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란 무엇인가?
Notes
Transcript
[인사말-도입]
샬롬! 오늘도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께 마음 중심을 드립니다. 같이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 하나라도 얻어 갑시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제가 여기 서서 말씀을 전하지만 저도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한번 더 인사해 볼까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제 오늘부터 요한복음을 강해 설교를 시작합니다. 지난주 gbs에서 요한복음의 개관에 대하여 나눔을 가졌을 겁니다. 요한복음은 제4복음 이며 공관복음과는 구분이 됩니다. 저자는 누구라고 했죠? 사도 요한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 예수의 영광을 목격한자, 유대인이면서 유대의 지리와 역사를 잘 아는 사람,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입니다. 2세기초의 (리용의 감독)이레니우스가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에베소 감독)을 알고 있었는데 그를 통해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전해 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1)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인성보다는 신성을 강조합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는 생략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현저하게 많이 나옵니다. 저자는 스스로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요20:31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모든 복음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초점을 두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직분과 그 일대기가 의미하는 가르침에 초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가 된다고 주장하되 “로고스’ 즉 말씀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시작은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인 마1: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로 이야기 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혈통은 생략하고 예수님의 신적인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면서 시작하죠! 막1: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또한, 누가복음은 로마의 역사적인 정황을 의식하여 예수의 출생과 아담까지 포괄하는 예수의 가계도를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2)요한복음은 오늘 본문과 같이, 공관복음이 취하는 역사적인 서술 방법과는 달리 시간 이전의 태초라는 관점에서 이야기의 진술이 시작됩니다. 이는 (3)귀납법적 방법이 아니라 연역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사실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의 핵심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4)공관복음은 갈릴리 사역 중심이라면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사역을 중심으로 기술하였고 유월절에 대한 3번의 언급은 요한복음에서만 나옵니다.
[본론]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늘 본문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이 말씀이라고 번역된, 정확하게 하면 ‘그 말씀’ 을 중심으로 복음서의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헬라어 원문에 ‘호 로고스’ 쓰여졌는데 말씀이라는 명사 ‘로고스’ 앞에 정관사 “호’ 가 붙어서 이는 매우 특별하고 고유한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요한 시대만이 아니라 구약의 시대부터 모든 사람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교부들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자 의지’ 이며 ‘하나님의 계획으로 나타난 형상’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 천지 창조를 가능하게 하고, 창조를 입은 피조물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고, 그 시종의 방향을 좌우합니다.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본문과 같이 요한이 예수님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말씀으로 이해하고 말씀을 복음서의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의미중심의 역사관 때문입니다. 시간의 역사가 가시적인 인간중심적 역사가 아니라 비가시적인 말씀 중심적인 역사라고 요한은 생각한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11:3절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라고 선언 합니다. 말씀 중심의 역사라 어떤 것인지 성경으로부터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세상 만물과 에덴을 다스리는 권한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 선물이 바로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선물)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의 형식으로 주어졌고 하나님은 명하시고 인간은 순종하는 방식으로 둘의 관계는 유지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순종을 택했지요! 불순종은 곧 말씀을 버리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다가와 은밀한 속임수로 말하지요! 창3:1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마귀의 속임수는 모든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매정하고 가혹하고 독재적인 절대자의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는 대화의 상대가 아닙니다.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마귀를 대화 파트너로 삼으면, 마귀가 던지는 질문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반응하게 됩니다. 아무리 올바르게 반응하려 해도 의식과 의지는 물음과 의심속에 빠져 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교훈은 이것입니다. (1)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반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중요한 시작점 입니다. 이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좋은 예입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답(인정)하셨고 사탄을 대적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를 살펴보시죠! 아내와 남편, 상사와 직원, 부모와 자녀, 친구나 동료의 관계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대화 파트너로 의식하며 대화하는 것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에 준하는 수준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적인 조건들, 재산의 크기, 외모, 교육의 정도, 가문과 학벌의 배경들이 대화에 은밀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인간 관계에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지혜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타인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에는 그 사람이 지금 같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시 선악과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탄의 질문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를 감하고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하와의 말을 살펴 봅시다. 