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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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겸손하신 하나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떄에 갖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용감하시고, 위엄있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사랑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겸손하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합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이 겸손하다고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저번주에 언급했듯이 ‘타페이노스’라는 이 겸손은 단순히 ‘스스로 낮춤’의 의미를 넘어 굴욕, 미천해지기까지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주 가난하시고 찢기시고 미움당하시고 모욕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미천한 상태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로 하나님이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오직 정의와 사랑과 겸손이라” 미6:8 하나님께서 ‘오직’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해가시면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보이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정의와 사랑과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오직 기뻐하십니다. 사실 이 셋은 하나입니다. 그 어느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사랑한다면 사랑과 겸손을 발견할 것이고, 겸손을 사랑한다면 사랑과 정의를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균형이며 단단한 기반이고 ‘오직 선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언가 좋다고 설득하기 위해서 먼저 나 스스로가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만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겸손’이 ‘오직 선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이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계시되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가장 으뜸으로 많이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다시 말해보자면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도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우주만물 가운데에서 ‘가장 낮은 곳’에 계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사랑의 본체’이신 것처럼 그는 ‘겸손의 본체’이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이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겸손’을 보이셨다고 하십니다. 미가 예언자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전에 있었던 예언자입니다. 이 말씀은 성육신 사건에 관한 일종의 낮아지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일뿐만 아니라, 창조섭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며, 시공간을 초월해서 이미 인간으로 계셨던 예수님에 대한 선포입니다. 그는 이미 겸손하셨으며, 영원히 겸손하실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진리를 일깨워줄 ‘겸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겸손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0,14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실제 역사적인 사건은 하나님의 겸손이 무엇인지, 그 겸손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것인지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있었는데 “세상이 그를 알지도 못하고 영접지도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에게 ‘겸손의 옷’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2천년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딱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낮아지거나 천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의 자궁안에 10개월간 계시며 아주 연약하고 부끄러운 인간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천사와 천상의 모든 세계의 시선으로봐서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주아주 미천하고 하찮은 존재로 완전하게 일종의 추락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천상의 존재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인간이니까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우리가 만약에 바퀴벌레를 살리기 위해서 바퀴벌레모습으로 태어나서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셨음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낮아지심, 즉 ‘겸손'은 사랑의 끝판이며, ‘용기'의 끝판입니다. 이 세상에 이와 같은 사랑과 용기는 없습니다.
그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짐승의 그릇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사람 말고는 누구도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완전한 ‘은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의 겸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겸손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의 겸손은 ‘완전한 은폐’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그 어떤 것도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에게도 은폐시키셨습니다. 그는 완전히 낮아지셨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처럼 은폐되었습니다. 즉, 그에게는 그 어떤 드러내고자함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애 이전의 기록이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는 겸손하고자 함이 아니라, 진실로 겸손했으며, 진실로 자신을 가리고 낮추며 또 실제적으로 그렇게 마음먹으셨으며 사셨습니다. 이것을 ‘완전한 은폐’라고 합니다. 이 은폐는 우리에게도 은폐되었지만 예수님 스스로에게도 은폐된 것입니다. 인간이신 본인에게조차도 그것을 ‘은폐’시키셨다면, 과연 어떤 인간이 예수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목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빛나는 겸손’이 아닙니다. ‘빛나는 겸손’이라는 말은 아주 모순적입니다. 겸손은 결코 빛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짓밟힘, 고난, 가난, 미천함 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겸손을 ‘빛난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존귀의 왕관이다’
인간의 겸손에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겸손은 ‘꾸미는 것’입니다. 즉, ‘겸손한 척’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하기 위해서 애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참 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존귀의 왕관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뿐이고 세상에서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자기부인이며 희생이며 치욕과 죽음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겸손을 꾸미고 애쓴다면, 그는 ‘겸손의 명예’를 사랑해서 입니다. 이것은 모순적이게도 아주 ‘교만’한 것입니다. 참 된 겸손은 오직 은폐의 방식뿐입니다. 완전히 은폐되어야만 합니다. 자기자신에게서와 타인에게서 은폐되어야만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와서 외면받았고 숨겨졌습니다. 그가 숨겨진 것은 겸손이 은폐의 방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고귀하며 아름다운 일인지 아십니까? 진실로 예수님께서 이 방식으로 태어나심으로써 그가 참 하나님이심을 보이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겸손을 사랑하시는지’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겸손이 은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나타나지 않는 지극히 낮아짐임을 알게되었습니다. 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거서럼 “겸손이 무엇인지 보이셨습니다”
창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겸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겸손은 태초의 창조때부터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순서에 따라서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여섯째날에 사람을 창조할 때에는 이전에 창조하던 것과 다른 단서가 하나 붙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 창조 능력의 말씀으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결단’ 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는 창조주로서, 하나님으로서 아주 자연스러운 발현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셨어야만 했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여기에 특별한 한 가지가 추가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기로 결단’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공유했습니다. 하나님의 위치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어줌입니다. 그리고 피조물과 자신의 담을 허문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영원한 안개와 지극히 높음과 능력과 신비속에 감추지 않으시고 ‘사람’이라는 모습으로 만물 가운데에 계시하셨습니다. 사람의 창조는 ‘조명과 계시’ 라는 의미도 갖기 때문에 ‘시공간 안으로의 개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결단’이 됩니다. 그는 다른 창조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그의 형상을 피조물 가운데에 낮추어서 계시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인간이 타락할 수도 있으며, 그의 형상과 영광을 욕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결단으로 창조’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주만물 가운데에서 ‘아마도 최초의 낮아지심’ 일 것입니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몰트만 p326
