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하지 못한 죄(롬 1: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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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하지 못한 죄(롬 1:19-25)
<서론>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교회와 성도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1:18)고 선언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 죄와 죄인을 허용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이유는‘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진단’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죄인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1:19-25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구체적 죄 “모든 경건치 않음”에 대하여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경건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경건한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본론>
1. 경건이란 무엇일까?
먼저, 경건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경건」이라는 단어보다는 「영성」「영력」라는 단어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표현은 「경건」입니다.
왜냐하면 영성(spiritus)이라는 용어는 5세기경 크리스쳔들 사이에서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을 따라 살자’는 취지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성도의 기본적 태도입니다.
코람 데오(Coram Deo, 神前意識)라고 하죠,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내 생활양식을 하나님께 맞추려는 영적 태도입니다.
「영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뭔가 색다른 경험을 추구하는 것’ 혹은, 이성과 상식을 뛰어 넘는 「신비한 체험과 능력」을 갖는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
바울은 전혀 그런 의도로 「경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는 “진리를 막는 사람들”(18)에게 임한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막는다’고 할 때, 「막는다」의 의미는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바울이 정의하는 「죄란 ‘단순히 나쁜 짓 좀 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반대하고 반항하고 의도적이고 고집스럽게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바울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싫어하시는가에 대하여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행동」을 ‘경건하지 않음’‘경건하지 못한 죄’라고 말합니다.
2. 경건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싫어하시는지는 알아서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따라서‘경건하지 않음’을 반대로 설명한다면, 경건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싫어하시는지는 알아서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행동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성도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9절, 20절에서 부연 설명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넓게 해석하면,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갓 태어난 아기가 본능적으로 엄마아빠를 찾는 것처럼, 아무런 문명을 접하지 못한 아마존 밀림속의 종족조차도,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의식은 인간의 골수에까지 박혀 있어서 그것을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우주삼라만상과 사람의 몸을 보면서, 도대체 이 신비한 창조와 질서는 조물주 하나님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미 예수를 믿은 성도에게 적용 해석한다면, 엄청나게 무서운 말씀이 됩니다.
왜냐하면, 「경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성도의 기본적 태도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비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진정한 경건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만한 신지식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바로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창세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가 자연계시나 일반계시가 아닌, 하나님의 특별계시인‘성경’을 통하여 주어졌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들 통한 구원에 대하여, 꼭 찍어서 알려주셨는데,
「하나님을 알 만한 사람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사람이 오히려 등을 돌리는 것」을 바울은 ‘경건하지 못한 죄; 불경건’ (ἀσέβεια 아세베이아)이라고 말합니다.
영어성경은 ‘불경건’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풀었습니다. God(하나님) + lessness(없음, 없다)이라고 번역합니다.
‘경건하지 못한 죄’는 기도를 잘하지 못하는 것이나, 성경 지식을 많이 알지 못하는 것이나, 찬양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경건’은 하나님을 아는 성도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혹은 하나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기도했는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경건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지 못하는 미숙함이 불경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데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아는 대로」 살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롭게 찬양하는 모습은 분명, 경건한 성도가 주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고백입니다. 그러나 쇼맨십이 약하거나 표현력이 부족하거나 음치박치의 노래는 영~ 어색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 불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경건하지 못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핑계하지 못할지라”고 선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르고 저지른 죄는 비교적 추궁하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나쁜 짓인 줄 알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고약한 죄로 판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을 향해, ‘경건 하라!’고, 기대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그대로, 살아내려고 몸부림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경건하지 못한 죄에 빠진 사람은 결국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경건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경건하지 못한 죄에 빠진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 합니다. 21절입니다.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높여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높이지 않게 되고, 감사해야할 사람이 감사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불경건은 결국, 그의 영적 안목을 가리게 되어, 생각이 허망하여 지고, 마음이 미련하께되어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하나님을 우습게 안다면? 성도가 하나님을 우습게 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함께 읽겠습니다.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치명적인 영적 병에 걸립니다. 그때부터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하며, 세상 제 잘난 맛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도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그 불경건의 어리석은 모습을 23절에서 25절은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우상을 섬긴다 -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바울은 우상숭배를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지는 금방 없어지는 우상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엿이 먹고 싶은 나머지, 어머니가 아끼시는 양은솥을 몰래 팔아먹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모르는 척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행동입니다.
불경건은 세상에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찮은 우상’과 바꿔치기 하는 하기 때문기 때문에 영적타락의 극치이고,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충동대로 산다 -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경건치 못한 이들을 정욕; 충동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셔서 욕되게; 창피 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충동대로 날뛰는 사람이 제 맘대로 뛰어 가도록 길을 비켜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타락한 마음 상태가 추구하는 대로 살도록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죄의 무서움은 방치입니다. 그리고 그 방치의 결과는 수치와 부끄러움입니다.
주님보다 세상을 경배한다 -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바꾸어; 버리고 거짓을 섬기기를 더 좋아하게 됩니다.
불경건은 유일하고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더 가치 있게 여기며 그것들에게 자기의 시간과 정력을 바칩니다.
경건하지 못한 죄가 진노의 대상인 것은, 진리가 아닌 충동대로 사는 것을 좋아해서 하나님과 우상을 ‘바꿔치기’하고,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라는 고백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안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 대상이 돈이 되었든, 자식이 되었든, 일이 되었든 나 자신이 되었든, 이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의외로 우상을 가까운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욕(충동)에 이끌려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곧 우상입니다.
우리의 생활과 신앙, 그리고 섬김과 봉사를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경건은 내 좋은 것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건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삶의 태도를 바로 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말씀대로, 기도한대로, 찬양하는 대로 살아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 경건한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