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1-18

일반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74 views
Notes
Transcript

마음의 빛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 / 이런 내용이 성경에 있어 하는 표정이고, 무슨 내용인지 딱 알겠다 하는 표정입니다.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한 이야기처럼 들리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1-5절 : 1절에 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태로 가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어지는 2절에서 이름을 소개합니다. 엘리멜렉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주한 까닭은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본문 1절을 시작하면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라고 했는데 언제적이나면 왕이 통치하기 전 시대이니 까마득히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흉년’과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지금도 어려운 처지에 빠지는데 그때라면 더 심했다는건 분명합니다. 한참후에 이와 비슷한 흉년의 시기에 한 여인도 이렇게 말합니다.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돌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7:12) 재난이야말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것이죠.
우리가 하는 말로 ‘고향’을 떠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도 하고 고향에서는 더 이상 먹고 살거리가 없기에 서울로 서울로 떠나게 됩니다. 잘 되어서 고향으로 금의환양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떠납니다. 아니면 잠시 떠나 어려운 상황만 모면하고 돌아올 작정으로 그리 멀지 않는 고향 지척에 머물기도 하죠. 유다와 모압은 지금의 이스라엘의 사해를 중심으로 양편에 있으니 그리 멀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마 더 발전한 이집트 보다는 그래도 가까운 곳을 택한 건 어쩌면 흉년을 잠시만 피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모압은 이방인의 땅입니다. 우리도 어디 시골즘에 터를 잡으려고 내려가면 동네에 텃새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압은 유다와 달리 종교도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갈 수밖에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론 그리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아내와 아들 둘을 책임질 가장의 어깨를 짓누른다면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흉년에 배겨낼 장사가 어디있겠습니까. 고향에 친인척이라도 이런 자연 재해는 꾸우서 먹는 음식이라도, 빌려서 살아가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니 이방인의 땅이라도 물이 넉넉하고 흉년이 없는 곳이라면 누구라도 잠시만 몸을 피하고 아내와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다면 그정도는 감내해야 한다고 엘리멜렉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그렇듯 살다보면 앉은 자리가 제 2의 고향이 되기도 합니다. 2절에 ‘모압 지방’ 그곳에 친인척도 없는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지만 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다’고 말입니다. 흉년을 피해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아들은 이방여인 즉 4절에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름이 오르바, 룻이죠. 그렇게 거기서 10년즘을 보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말론과 기룐 즉 첫째, 둘째 아들 모두 다 죽었고 ‘그 여인’ 그러니까 나오미와 며느리 오르바와 룻’만 남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흉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려고 했지만 이방인의 땅에서 이렇게 될 거라고는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에서 삶, 의지할 거라고는 남편과 자녀들 밖에 없는 나오미라는 여인의 삶에는 오히려 두 며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말에 살은 사람은 살아야지 하는 말처럼 그때 6절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긴 흉년에 유다 지역이 이제는 회복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먹고 살만한 형편이 되었다는 것이죠. 작은 인심이라도 입에 풀칠은 해야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월드비전) 절망 가운데 살 길이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이런 말처럼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나오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어쩌면 나오미에게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모압 땅은 정말로 떠나고 싶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발 붙이고 사는 이 땅은 우리에게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는 건 둘째치고 이제는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들, 옛 것을 헐고 새로 건물을 짓고 그래서 더 비싸게 팔려는 사람들이 흔한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끝도 모르고 30-40십억 하는 아파트값은 코로나와 정권이 교체되면서 뜻하지 않는 하향선을 그리더니 회복되지 못하고 이러다. 이러다 하는 불안과 공포심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전 우리나라도 미국으로 한참 이민을 갔었습니다. 말 그대로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죠. 이 정도 고생이면 먼 타국에 가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난 타향살이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싶어도 결코 쉽지가 않듯 한편으로는 너무 먹고 살기 힘든 현실은 ‘떠나 볼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나오미는 고향을 향해 돌아갑니다. 7절에 보니까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입니다. 나오미에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8절 돌연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함께 유다로 떠났는데 ‘길을 가다가’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남편과 아들 둘과 이방 땅에서 살았던 십년이라는 세월이 이제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에게 이방 땅인 유다는 의지할 것 없이 살아야 하는 더 큰 고난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것보다 더 이방인을 배척하는 고향을 생각했을 때 지금이라도 자녀가 없을 때 다시 출발할 기회를 주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며느리는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그러니까 이방인이지만 아들과 자기에게 늘 잘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고향을 떠나 다른 민족의 며느리를 맞았지만 이들간에는 ‘선대’한다는 말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며느리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많이 쓰는 말이 있는데 ‘인해’한다는 말입니다. 이말이 지금 ‘선대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마음의 빛’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고향을 떠나 입신하기 위해 모진 세월들을 보내면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기릅니다. 그럼에도 뜻하지 않는 사고나 병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말 그대로 살은 사람은 또 살기 위해, 자녀를 위해 몇 배나 고생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마치 나오미처럼 더 이상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자신조차 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불연듯 고향에서 들려오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라는 것처럼 이방 며느리는 자기 어머니를 돌보고, 어머니는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에 그들의 처지를 돌보고, 무엇인가 대단히 서로를 위해 챙기거나 보태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고난 가운데서도 서로에게 마음을 쓰며 ‘돌본다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에 ‘마음의 빛’이 깃든다는 것입니다.
