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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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뻔하지만 행복한 결말을 기대합니다.
고난과 절망,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의 반전이 일어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고 집으로 돌아 오는 장면
성경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예배자입니다.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죄입니다. 악이 가득하고 죽음과 멸망으로 끝납니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회심입니다. 회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들은 복음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나요? 완성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번 주 금요일부터 함께 읽게 될 천로역정이라는 책은 천국으로 가는 여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이 판타지 소설처럼 쓰여졌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진 책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성경보다 양적으로 짧지만 재미 있고 의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론
본론
1.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말하는 새롭다는 무슨 뜻인가요(계21:1)?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창세기의 첫장과 두 번째 장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은 하나님께서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시고 새인간을 창조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새롭게 된다는 것은 모두 구원을 받는 질적인 갱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근거 1. 5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근거 2. 새롭다. 의 두 가지 단어의 의미로 네오스와 카이노스가 있다. 네오스는 시간이나 기원의 새로움을 뜻하는 단어로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를 의미합니다. 카이노스는 특징이나 본질에 있어 질적으로 새로움을 뜻하는 단어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갱신을 의미합니다.
근거 3. 피조물의 해방. 로마서 8:19–22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현재 피조물들이 인간의 죄로 인해 지금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재림으로 현재의 부패에서 해방되어 새롭게 구속받을 것을 말합니다. 새하늘과 새땅에는 자연과 온 우주가 새로워집니다.
근거 4.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다 없애버린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사탄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이 망가진 것이 되어 버려 하나님의 전능성이 훼손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승리의 완성을 보여주십니다.
근거 5. 부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몸을 만질 수 있고 식사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육체를 가지신 것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죽는 것은 부활로 가는 길이 되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지만 지금처럼 불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새로워지고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이야기는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의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2.그렇다면 누가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 수 있을까요? 구원 받은 성도, 곧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완성된 교회의 모습은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다음의 9절부터 22장까지 새 예루살렘을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인데, 새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신부, 즉 어린 양의 아내라고 밝힙니다.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을 요한계시록 21:6–7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에서 말합니다.
또한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3.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어떤 모습일까요?
첫째, 새 예루살렘은 에덴 동산이 회복된 모습이요 완성된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만물은 살기 힘듭니다. 태풍, 가뭄과 홍수, 해일, 지진 등으로 위협을 받고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깨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좌우편에는 생명 나무가 무성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강을 의미하기보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생명을 얻음을 말합니다. 더불어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결국 성령 하나님에 의해 자연 만물이 회복되고, 교회의 삶이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로 영생의 충만한 삶이 될 것으로 묘사해 줍니다.
둘째, 새 예루살렘은 이상적인 사회로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도시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인간의 삶의 모든 비참함을 경험합니다. 질병과 불평등과 거짓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들로 가득하고 전쟁으로 고통받는 세상입니다.
성곽이 144규빗, 열두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 열두 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가 새 예루살렘의 구성원임을 말해줍니다.
성의 크기는 12,000스다디온 가로*세로*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수의 성도가 살기에 완전한 크기의 도시에서 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도시의 건축 재료는 각종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가치와 영광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처럼 변화될 모습을 예고합니다.
이런 새 예루살렘에 없는 것도 있습니다.
모든 눈물, 사망, 애통, 곡, 아픈 것, 밤, 속된 것, 가증한 일, 거짓말, 저주 등 한 마디로 죄로 인하여 저주와 비참함이 없습니다.
셋째,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조화와 평화가 있는 곳입니다.
구약 때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러 갈 수 없었고 신약 때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고 불완전하고 사건 사고가 많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 안에 성전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새 예루살렘 성 전체가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다스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입니다.
여러분은 해피엔딩에 속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새드엔딩에 속하고 싶으십니까?
결론
결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지만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중간계에 살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후 타락한 이 세상에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시작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갖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다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 새하늘과 새땅에 살든지 아니면 영원한 형벌이 있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자기 중심성인 죄를 버리시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1.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십시오.
민수기는 광야에서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보여 주었다면 민수기는 약속의 땅, 곧 구원의 땅으로 가는 중간 여정,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민수기에서 애굽을 나온 1세대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다섯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6–10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악을 즐겨 한 것, 우상 숭배, 음행, 주를 시험, 원망 이 다섯 가지가 그 원인입니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는 회개의 반응을 보이셔야 합니다.
죄의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의 반응을 보이셔야 합니다.
2. 인내를 가지십시오.
소망을 가지고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그냥 참고 견딜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려면 이스라엘처럼 놋뱀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놋뱀이 무슨 효력이 있어서 사람을 살릴까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근거는 예수님의 이루어 놓으신 일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동일합니다. 우리는 엉터리로 살지만 거기에서 돌이켜 다시 예수님을 붙들므로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신 예수님께 붙어 가야 합니다.
실패할 때마다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인내로서 모든 경주를 달리는 것입니다.
3.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합시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마음 먹은 것 처럼 잘 벗어지던가요?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죄된 본성, 자기 중심성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뱀의 머리를 밟아 부서뜨리는 것처럼 죄의 권세를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고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넘어집니다.
그때마다 모세와 비슷하지만 더 위대한 영원한 중보자 예수님이 계심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믿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를 바라보자는 표현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내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놋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중보하십니다.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구원을 시작하시고 이루어가시고 완성하시는 예수님께 시선 고정하십시오.
내가 믿음 좋게 헌신한 일이나 믿음 없어 엉터리로 산 일을 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 구원의 완성입니다.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이 비록 타락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작하셨고 이루시며 반드시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에게 해피엔딩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