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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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사랑합니다! 설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예배에 나와서 예배하는 여러분을 진심을 환영하고 축복한다. 타지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여러분도 환영한다. 여러분은 존경하거나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전도사님이라고 말해주면 너무 고맙겠지만, 다들 각자 닮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교회에서 찬양인도하는 형을 매우 동경했었다. 기타도 잘치고, 노래도 잘하고, 찬양을 인도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나와 키도 비슷하고 피지컬도 비슷해서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었다. 그 형이 기타연주를 잘해서 나도 기타를 시작하게 되었고, 아이패드를 샀다고 해서 나도 따라서 중고로 사고, 그 형이 정장을 입은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따라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만큼 그 형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동경하거나 좋아하거나 사랑하면 따라하고 싶고 닮아가게 된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님의 자녀된 우리와 함께 닮아가길 원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거룩’이다. 오늘 말씀 이사야서를 보게 되면, 하나님이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신다. 그때 배경이 어땠냐면 웃시야 왕이 죽은 년도에 부르신 것이다. 웃시야 왕은 유다에서 솔로몬 시대 이스라엘의 황금기 이후로 웃시야 같은 왕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웃시야는 아주 뛰어난 통치자이었고, 군사적으로 전략적인 리더쉽이 아주 강하고 능력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지휘 아래에서 유다는 점점 강해졌다. 그렇기에 유다에서 웃시야는 진정한 왕이었다. 이러한 리더쉽이 겨우 나타났는데 죽었다는 소식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충격적이었겠는가?
유다 백성들에게 이것은 절망의 소식이었다. 웃시야가 죽으면서 동시에 앗수르 제국이 점점 유다를 조여오고 있었다. 그동안 누렸던 평화는 사라지고 긴장감이 넘치는 시대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순간에 세상의 어떤 왕도 유다를 도울 수가 없다. 그렇게 유다는 위기상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안정적인 현실에서 걱정이 없을 때보다 위기 상황에서 더 쉽게 자신을 어떠한 분이신지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6장 1절에서 하나님을 봤다고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당연히 죽는 것이 기정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두움과 죄가 아예 없으신 빛이시며,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을 보면 그 즉시 죽게 된다. 마치 세균이 소독약을 만나면 죽는 것처럼 말이다. 출애굽기에서 33장 20절에는 하나님을 보고 살자가 없다고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 야곱, 모세, 기드온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는데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보도록 허락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봤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사야는 무엇을 보았는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다고 한다. 이사야가 환상을 보고 있었을 때 감정적으로 어땠는지 아는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본 것이다. 인간이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있을 때 아주 생생한 극한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심해 공포증을 떠올릴 때 이런 감정을 느낀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보게되면 당연히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곳인데, 보고 있는 내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다고 한다. 고대 사람들은 긴 치마를 입어서 발목을 가리는 것이 특징인데 옷자락이면 당연히 치마 끝을 가리킨다. 그러한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고 한다. 여기서 성전은 하나님의 궁전을 뜻하고 웃시야가 진정한 왕이 아닌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시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면서 이사야가 보았던 주님은 우리가 감히 볼 수도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높으신지를 강조하며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단순히 옷자락이 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득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 주님의 옷자락 높이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
그러면서 2절에 스랍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스랍들을 히브리어로 말하면 세라핌이라고 한다. 걸그룹 생각나지 않는가? 맞다. 여기서 따온 것이다. 보통은 날개 달린 천사를 뜻한다. 민수기에서 불뱀을 표현했을 때 스랍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불뱀에게 물렸을 때,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기에 스랍들은 “불타는 듯한” 존재들임을 나타낸다.
이렇게 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잘 나타낸다.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불로 나타나시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녁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나시고,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명령하지 않은 불을 드려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로 삼키시고, 엘리야가 바알 숭배자와 겨룰 때 하나님이 불로 임하셨다. 그리하여 스랍들이 그런 거룩함을 선포하는 존재들의 겉모습은 불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주 어울리는 일인 것이다.
그러면서 스랍들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하고 있다. 온통 날개와 목소리로 가득하며 완벽하게 찬양하고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날개 한 쌍은 그들의 얼굴을 가리는데 사용한다. 아무리 가장 완벽한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버젓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하나님을 보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날개 한쌍은 발을 덮는다. 이것은 몸 전체를 감싸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이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쳐다보아선 안 되고, 주님의 눈앞에서 드러나서도 안 된다.
스랍들은 하나님의 임재속에 있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찬양으로 가득하여 나머지 세 번째 쌍의 날개로 날면서 황홀하게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3절에 그러면서 서로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서로 기뻐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무엇이라고 선포하는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선포한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구별된다는 것이다. 하나님만 가지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거룩함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3번 거룩하다고 했으니 어떤 표현인가? 반복하면 강조이기에 가장 강한 형태의 최상급이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신성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더나아가 ‘거룩’이란 하나님과 같이 강하신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사야는 하나님을 무엇이라 말하는가? ‘만군의 여호와’로 표현한다.
