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물고기, 주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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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3-16
중동 지역에서 생겨나서 지금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세 개의 종교가 있습니다. 바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입니다.
유대교는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종교이고, 이슬람교는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종교로 중동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도 많은 사람이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이지요.
이 세 종교는 다 구약성경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자기가 믿는 종교의 성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게다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동일하게 믿습니다. 그런데 이 세 종교가 말하는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동일한 분이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세 종교가 갈라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인데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유대교는 예수님을 감히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성 모독한 자로 그들 스스로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종교적 이단아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성경에 나오는 여러 선지자 중에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고백하느냐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실까요? (화면-익투스 이미지)
여러분, 화면을 한 번 보실까요? 요즘은 잘 눈에 띄지 않지만, 한때 차량 뒤에 이런 물고기 그림이 부착된 차들이 있었습니다. 차량에 물고기 그림이라면 어디 낚시 동호회원들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차량입니다. 생소하기만 한 이 단어들은 그리스어로 '이에수스 크리스또스(예수 그리스도), 테우 휘오스(하느님의 아들), 소떼르(구원자)'의 이니셜로 그대로 직역하면 물고기라는 뜻의 ‘익투스’가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물고기 문양은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던 것이죠.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요약한 것이 사도신경이라면, 사도신경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 분량만 보더라도 사도신경 내용의 절반 이상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고백 아닙니까? 그 출발이 바로 오늘 본문인 베드로의 익투스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은 다시 보는 사도신경 두 번째 시간으로 ‘내 마음의 물고기,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잘 설명해 주는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샤랴에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 질문이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제자들이 여러 가지 대답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제자들 중에 수제자라고 불리는 베드로가 아주 멋진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이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고백도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처럼 크게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냐?”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로 나누어지는데요. 오늘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냐?”에 대해 먼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마16:13 합독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는 그리스도” 여기서 주는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두 단어로 된 짧은 말이지만 여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인데요.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예수’와 ‘그리스도’를 합쳐서 예수님을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 아닙니다. 영어로 하면 ‘Jesus Christ’ 아닙니까? 그런데 이 ‘Jesus’와 ‘Christ’ 사이에 동사 하나가 들어가면 됩니다. 바로 ‘is’.입니다. 그러면 하나의 문장이 되는데요. “Jesus is Christ”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이 천사에게 계시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천사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1:21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여기에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나오지 않습니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도 나옵니다. 구약에 나오는 ‘여호수아’나 ‘호세아’의 이름이 예수와 뜻이 같습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이런 뜻이죠. 이름의 뜻이 좋으니까 ‘예수’라는 이름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예수라고만 하면 구별이 안 되니까 이름 앞에 ‘나사렛’이라는 예수님이 자랐던 마을 이름을 붙였던 것이죠.
이처럼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이 많이 쓰던 흔한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이름 뒤에 ‘그리스도’가 붙으면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데요. ‘예수 그리스도’가 되면 이름의 뜻만 구원자가 아니라, 정말 구원자라는 신앙고백이 되는 것이죠.
구약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와 같은 뜻을 가진 히브리어가 나오는데요.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인데, 둘 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누군가를 어떤 자리에 임명할 때 했던 행위입니다.
구약시대에 이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었던 직분은 왕, 선지자, 제사장 이 세 직분이었습니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 아닙니까?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기다렸습니다. 특히 나라가 멸망하고 오랫동안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더욱더 커지기만 했는데요. 메시아가 와서 자신들을 다른 나라의 압제에서 구원하고, 다윗 시대와 같은 영화를 다시 누리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가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오신 구원자였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에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의 많은 왕들이 자신들을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파라오’는 태양의 아들이라고 했고, 로마의 황제인 ‘시저’도 ‘카이사르’라고 해서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무대인 가이사랴 빌립보도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진짜 신의 아들,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고백입니다. 왜 이것이 논란이 됩니까? 오직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당시 문화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죠.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다는 말은 신성모독이었고 헬라인들 즉 이방인들에게는 에수님이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왕들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는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속해 살고 있지만, 이 세상과 같지 않다는 것을 명백하게 선언하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뜨거운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경향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하니까 우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고 하고 나중에 소화할 수 있으면, 좀 더 성숙해지면 예수님을 주로 여기고 따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잠깐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3절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이 도시는 헤롯 빌립이 로마의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도시입니다. 맑은 물과 폭포가 흐르고 있었고요. 헐몬산에서 내려오는 아주 맑은 물로 이스라엘 상수원의 50%를 제공한다고 하니, 얼마나 풍부하고 아름다운 도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풍성한 도시를 만들고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가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헌정한 도시에서 예수님이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이사를 주로 고백하는 도시와 세상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신앙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라는 글자를 너무 쉽게 입에 담고 있는 모릅니다. “주여, 주여” 할 때 가끔은 우리의 마음이 너무 가볍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익투스 물고기 그림을 바닥에 그리며 서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낼 때 목숨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하늘 아래 황제 외에는 두 주인이 있을 수 없는데, 사도신경은 이 두려운 이름을 나이 서른셋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작은 마을의 청년에게 붙인 것이죠.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의 고백을 한 번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는 비장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늘 아래 예수님 외에 다른 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두려운 결단이 이 황제의 도시와 같은 이 시대에, 이 서울 땅에서 고백 되어 지십니까? 물론 우리 시대는 초대 교회처럼 신앙생활이 거칠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주로 믿는 신앙 때문에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계십니까?