유다를 떠나 이방 땅으로 살러 갔다는 의미는 특별히 하나님을 떠나 배고픈 삶에 시선을 맞춘다는 것이죠. 먹고 살기 힘든데 교회 다니는게 뭐 중요하다고 하거나, 이런 시국에 무슨 교회를 하는가 하는 말도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는 소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돌보는 가운데 ‘들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에게 선대해야 합니다. 마치 오늘 찾아오셔서 축하해주시고 힘내라고 용기도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두 며느리가 홀로 된 이방 땅에서 버리지 않고 선대한 것처럼 서로에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죠. 그후로도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몇 차례 말하고 아주 강하게도 말합니다. 14절에 보니까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고 하는 것은 마치 마트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면서 주저 앉아 울다가 엄마가 가니까 울면서 떼쓰면서 엄마를 꽉 붙잡고 있는 그런 형국이라는 것이죠. 그 여인이 ‘룻’이고 성경의 이름이 ‘룻기’니까 나오미로 시작한 이야기지만 결국은 주인공이 ‘룻’이라는 것이죠.
먼저 마음의 빛은 ‘선대하는 가운데 찾아온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빛은 오르바에게도 있었지만 룻에게 더 강력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룻은 자기의 백성과 자기가 믿는 신을 바꿉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6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자기가 믿는 바를 바꾼다는 것, 특히 태어나면서 부터 모압 사람으로 살아온 정체성을 버리고 자신의 신을 버리고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믿는 다는 룻의 고백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선대함, 이방 땅에서 남편을 잃은 혼자된 어머니가 아들들의 결혼과 그리고 아들을 잃고 남편들을 잃은 며느리에 대한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선대한 일은 이렇게 오르바와 룻에게 그리고 특히 룻은 자신의 민족과 신들에서 조차 벗어나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룻에게는 자신을 선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보였습니다. 또한 어머니 역시 자기 백성을 선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비록 룻이 직접 여호와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이런 삶 가운데 드러난 ‘선대하심’으로 마음의 빛이 작동한 것입니다. 아프면 병원을 찾아 의사의 말을 듣고 치료를 시작합니다. 자동차가 고장나면 카센터에 수리하는 사장님의 설명에 따라 엔진 오일도 갈고 차의 부품도 고칩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믿는 그 무엇을 같이 믿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의사의 말을 듣거나 카센타 사장님의 지식을 듣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대하심’을 누군가를 통해서 바라보는 과정에 우리의 마음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마치 뻔히 맨눈으로 태양을 보면 안된다고 알고 있다가도 평생을 살면서 몇 차례 태양과 눈이 마추쳐 그 강력함에 노출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아들의, 조카의 축하의 자리이지만 그렇게 강력한 빛에 노출되는 몇 안되는 기회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누군가에게 선대하며 돌보는 일에 자기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살아오셨고 그래도 함께 살아보자고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손을 내밀줄 아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의 마음에는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 나오미처럼 어딘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하나는 갖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죽는다는 말보다 ‘돌아가셨다’, ‘나 돌아간다’, ‘이제 간다’는 말처럼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듯한 말로 일생을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어딘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잊어 버린 영화의 제목이나 누구간의 이름이 까맣게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계속해서 우리 삶 주면에 맴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시면 안됩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돌아간 그곳, 나 간다면서 떠나는 그곳이 나오미에게 고향이듯 우리에게 본래의 고향 즉 본향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나라라는 것을 오늘 교회를 세우고 예배하기를 소망하는 이 작은 공간에서 마음의 빛으로 작용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