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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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오늘 본문 바로 위에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두제자는 길을 가면서 지난 몇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침통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Luke 24:14 KRV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주님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나 질문 하시니, 두 제자 중 글로바라 하는 사람이 따져묻습니다.
Luke 24:18 KRV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당신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 이라면, 지난 몇일 동안 예루살렘을 들석이게 했던 그 일을 몰라 묻습니까?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모르는 척 물어보십니다. “무슨 일이뇨?”
지난 몇 일동안 예루살렘에서…또한 지금까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본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지난 몇일동안 예루살렘에서 글로바가 본 것은?
1.대제사장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모습
2.그 시체가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돌 무덤에 장사되는 모습
지금까지 그들이 본 주님의 모습
1.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2. “이스라엘의 구속자” 라고 합니다.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말을 행하는 선지자 이고,
그들이 믿기에는 이스라엘의 구속자 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슬픈 기색으로 그 이야기를 나누며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Luke 24:17 KRV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주석에서는 …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숨을 쉬지 않으셨으며, 상처에서 더 이상 피도 나오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차갑게 식고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예수님의 시체를 본 자들입니다.
그들이 본 주님을 한 마디로 말하면 죽으신 모습 입니다.
지금 까지는 선지자로 메시아로 보았을지 몰라도 이제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그들의 슬픔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 여러 사람의 부활의 증언을 접했습니다.
Luke 24:22–23 KRV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Luke 24:34 KRV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하지만 그들은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Luke 24:25 KRV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주목할만한 단어 두 개가 있습니다.
“미련하고…” 아노에파스, 생각이 없는 또는 무심한
단순히 지능이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우리 아이는 공부를 안해서 그렇지 머리는 똑똑해” 라는 말을 우리는 듣고 자랐고 그 말을 하며 삽니다.
그런데, 신앙이든 공부든 타고난 두뇌가 좋으면 편하긴 하겠지만 공부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아이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직자 분의 이야기 입니다.
동생은 아이큐가 126, 형은 아이큐가 99 였던 형제가 있었습니다. 실화 입니다.
동생은 거의 전교 꼴지를 달리고 뒤에 10몇 명만 있을 정도였지만, 그 아이큐 99였던 형은 어느날 부터인가 전교 1,2등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동생은 목회자가 되고 형은 어엿한 회사의 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동생이 형에게 묻습니다. 형, 무슨 계기로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어?
“너 기억나? 아버지 병원에서 태원 하시자 마자 아픈 몸 이끌고 회사 출근 하시던거?” “응”
좀 더 쉬었다가 출근하라는 엄마 말에 “자식들 공부시키고 먹여 살릴라면 죽어도 출근해야되” 라고 하시는 소리를 듣고 그때, 내가 아버지를 도와 드릴 수 있는게 뭘까 생각하니, 공부 밖에 없었어. 그래서 죽으라고 공부했지.
자식들이 몰라서 그렇지 알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각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사 힘든 것들을 무조건 자식들에게 숨기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관심이 있고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무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심 하다는 것은
상대가 무슨 마음으로 저렇게 헌신 하는지, 왜 저렇게 까지 그 어려움을 감내 하는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고,
그저 일어난 결과나 현상만을 보는 것을 무심하다 라는 단어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진심이나, 선한 동기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봅니다.
나는 얼마나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 처럼 사랑하였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더디 믿는 자들이여”
브라디스. 더딘, 느린, 또는 무딘
말씀을 믿고 바로 즉각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만 있어봐라’ ‘맞나 보자’ 하는 것입니다.
신중한 것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은 공생애를 통해 여러 차례 말씀 하셨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더디 믿는 것을 책망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무딘 상태를 의미 합니다.
사안의 긴급성을 알면, 급할땐 즉각적으로 반응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이 죽으셨다 라면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을 알고 배운 사람이라면 이제 주님의 부활을 볼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중함과 무딘 것은 다릅니다.
신중하다가도 정확한 성경적 근거가 나타나면 비록 내 생각에는 맞지 않아도 그 근거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 해야 합니다.