창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는 창세기 2:17절에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반드시’ 라는 말을 삭제하고 죽을까 하노라’ 는 미완료형 동사를 사용합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원문에서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죽는다는 동사가 두 번 사용되어 단호하고 필연적인 죽음을 말합니다.(무트 하무트) 이런 뉘앙스의 변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원인보다 죽지 않아야 한다는 결과를 강조하는 것으로 하와의 관심사가 이동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사탄에게 걸려든 것입니다. 사탄이 바로 말하지요! 창3:4 ‘먹어도 죽지 않는다’ 한걸음 더 나아가 ‘네가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 사탄이 여기서 주입한 것은 두가지 입니다. ‘먹어도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든지 거역해도 된다’ 는 논리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와와 아담을 위하여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까 하여 금지 명령을 주셨다는 의심을 하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의 불순종과 범죄는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말씀을 변질시키고 해석한 것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죽느냐 사는냐는 인간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선악과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말씀이고 그것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잘 알기에 롬14:8 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빌3:8절 말씀은 어떻습니까?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그리스도 때문에 생명조차 상대화 된 마당에 그가 자신의 유익한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쯤 이야 너무도 당연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갔으면 좋겠습니다.
하와는 또 ‘만지지도 말라’ 는 부분도 추가하며 하나님 말씀을 더합니다. 말씀을 가감하면 필연적으로 죽음의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다른 예를 한번 볼까요? 족장시대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데려다 밤에 하늘을 보게 하시며 ‘하늘의 뭇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이를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언약의 증거를 요구하자 하나님은 소와 염소와 양과 비둘기를 가져오라 하셨고 그것을 아브람이 가져 왔으나 사소한 불순종을 하게 됩니다. 창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그 불순종이 댓가를 보면 엄중합니다. ‘네 자손의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을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다’ 또, 모세가 쓴 신명기를 보면 인간의 생사화복 일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 ‘사울’이 버림받은 이유도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대적 아말렉의 왕 아각을 생포하고, 멸하고 죽이라고 한 양떼를 제사용을 가져 오게 됩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도 아시듯이 하나님에게 버림받게 되고 왕위가 다윗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울의 실패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입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도 결국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데 실패하고 모두 망하게 됩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역사의 흐름이 좌우되는 패턴은 신약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의 사도로 사역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행 13:46 ‘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가 선교의 물줄기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론]
기독교의 역사는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흘러왔고 흘러갑니다. 인류의 실패도 살펴본 바와 같이, 말씀에 대한 부주의 때문이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실수의 원인도, 이스라엘 민족의 왕 사울의 실패도, 그리고 유대인의 실족함도 말씀에 불순종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어떻게 반응 하느냐 하는 것이 생명을 역사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모든 실패를 만회하는 유일한 해답은 말씀의 회복입니다. 말씀의 회복은 사람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말씀 자체 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뜻은 예수님은 시간 이전부터 영원 속에 계셨던 말씀이시라는 것입니다. 3절도 읽겠습니다.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또한,그 말씀은 만물이 존재하게 된 창조의 근원이며 존재의 유지와 보존을 가능하게 하는 섭리의 원천이 되십니다. 1장 14절 말씀도 한번 읽겠습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말씀의 회복은 바로 온 인류의 실패와 교회의 실패를 동시에 회복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의 요한은 말씀 중심의 역사적 흐름을 주목하고 복음서의 시작을 ‘말씀’ 으로 시작합니다.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이 무엇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앞에서 요한의 증언을 따라 우리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몇가지 중요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 문자나 활자로 대하지 마시고 이제 부터
살아 있는 빛과 생명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시편119:105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 이니이다’ 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4:12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 하나니’
둘째는,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연합되어야 합니다. 연합된다는 것은 그 말씀속에 우리가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올 한해 우리 대학청년부에 말씀을 향하여 불 일 듯한 열망과 사모함이 충만하기를 축복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날마다 묵상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 하나님과 연합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 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면 드립니다. 함께 말씀을 생각하며 찬양 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