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막으리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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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가 막으리요 2
본문: 사도행전 11:1-6
찬송: 456장 거친 세상에 실패하거든
제목: 누가 막으리요 2
본문: 사도행전 11:1-6
찬송: 456장 거친 세상에 실패하거든
가이사랴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풂으로써, 교회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 최후의 명령을 비로소 이행하게 되었다. 초대교회가 그동안 깨닫지 못하였던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으니 베드로의 사역을 정말 큰 성과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지주에 말씀을 나눴던 것처럼 베드로의 사역 보고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모두에게 환영 받는 일이 아니었다. 2절의 ‘할례자’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옳은 일을 하고도 칭찬과 격려가 아닌 비난과 질타가 쏟아 질 때 사람들은 실망할 수 밖에 없고, 더러는 다시는 좋은 일이라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기도 한다. 또는 자신을 비난한 이들과 격돌하여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이와같은 비난을 받았을 때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위축되거나 반대하는 이들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 이후 17절까지 담담하게 고넬료의 집에 복음이 전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역시 예수님의 제일 가는 제자 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7 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흔히 그 설교를 산상수훈이라고 한다. 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삶 전체를 하나의 가르침으로 보여주셨는데 산상수훈 만큼은 이렇게 이름을 부여한 이유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최초의 체계적인 설교이기 때문이다. 보통 기적을 보여주시거나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통해 하나의 가르침을 주셨다면 산상수훈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이 순수하게 설교만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5 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는 설교가 팔복 설교이다. 8가지 복에 대해서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다. 우리 민족도 복을 참 좋아하고 이웃나라 중국도 복을 참 좋아한다. 복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복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신 것을 보면 복이 얼마나 중요하고 좋은 것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복에 관한 설교를 첫번째 설교 주제로 삼으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복에 대해서 잘 못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처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복이라는 것을 현세에서 얻게 되는 물질적 충만함이나 사회지위적인 출세로만 생각했다. 이러한 것들이 복이 아니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만이 복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이외에도 하나님이 주신 정말 많은 복이 있다.
오늘은 팔복의 내용을 나누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다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보아야 할 복은 마지막 열덟번째 복이다. 마지막 복의 내용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복된 사람을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마 5:10 의 ‘박해받은’이란 말만 놓고 보면 과거에 박해를 받은 사람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이 말은 헬라어 성경을 통해 보면 과거 어느 한 시점에 박해를 받았던 것만을 가리키지 않고,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까지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더 쉽게 풀이하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날들, 언제 어디서나 박해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복이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또 ‘박해하다’라는 말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집요하게 추적하다,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박해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번 시작되면 그 끝을 우리가 가늠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삶을 살아갈 때 박해가 시작되면 그것은 우리를 쉽게 떠나지 아니하고, 또 그러한 박해가 우리 삶 주변을 맴돌며 괴롭힐 때 고통과 괴롬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복된 사람, 복있는 사람이라고 예수께서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와같은 자들이 천국을 유업으로 얻게 된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승천 이후 재림이 일어날 때까지 어떤 일이 일어날 지를 미리 예견하시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마지막 여덟번째 복을 가르치시면서 추가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다. 마태복음 5:11–12 을 보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주께서는 마지막 복과 관련해서만은 하늘의 상을 약속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주의 일을 하다가 무엇보다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한다. 하늘의 상급이 우리를 위해 차곡차곡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둡고 춥고 추한 곳이다. 이런 곳에는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이 늘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어두운 곳에 자신의 추함을 감추고, 추운 곳에 썩은 것들을 버려도 냄새가 나지 않고, 설사 추하고 악한 모습이 드러나도 주변의 추한 것들을 보여주며 ‘원래 이렇다’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기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하셨다. 무엇보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낸다. 감춰진 것들을 들어나게 만들고 얼어 붙은 것들을 녹이고, 추한 것과 정한 것을 구분시킬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러하기 때문에 어둠의 권세는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선동하여 빛이 세상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박해한다. 이것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얼마나 부담이 되고 또 두려운가? 그러나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시거나 사지로 밀어 넣는 그러한 냉혈안이 아니시다. 우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목숨까지도 내어 주시는 분이시다. 마태복음 28:20 에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이나, 주의 일을 하는 것이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주저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기 위한 삶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격려받는 삶을 더 기대하고 살아가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베드로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쓰라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께서 가르쳐주신 팔복이 그의 마음 가운데 남아 있었다. 그러니 할례자들이 자신을 비난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지금 예루살렘 교회에 와서 당하는 일이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와같은 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는 베드로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전서는 교회가 가장 박해 받는 시절에 쓴 서신서이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의 말을 통해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자신의 죄로 인해 세상에서 욕을 듣고 비난받는 것은 당여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더 잘 믿으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박해와 고난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 세상은 어둡고 춥고 추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더 잘 믿으려다 당하는 고난에 굴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말한 ‘아름답다’라는 말은 ‘보상의 선물’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베드로가 직접 기록한 베드로전서를 통해 본문의 베드로는 하나님의 의를 행하고도 예루살렘의 할례파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인간적은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 수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의를 행하면 행할수록 비난을 받고 큰 어려움에 처할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다하여서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면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자신의 삶에 주어질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께서 산상수훈 팔복의 설교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장소는 과거 사도들의 시대처럼 또는 종교의 자유를 억압받는 그런 곳처럼 박해가 없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 박해와 비난이 떠난 시대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말 하나님께서 큰 어려움 없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셨을 수도 있고, 예수를 믿기 위해서 이제까지 어려움을 겪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는지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 사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려고할 때 겁박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박해를 가한다. 고난받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멸시와 천대받음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이미 예수께서 그 길을 먼저 걸어 가셨고 부활로 승리하셨다. 또한 믿음의 선배들이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삶을 오히려 기뻐하며 살아감으로 하늘의 상급을 받았다.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이 하늘의 큰 상급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를 바란다. 누구도 의를 위하여 사는 삶을 막을 수 없다. 의를 위하여 살아감으로 하늘의 큰 상급을 능히 받는 베드로와 같은 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