제가 제주도에서 사역할 때, 저와 청소년부를 동역했던 부장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이분이 장로님이 되셨는데요. 제주도는 섬이기 때문에 토속문화가 강하고 미신이 참 많지 않습니까? 이분은 제주도 토박이로서 형제들은 다 미신을 믿는데 혼자 유일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셨어요.
어느 날, 교사 모임을 하는데 그동안 제사를 드리는 문제로 형제들과 갈등이 심했는데, 이번에 상속받을 유산을 포기하는 대신 본인은 제사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너무도 평안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조상도 모르는 파렴치한으로 여기던 형제들도 장남이 재산 상속을 포기하겠다고 하니까 아무런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무엇을 포기하셨습니까? 어떤 손해를 감수하셨습니까? “주여, 주여”라고 부를 때, 우리는 정말로 내 삶의 주인과 만왕의 왕을 ‘주’로 부르고 있습니까?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알라딘의 램프에서 지니를 불러내듯이 “주여”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여”는 명령할 때 부르는 이름도 아니고 부탁할 때 부르는 이름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걸 내려놓고 주의 명령에 복종할 자세를 갖추어야 부를 수 있는 이름임을 여러분들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믿다가 나중에 성숙해지면 예수님을 주로 여기겠다, 따라보겠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는 순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채경락 교수님이 쓴 <삶에서 은혜받는 사도신경>이라는 책을 보면 “주님”을 “주인님”으로 바꾸어 읽는 게 좋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라는 단어가 워낙 일반적으로 사용되니까 진짜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님으로 고백할 때, 비로소 나의 사도신경이 진실한 고백이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 천지 만물의 왕으로 인정할 때, 바로 여러분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이 황제의 도시와 같은 곳에서 다른 주인을 인정하지 않겠다! 예수님이 바로 왕이시며 주인이시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사도신경이 정직한 고백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교회 생활을 오랫동안 해오신 분들이 가질 수 있는 믿음, 즉 구원받은 믿음이 따로 있고 나중에 예수를 주인으로 따르는 고차원적인 믿음이 따로 있다는 오해를 확실하게 끊어줘야 하는 책임이 어쩌면 목사인 저에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주권, 순종, 위탁이라는 세 가지의 개념을 말씀드리고자 하는데요.
먼저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였다면 ‘내 삶의 주인이 누구신가?’라는 주권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있고요. 그럼 이제 ‘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순종에 대한 개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내 삶을 전적으로 그분에게 맡기는’ 위탁의 개념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 먼저 첫째로 주권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던 때는 내 마음대로 살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순간 삶의 주인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 혹시 이런 그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한때 한국대학생선교단체인 CCC에서 많이 보급했던 4영리 복음지에서 첫 번째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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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주인인 사람 VS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인 사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내 인생의 왕좌에는 내가 앉아 있으며 예수님은 내 인생의 밖에서 서성이십니다. 모든 일을 내가 주관하고 내가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 좌절과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순간, 나는 그 왕좌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 자리를 내어드리고 주인으로 모시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주관해 주십니다. 주인이시니까요.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됩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더라도 이제 혼란이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인이 책임을 지면 되니까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느 그림에 속하길 원하십니까?
그렇게 예수님이 내 삶에 주인이 되시는 것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새번역) 합독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바울은 원래 무서운 사람 아닙니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까지 죽이는 그런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자신은 죽고 오직 그 안에 그리스도만이 사시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하박국 2:20에 보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2:20 합독
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여러분, 가만히 이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소리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이끌어 가는 것들입니다. ‘네가 해야지’ ‘아무도 책임져 주질 않아’ ‘손해 보는 일 하지마’ ‘예수 믿고 교회도 다녀! 하지만, 네 삶의 의자는 양보하지마’ ‘네가 해야 돼!’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그 모든 소리를 잠잠히 하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삶의 주인이 바뀌면 새로운 주인의 소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에 대해 가장 잘 표현한 사건이 바로 출애굽기 3장에서의 ‘모세의 소명’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5
5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러분, 신발을 벗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 같습니까?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내가 주장하는 방향, 내가 갖고 있는 삶의 목표와 모든 일정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신발을 신고 있으면 갈 곳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오긴 왔지만, 빨리 또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신발을 벗으라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내려놓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 앞에 나올 때는 신발을 벗어야 돼”
이렇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신발을 벗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로는 순종으로서 삶의 목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셨다면 이제 새로운 주인이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가?’라는 질문은 지금 ‘주님께 순종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고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겉으로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고 인정하지만, 그분이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순종할 때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쁨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것을 마지못해 할 수도 있습니다. ‘안 하면 큰일 나겠다’라는 마음으로 하는 순종은 진정한 의미의 순종은 아닙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항상 나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을 내가 사랑함으로써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제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던 중에 인터넷 기사를 통해 진짜 순종의 삶을 사셨던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스물일곱 살의 꽃다운 나이에 테러단체인 IS에 일 년 반 동안 잡혀 있다가 순교를 당한 케일라 뮬러라는 자매입니다.