이 제자들에게 요구 되었던 것은
인간적 슬픔과 애도가 아닌, 부활을 대비하고 반응하는 영적 샤프함 이었습니다.
그들의 무딘 영성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나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나타납니다.
Luke 24:16 KRV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엠마오로 간다는 것은 원래 사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겨우 11km 떨어진 곳이지만 영적인 거리는 더 멀었던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역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원래 하던 대로 돌아가겠다는 의도 이기 때문 입니다.
주님의 구원 사역은 성경의 예언 대로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십자가 밑에서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삶의 영역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물고기 낚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닌, 사람 낚는 선교의 사명으로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이제 누가복음에서 사도행전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두제자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이 두제자가 눈이 가리워 보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십자가의 사건이 엠마오로 돌아가는 도상에서 슬퍼하며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 꺼리일 뿐일까요?
아니면,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십자가 후 삼일만에 부활 그리고 성령이 임하여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올 열방으로 전파되는 기쁜 소식일까요?
Luke 24:47 KRV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Luke 24:49 KRV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의 사랑이 이제 우리를 통해 우리의 삶 속으로 전파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드디어 보게 됩니다.

2. 너희가 본 부활의 주님

이제 두 제자는 그분이 부활 했다는 수많은 소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증거는 아주 직접적인 것이었습니다.
Luke 24:30–31 KRV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고 함께 식사를 하려는데
우리 주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그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십니다. 바로 눈을 가리던 것이 거치고 주님인줄로 알아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 관계도 처음 만난 사람은 누구나 어색합니다.
그런데,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다 보면 어느새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라는 것을 할 때, 차를 한잔 마셔도 되지만, 밥을 먹어보면서 의논할 것을 의논해보는 것입니다.
주님인줄 모르다가 함께 길을 걸으며 말씀을 풀어주시는 것을 듣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함께 밥을 먹어보니, 우리 주님이구나 알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Luke 24:32 KRV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 두 제자가 본 것은 이제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부활의 주님을 본 것입니다.
주님과 걸으며 대화도 나눠 본 것입니다.
같이 밥도 먹고 해본 것입니다.
그냥 건너 건너 아는 사이가 아니라, 진짜 아는 사이, 스승과 제자의 사이 함께 동거동락하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부임해서 지금까지의 저의 목회를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처음 구세군을 만나고 정을 나누던 이 구세군 시드니 한인교회에 나를 왜 다시 부르셨을까?
나의 어떤 점을 쓰시길 원하셨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목회 방향이 분명 하나님 뜻에 부합한데, 왜 이렇게 외롭고 지칠까?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부족하겠지…생각하다가도
다시 생각해보니,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방법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 외에는 우리에게 요구 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과 어떻게 다를까?
모세가 자신을 따르는 자들만 데리고 가나안으로 갔다면 한 달이면 도착할 길을 왜 40년을 걸었을까?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또 누가복음을 복기해보면서, 예수님은 항상 오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하셨구나!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따르는 자 뿐 아니라, 그들 모두를 한 명도 빠짐 없이 인도하시길 원하셨구나. 그들의 믿음의 분량과 걸음 속도에 맞춰주셨구나
무디고 믿기를 더디 믿는 자에게 멀리서 따라오라 하시지 않고 왜 따라오지 않냐고 책망 하시지도 않으시고 그저 찾아 오셨구나.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동거동락하시는 구나.
나는 지금까지 옳은 길만을 제시하고 혼자서 저 멀리 앞장 서서 따라 오라고만 하고 뒤쳐저 있는 이들을 독려하려고만 했지 정작 그들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구나.