인간의 특별함은 하나님의 현존하심 (형제)
인간의 특별함은 모든 만물 짐승들과 형상이 다르다는 것이나 이런 저런 속성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특별함은 ‘하나님의 현존’ 하심에 있습니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몰트만 p331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된 사람’ 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아야하며 사랑받아야하며 구원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한 본질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근원적인 본성’으로 말하자면 ‘너와 나’ 사이에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과 아름다움 곧 그의 형상이고 현존 그 자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너와 나’라는 담이 허물어집니다. ‘너와 나’는 오직 ‘우리’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요한은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 말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일3:1
“자녀들아…” 요일3:7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요일3:15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일4:12
요한은 형제,자녀,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요한만 그렇겠습니까? 예수님과 모든 제자들과 성도들이 이런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을 특별히 지목한 이유는 요한은 “형제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요한은 ‘형제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틀린 것입니까? 예수님은 실제로 원수로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한 것이며, 요한은 그 원수의 의미를 해석한 것입니다. 요한에게 그 원수는 곧 ‘나의 형제’ 였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 지구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 형제입니다.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본성을 품부받았습니다. 우린 모두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현존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 이며 남남이 아니라 하나로부터 나온 ‘형제’입니다. 그리고 이 형제들은 이제 내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해서 ‘지옥의 갈라짐’이 없이 ‘참 된 행복 안에서 형제가 된 것’ 같이 ‘영원한 형제 공동체로 초청’ 합니다. 만약 사랑하는 저 형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일 밥먹고 교제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이산가족’입니다. 남과 북처럼 가까우면서도 정말로 닿지 못할 큰 담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안에서 형제로 있다면 우리는 비록 시공간을 넘어서 육신이 죽었을지라도 진실로 우리는 항상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한 형제인 것입니다. 우리를 떨어뜨린다면 그것은 형제의 파괴이며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지옥’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요일5:16) 는 말씀에 순종하여 형제가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라
여러분, 우리는 모두 동일한 본성을 품부받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계시와 현존하심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여러분이 죄악가운데에 여전히 머물러도 괜찮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결국 각자의 기질이 달라서 치우친 바가 있고 배우지 못해서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용서를 받지 않는 상태에 계속 있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영을 해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되었지만 우리 스스로가 죄악에 빠질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버리고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롬1:23) 이렇게 되면 우리가 맺게되는 열매가 있습니다. 곧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중상, 능욕, 하나님 미워함, 교만, 자랑, 부모거역, 우매, 무자비함” 입니다. (롬1:28-32)
여러분, 이렇게 자신의 영을 죽이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이런 더럽고 추악한 것에 팔아 넘겨버린 사람의 끝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본래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셨으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본인 스스로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없이질 세상의 우상과 맞바꿔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본래 받은 것은 ‘하나님의 형상’ 이었습니다. 이는 곧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예비되고 주어진 것 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셨습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롬8:29-30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바 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도리이며, 삶의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품부된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그의 삶과 마음에서 확증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8:29) 이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방향입니다. 이것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존재하셨던 우리의 형상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본받읍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부르심에는 아무런 이유와 의미가 없게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를 닮고 그의 제자가 되고 그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부름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길이 높고 지고하여서 갈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비겁한 변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에 이미 잠재되어있고 그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을 닮을 수 있고, 따를 수 있으며, 합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교만이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는 정반대의 것, 곧 겸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닮음, 제자도는 교만인가 겸손인가
여러분들은 물을지 모르겠네요. 어떻게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과 겸손이 공존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겸손한 자라면 예수님을 닮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만이 겸손한 자이며, 예수님을 닮겠다는 소망을 품은 사람이야말로 교만한 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말씀드립니다. 오직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닮고 따릅니다. 반대로 교만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 그 자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된 우리는 그보다도 높거나 잘날 수 없습니다. 그보다 더욱 미천해지고 낮은 자리에서 스승을 따라야만 합니다. (요13:12-17) 오직 교만한자만이 스승 위에 있으려고 합니다. 교만한 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그 길을 내가 갈 수 있는지, 내가 제자가 될 수 있는지 계산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따라갈 뿐입니다. 스승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행동에 옮길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혜와 실력을 의존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존해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겸손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을 모두 버렸고, 오직 예수님께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며 ‘하라’고 말씀하신 명령 앞에서 내 모든 것들을 부인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복이 있다’라는 말씀은 딱 두번 나옵니다. 하나는 금방 읽은 요한복음13장17절이며 또 하나는 요한복음20장29절에 ‘보지 않고 믿는자는 복되다’라는 말씀입니다. 복된 사람은 결국 하나입니다. 그는 믿기 때문에 겸손히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 무릎꿇고 순종하는 것이며, 그가 겸손히 순종하는 것은 그의 믿음을 확증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겸손히 믿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닮으십시오. 그의 겸손함을 사랑하며 낮아짐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참 된 겸손은 : 자기주제를 아는 것
겸손은 자기 주제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사실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위선도 나의 선과 의에 대한 자각도 없습니다. 실제로 그에게는 자기 죄악이 인식되었고, 단지 그 사실만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혹은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의 아주 벌레같은-사악한 형편을 알아서 그 앞에 무릎꿇고 싹싹비는 것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당장에 죽고 사는 일이 달려있고 진실로 절실한 상태에 있지만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아주 고상하고 좋은 용어로 ‘겸손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는 겸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주제를 파악했을 뿐입니다. 그는 마땅히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 인간인지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에게는 낮아지려는 마음이나, 겸손해지려는 마음은 없으며 다만 그는 그 위치가 알맞으며 있어야해서 있을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