그리하여 실제로 하나님만이 거룩하다고 불릴 자격이 있으시다. 6장 3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임재는 성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에 죄의 심판도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죄는 서로 나란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사도 요한에 따르면 이사야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찬란한 영광이 가득하신 주님이 자녀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첫 번째로 ‘거룩’하라는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누가 거룩하시기 때문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자녀된 우리도 거룩해야한다. 여러분은 수돗물을 마실 때 배관 호스가 더러우면 그 물을 기쁘게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은 주님을 따르는 여러분을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호스가 깨끗해야 깨끗한 물을 필요한 곳에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삶은 무엇인가? 우리 주님은 완벽히 깨끗하신 분이기에 우리 또한 깨끗함을 요구하신다. 정직함을 가지고 공정한 거래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둑질하는 것, 거짓말이나 거짓 증언하는 것, 남을 속여서 거래하는 것, 누군가 앞에서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나 뒤에서 욕을 하고, 또 말을 친절하게 하지만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거짓된 모습은 세상에서는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일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정직하지 않은 모습, 앞뒤가 다른 모습은 결코 거룩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거룩함이란 우리 삶에, 우리 마음에 결함이 없어야한다. 거짓된 삶, 앞뒤가 다른 삶을 버리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야할 거룩한 삶이라는 것이다. 저 또한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 남을 미워하는 위선적인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의 이러한 거짓된 모습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며 돌이키려고 애쓰며 살아간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거짓된 모습, 잘못된 모습이 보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은혜임을 기억하시라. 곧장 하나님께 나아가 정직한 삶을 구하며 돌이키기 소망한다.
두 번째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에서는 부모를 ‘경외’하라는 것이다. 경외라는 단어는 보통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만 쓰이는 단어이다. 그렇기에 부모를 경외하라는 것은 레위기 19장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거룩한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십계명 중에 몇 계명인가? 5계명이다.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하나님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가장 직접적인 권위인 부모에 대한 경외는 하나님의 경외에 있어서 아주 기본에 기본이라는 것이다. 부모를 제대로 경외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를 경외할 수 없는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히12: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렇기에 부모 경외는 거룩한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오늘 레위기 본문 3절에서 ‘헛된 것’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우상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작은 신”이라는 것에서 나타났다. 또 다른 하나는 “약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상은 우리 삶에 있어서 아무 쓸모없는 헛된 것이다. 점집이나 타로집가서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도 얼마나 헛된 일인가? 하나님은 오늘이라는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을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가 두렵고 걱정되고 궁금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닌 점집, 타로집에 가는 것 아닌가? 이러한 일들은 헛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또 부적을 가지고 행운을 기원하는 것, 요즘에 장난처럼 이모티콘에 자주 등장하지만 이것 또한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번 설 명절이지 않은가? 우리는 죽은 사람, 돼지머리에 절해도 되는가? 절대 안되는 것이다. 조상 신에게 복을 비는 행위이기에 이것 또한 한국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복은 누구에게만 구해야하는가? 하나님께만 구해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타로나 점집에 가는 것, 부적을 가지고 의지하는 것, 죽은 사람에게 절하는 행위는 우상 숭배며 하나님이 가장 혐오스러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오늘 성경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은 첫 번째 무엇인가? 정직하게 사는 삶이다. 두 번째로 무엇인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무엇인가? 우상 숭배와 같은 헛된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거룩하시고, 흠도 없으시며 깨끗하시고 완벽한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소망한다. 우리 주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을 닮아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나의 마음에 계속해서 빛을 비추시기 때문에 더럽고 거짓된 추악한 마음을 보게 된다. 나는 내 안에 그 마음이 보이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것들을 가지고 주님께 고쳐달라고 나아갈 이유를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거룩한 삶을 쫒아가는 사람들의 고백이 무엇인가? 내가 신앙생활 이만큼 했는데, 교회에서 임원이고 찬양팀한다고 자랑하고 다니는가? 전혀 아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내 안에 자랑할 것이 없는 부끄러움이 드러나서 하나님 앞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자랑할 것은 오직 이렇게나 완전하지 못한 나를 살려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찬양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설교제목이 무엇인가? ‘사랑하면 닮는다’이다. 친구가 서로 가까워지고 친하게 되면 말투나 행동들이 비슷해진다. 심지어 제스처나 표정도 닮아가서 너무 붙어있으면 형제, 자매 같아보인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 말투도 예수님처럼 되려고 당장에는 부족하더라도 입술에 사랑과 축복의 언어가 가득하려고 하고, 아직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섬김과 봉사를 감사하며 기쁘게 감당하고, 여전히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애쓰는 모습으로 점점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살아가려는 모습을 너무 사랑스럽고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누구를 닮아가게 되는가? 점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 부른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하는 한 가지가 있다. 예배를 마친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꼭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오늘이 되길 원한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서 반드시 고백하겠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거룩한 삶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마음에 안식을 주실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 평안, 기쁨을 날마다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