외부에서 시급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많지만
교회 내에서 사관의 돌봄과 영적인 교제가 필요한 이들을 바쁘다는 이유로 보살피지 못했구나
오늘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며 달려온 누가복음 마지막 시간에 되서야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소한 실수나 잘못에 대한 수정이 아니라,
큰 관점에서의 목회방향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먼저 가까운 곳에서 부터 전파되어서 그 사랑이 흘러 넘쳐야 하는 것이구나 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에게 지난 몇주는 Moment of truth의 시간 이었습니다. 오늘 다 간증 할 수는 없지만 5년전에 나에게 주셨던 그 고난이 오늘날 이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예비하썼고 정밀하게 셋팅되어 있던 하나님의 계획이었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5년전에 내가 그런 어려운 갈등을 겪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나의 모습을 또 합리화 하거나 정의감에 도취되어 있었겠구나 하며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주님의 진리와 깨달음은 강력한 선포나 선언이 아니라, 용납해주시고 함께 떡을 떼고 축사하시고 동거동락하는 중에 나타나는 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를 지금까지 용납해주시고 보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어떤 과제가 남겨졌을까요?
이제, 저와 여러분에게는 어떤 사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Luke 24:33–34 KRV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Luke 24:48 KRV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내가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는 나를 증거하라!
나와 동거동락하며, 말씀을 배우며,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본 것을 증거 하라!!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
이렇게 주님의 역사는 한치의 어긋남 없이 말씀 대로 성취 됩니다.
이렇게 착착 진행되는 구원의 역사를 놓치지 않으려면 앞에서 말씀 드린 무관심 하거나 무디어도 안됩니다. 이 두제자와 열한 제자는 그 슬픔과 무딤 같은 무기력과 절망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일종의 PTSD 즉, 엄청난 대형사건 이후에 겪는 이겨낼 수 없는 고통과 절망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과정 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을 건져 내신 분은 예수님 이었습니다.
‘너희가 따르던 예수는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제 더 이상 예수가 메시야 라고 말할 수 없지?’ 사탄은 속삭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 라고? 무슨 하나님의 자녀가 그렇게 사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너희는 세상의 욕망 앞에, 인정 받고 싶은 마음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 속에 그렇게 허우적 데며 살고 있느냐?”
사탄은 우리를 미혹 합니다.
그때, 우리는 부활의 주님이 곧 찾아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묵묵히 우리의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날 우리의 기도의 처소로 조용히 찾아 오셔서 말씀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 지고 우리가 걷는 신앙의 여정에 어느덧 찾아오셔서 이런 저런 소망을 주시는 대화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본 바와 같이 이렇게 내가 존재 한다.
너희가 지금까지 본 대로 나는 너희 삶에 동행한다.
너희가 본 대로 증거하라.

결론

신앙이든 인생이든 어떻게 그 진정성을 알 수 있을까요?
그 척도는 책임 입니다.
내 한 말이 있으면 지키려는 노력
내가 본 것이 있으면 본 대로 증거하는 정직
이것이 우리의 죽음 후에 우리 인생에 남을 열매 중 하나 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지 않으신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하신 일을 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다른 어떤 것도 더 할수도 없고 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제가 아는 아주 강력하고 도전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What would Jesus do?”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또한, 사관학교 때, 교관으로 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아주 원론적이면서도 도전적이고 강력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So, what are you going to do?”
그래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알겠다. 그러면 뭘 하라는 거냐?
모든 설교와 너의 생각에 스스로 질문 해보라고 조언을 준 것입니다.
매주 설교를 듣고 계신 여러분께도 이 질문은 유효할 것입니다.
오늘 이 메세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다면,
나는 그래서, 뭘 어떻게 실천 할 것인가? 자문 하여야 합니다.
말씀에 비춰 보고, 내가 뱉은 말을 얼마나 책임지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앞뒤가 다르지 않게 진실되게 살고 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What would Jesus do?”
“So, what are you going to do?”
그 답이 오늘 누가복음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Luke 24:50–53 KRV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예루살렘 곧, 예배의 자리로 돌아가시고 그 자리에 늘 계십시오.
주일 예배로, 매일 아침 기도의 자리로, 수요일, 금요일, 참여 할 수 있는 모든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 하십시오. 그러면 “what am I going to do?”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하시고 “What would Jesus do?” 주님의 마음으로 살게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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