그녀는 스무 살 때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가지고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는 난민들을 찾아가서 의료봉사를 하던 귀한 자매였습니다. 그리고 2012년부터는 내전으로 인해 많은 난민이 발생한 시리아의 난민캠프에서 봉사했는데, 2013년 8월에 IS에게 잡혀 일 년 반 동안 무자비한 성폭행과 매를 맞으며 인질로 끌려다니다가 2015년 2월에 숨지게 됩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 삶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통해 무슨 일을 하기 원하실까?’를 생각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분께 복종하는 것을 삶의 가장 큰 의미로 여기고, 기쁨을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난민촌에서 봉사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 자매가 잡힌 지 일 년 정도가 지난 후에 부모님에게 몰래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언론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저는 지금 고난 중에 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제게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저로 인해서 염려하고 있을 부모님과 가족들로 인한 마음의 아픔뿐입니다. 누구도 저의 속박이 이렇게 오래갈 줄을 몰랐겠지요.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싸울 힘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어려움이 아무리 오랫동안 지속될지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을 믿어주세요. 이 일로 인한 부모님의 아픔이 제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에 대한 소망이 오늘도 제힘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인내해 주십시오.
부모님의 아픔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세요. 제가 강하고 담대하기를 부모님이 원하시는 줄 알기에 저도 그렇게 버티고 있겠습니다. 저로 인해 두려워 마시고 오직 기도에 힘써 주세요.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시 만날 그날을 기대하면서. 케일라 올림.
물론 케일라와 그녀의 부모님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시 만날 그때가 지상에서는 이루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편지 어디에서도 후회의 빛이 없습니다. 그 어렵다는 의사 면허까지 딴 자매가 난민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고통 중에 사망했다는 게 세상의 기준으로 실패한 인생이 될지 모르지만, 전혀 후회함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오직 주님께만 순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기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되더라고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나의 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따라야 할 믿음의 본은 위탁 즉, 신뢰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주님께 나의 삶을 위탁한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그분을 따르며,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께 맡긴다는 것은 책임져 주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이 되셨기 때문에 책임져 주시는 것이죠.
찬송가 38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여러분들 잘 아시잖아요?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전적인 의탁을 하면 의심할 게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우리는 상급은 이 땅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여러분, 내가 일하고, 내가 모으고, 내가 힘을 써보지만, 사람은 다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제 신뢰의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전에는 신뢰의 대상이 내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고 돈과 명예일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아닌 예수님이 신뢰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할 것을 믿으면 오늘도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분당 할렐루야교회의 김승욱 목사님이 쓰신 <나는 믿습니다>라는 책에 있는 글을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리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분이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계실 때 한 여 성도님을 심방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남편 되시는 분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사업을 크게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 굉장히 솔직하게 얘기를 하시더라는 거예요.
“목사님, 제가 올해로 환갑이 넘었습니다. 제 건강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는데 그 전에 세상을 좀 더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솔직한 말에 목사님이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건강이 무너지기 전에, 사업이 언제나 좋을 수 없기에 이렇게 잘 나갈 때 누리고 즐겨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죠.
김목사님이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깨달으셨다고 하는데요. ‘아, 이것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구나. 언젠가는 무너질 것,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이 불안해서 붙잡고 지금 누리려고 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구나’
지나가는 세상, 언젠가는 없어지고 시들어버릴 것을 알기에 붙잡고는 있지만 그러면서도 불안한 것입니다. 즐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삼고 믿는 것과는 정반대의 삶인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익투스’ 물고기 문양을 붙인 차량을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이심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처한 현실일 겁니다. 우리 스스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족하고 부끄럽다고 생각해서 물고기를 부착하는 게 부담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차량 범퍼에 그런 것 안 붙여도 됩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마음속에는 선명한 물고기가 그려지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이라는 범퍼에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명한 믿음의 고백이 새겨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고 우리의 영원하신 주님께 내 삶을 의탁하며 살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늘이 주시는 기쁨과 능력을 신뢰하며 확실한 믿음으로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이것이 우리 모두의 신앙 고백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내가 주인삼은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는데요. 여러분들의 자가용에 물고기 문양 없어도 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의 범퍼에는 익투스,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명한 믿음이 새겨져야 하지 않을까요? 언젠가는 무너질 것들,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들에 대해 불안해서 좀 더 세상을 즐기는 인생보다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내 삶을 의탁하게 될 때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마음을 담아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삶을 의탁합니다. 오직 주님께만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 내 삶의 의자에서 여전히 내려오질 못하는 우리 인생은 아닌지 주님 이 시간 말씀으로 돌아보게 하시고 내 마음의 익투스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함께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순종하고 의탁하는 인생이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