KRV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만약에 우리가 로마 군병이었다면?
만약에 우리가 주님을 정죄한 또 다른 십자가에 달린 강도였다면…?
주님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지 멀리 서 눈물짓는 여인들이 있었고 억지로 이긴 하여도,
대신 십자가를 지어준 구레네 시몬이 있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철저하게 누명을 쓰고 철저하게 버려질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렇게 초라하게 죽어 가셨을까요?
하지만, 우리 주님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기억하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과 함께 그분의 부활 때문 입니다.
우리가 재림을 믿는 이유도 그분의 ‘빈무덤’ 때문 입니다. 인류구원의 역사가 십자가만 기억되었다면, 이 보다 비극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우리는 때론 주님을 저버리고 믿음 약한 베드로 처럼 살아갑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우리를 가엽게 여기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일어나 주님 앞에 나아오면 위로하여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배신은 베드로가 아닌, 갸롯 유다 입니다.
그의 죄명은 배신이 첫째이지만 가장 큰 죄명은 돌이키지 않은 죄, 다시 일어 나서 돌아오지 않은 죄 입니다.
배신자로 평생을 살지 않게 베드로에게 은혜를 베푸신 주님을 끝내 저버린 유다는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속죄는 단순히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가 하나님과 다시 하나 되는 것을 포함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또 다시 죄를 짓는 연약한 인간 입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스스로를 살피고 영성생활을 한다하여도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데, 단번에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여 지는 여정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 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850명을 처단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 하지만, 이세벨의 살해 위협에 놀라 광야로 도망 합니다.
놀라운 역사를 경험 했지만 엘리야는 영적으로 고갈되고 낙망하여 로뎀나무에서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열왕기상 19:4 KRV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의 말에서 특이한 점은 엘리야가 자신을 자신의 선조들과 비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직전에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그가, 위대한 선지자가 자존감의 바닥을 경험한 것입니다.
얼마나 낙망되었는지 죽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적으로 살아갈때나 부족하고 연약한 중에 낙망할때도 우리를 먹이십니다. 그리고 쉼을 주십니다.
열왕기상 19:5–8 KRV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마치, 힘든 타향살이 지쳐서 고향집에 갔는데,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서 스스르 잠이 들었는데,
할머니가 조용히 불을 꺼주시고 이불을 덮어주시는 장면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신없이 자다가 잠에 취해 있을때, 따뜻한 밥상을 차려 오셔서 깨워서 ‘밥은 먹고 자야지’ 하시는 것입니다.
밥을 먹고 다시 잠들어 자다가 보면 또 깨워서 이것저것 간식을 챙겨주시는 기억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쳤던 마음과 몸을 회복 시켜주시는 그 따뜻한 고향집의 모습 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먹이시고 쉬게 하시고 회복 시키십니다.
위대한 선지가 어찌 죽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느냐 책망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먹이시고 쉬게 하여 회복 시키십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게 하십니다.
열왕기상 19:18 KRV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도 로뎀나무의 시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로뎀나무의 시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로뎀나무에서 절망 가운데 머물지만, 누군가는 로뎀나무에서 새힘을 얻습니다.
열왕기상 19:15–16 KRV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광야를 돌이켜” 왕을 기름붇어 세우고 엘리사를 세워 후대를 양성하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 합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가장 큰 차이는 회개하며 화평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주님을 기다렸는가? 아니면 스스로 그 죄를 안고 죽었는가?의 차이 입니다.
배신자였던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받쳐 살았고 구원에 이르렀지만, 주님의 구원을 사모하지 못하고 스스로 죄 가운데 엎드려진 유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대적으로 남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오늘 나의 모습이 베드로와 같고 가롯 유다 같을지도 모릅니다. 수 없이 넘어집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될지 유다가 될지는 우리의 기도와 삶에 달렸습니다.

2.구경꾼

배신자와 대적들이 있었고 그리고 구경꾼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구경꾼은 빌라도와 헤롯 이였습니다. 그는 총독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판결할 권한과 의무가 있는데도 책임지는 것을 거부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다는 공정한 모습을 보입니다.
누가복음 23:14 KRV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이미, 유대지역의 분봉황인 헤롯에게 예수님을 떠넘겼다가 다시 돌아온 상태 입니다. 이제 무엇인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23:23–24 KRV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헤롯은 구경꾼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23:8 KRV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예수님을 보고 기뻐 합니다.
온 유대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과 이적과 표적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을 유명한 사람, 칭송받는 사람 정도로 보았습니다. 마치, 유명한 정치인 이나, 연예인이나 아이돌 정도로 봤다는 것입니다.
유명목회자나 유력 정치인의 권세나 유명인의 인기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인기와 권세가 거품 처럼 사라지고 나면 어느샌가 관심이 식게 마련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누가복음 23:9 KRV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뭔가 놀라운 이적과 기적을 보여줬으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헤롯왕의 대화를 숨죽이며 보고 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아마도 헤롯왕이 예수님을 풀어주진 않을까 마음 조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무런 눈에 띄는 퍼포먼스나 쇼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누가복음 23:10–11 KRV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대적이였던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기다렸다는듯이 “힘써 고소 합니다”
구경꾼이었던 헤롯은 곧 실망하여 주님을 업신 여깁니다.
구경꾼의 특징이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나 보자”
“당장 무엇인가 보여줘라”
이들은 오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을 싫어 합니다. 그리고 물밑에서 잔잔하게 꾸준하게 일을 진행 하는 것을 못견뎌 합니다. 천천히 근본적인 변화와 성장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조급함을 느낍니다. 이내 곧 뒤돌아서 대적이 되는 사람들이 구경꾼 입니다.
또한 구경꾼의 재밌는 특징은 비방하고 공격하는 일에 기가막히게 연합합니다.
누가복음 23:12 KRV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헤롯과 빌라도는 정치적으로 긴장 관계였지만 예수님을 고소하는 일에는 기가막히게 협력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백성들이 데리고와 고소할때는 조금 조심 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 모두 예수님의 대적이라는 것과 어떠한 종교적인 능력을 보여주지 않자 마음을 놓습니다.
마음껏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업신여기고 희롱합니다.
우리는 헤롯과 빌라도를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비난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에는 신령하고 선한 믿음의 마음이 자리 합니다. 반면에, 어둡고 악하며 비방하고 희롱하는 마음과 성품도 누구나 자리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갈릴리 출신의 한 청년이 사람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종교지도자들의 고소가 이어진다면 그 어떤 사람도 그 청년을 메시야라 부르며 그를 위해 다수 앞에 권력 앞에 나아가 대신 싸울 사람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대중의 편에, 권력의 편에 서는 편이 쉬울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능욕과 핍박과 폭력을 당하시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누가복음 23:24 KRV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이 사형선고는 빌라도의 이름으로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십자가에 메단 장본인은 우리 모두 였습니다.
누가복음 23:25 (KRV)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대중의 뜻에 따라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빌라도와 헤롯은 특히, 빌라도는 아주 중요한 안건에 대해 신중하고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이지 않습니다.
니체는 이런 상태를 “낙타정신” 이라고 설명 합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 등장하는 정신의 3단계 중에 “낙타정신” 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낙타정신의 소유자들에게는 “나는 해야 한다” 만이 존재 합니다.
그 일과 그 결정의 의미나 파급효과에 대해 깊히 생각하는 하는 것을 극도로 회피 합니다.
삶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낙타정신은 인식의 테두리가 좁습니다.
좁은 세계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입니다.
낙타정신은 오늘도 그저 무거운 짐을 지고 일상이라는 사막을 행해 서둘러 갈 뿐입니다.
이와 반대 개념을 니체는 “사자정신” 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것은 멍에의 정신 입니다.
마태복음 11:28–30 (KRV)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각자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을 낙타와 같이 살아갑니다.
그 짐은 생계나 건강, 가족사에 끊기 힘든 불행, 또는 주변 사람들과 자꾸만 엇갈리며 서로 상처주는 관계의 문제 등등, 우리 스스로 해결하기에 너무 심각해지고 오래 방치된 문제들과 매일 매일 주어지는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라고 초대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 나아온 자들은 그 짐을 내려놓고 쉬게 해주신다고 약속 하십니다.
오늘 주의 전에 나와 세상 짐 내려놓고 편안히 쉼을 얻으시길 축원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단순히 짐을 단순히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십자가를 뒤로 하면서 세상에 나갈때는 다시 그 짐을 지고 가는 삶의 연속이라면 그것은 진정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 했던 평안하고 기쁘며 복된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제안 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멍에는 가축의 어께에 메는 나무로 만든 도구 입니다.
멍에를 메는 이유는 짐을 나르는 달구지를 끌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을 만나기전 우리의 인생은 혼자 결정하고 혼자 짐을 지며 이리 갔다 저리 가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제 너희의 짐을 내려놓고 멍에를 메고 짐은 수레에 올려 놓고 나와 함께 그 험난한 인생길 걸어가자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짐을 지는 것은 고통스럽고 또한 힘들어도 채찍에 맞으며 지고 가야 하는 것이지만 주님과 함께 한다면 그 짐은 쉽게 질 수 있고 심지어 즐겁게 또한 갈길을 명확하게 알고 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 멍에의 정신 입니다.
내 어깨에 짐이 너무 무거우면 눈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이 설교 하실때 베드로와 동업자 어부들은 주님이 계신 곳에 눈길 한번 안주고 그물을 손보고 있었습니다.
지난 밤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을 진 베도로에게는 천국의 복음도 눈길을 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저 구경꾼으로 그저 주변인이 될뻔 했던 것이 베드로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읏고 베드로에게 다가와 잠시 베를 육지에서 띄우게 하고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수고하고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고 천국의 아름다운 복음을 듣게 됩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과 삶의 무게를 홀로 지지 마십시오!!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짐을 내려놓고 멍에를 메고 주님의 인도함을 청하십시오!
그것이 구경꾼이 되지 않는 방법 입니다.
우리는 이제 대적도 구경꾼도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대중에 휩쓸리지 않는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분별 해야 합니다. 믿음의 편에 서야 합니다.
나의 생각을 주장하기 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기나긴 고독의 마침표를 찍고 주님 편에 서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아리마대 요셉 입니다.
누가복음 23:50 KRV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누가복음 23:52 KRV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시대를 거스르는 의롭고 선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도 생명을 구걸하거나 십자가의 길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는 백성들과 함께 했을때 보여주셨던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적과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 입니다.
대적들은 언제나 대중을 선동하여 믿는 자를 곤경에 빠뜨리기 원합니다.
구경꾼들은 기회를 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대적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교회 안에는 오직 주님 편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우파도 좌파도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불행하게도, 대중이나 시대의 조류에 휩쓸릴때는 모릅니다.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나면 그때, 나의 행동의 열매를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23:44–46 KRV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누가복음 23:47–48 KRV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우리 인생이 이제 천국에 가는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며 생각할때에
구경꾼도 아닌,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도 아닌,
배신의 죄책감과 절망을 딛고 일어선 베드로가 되겠다고 다짐하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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