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38:1-2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59 viewsNotes
Transcript
오늘은 가족 여러분과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제가 어렵기에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그래도 여러분의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해보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지난번 가족 예배를 기억하신다면 오늘 조금은 어렵게 자극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것인데 굳이 밝혀드리는 것이 예의라 생각해서 말씀을 드리면 너무 쉬워서인지 문제를 내고 쉽게 맞추는 바람에 지출이 상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시작을 해 보겠습니다. 여기에 돌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 이를 철학적으로 표현한 말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욥에게 말씀’하신 여호와는 본문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욥이 함께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과 비교를 해보면 돌은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돌은 ‘자기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과 욥은 어떻습니까? 욥은 등장 인물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으니 별다른 어려움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죠. 특히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자 각각 자유롭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죠.
다시 ‘돌’에 집중해보겠습니다. 돌이 존재한다.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요? 이런 물음에 여러분은 어의가 없는 질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는다. 또는 믿으세요 라고 말할 때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바로 ‘있음’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이 증명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니 일견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결론도 자연스럽게 이끌어져 가는 것이죠. 즉 존재하는 인간과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대화를 다룬 성경은 믿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보는 것’입니다.
마치 여기에 있는 돌을 여러분이 ‘보기 때문에’ 돌의 있음이 증명되는 결론에 이르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듯 보이는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 것이죠. 그럼 본문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경이 하나님의 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욥’이라는 인물을 알고 나면 그렇게 ‘하나님의 있음’을 향하는 욥의 간절한 ‘찾음’이 바로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성경이 있다면 ‘욥기’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본문이 38장입니다. 앞서 욥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했고 그런 고난의 이유에 대한 항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있음을 말할 수록 상황은 오히려 ‘하나님의 없음’에 더 가까와지고 있죠. 이와 같은 상황을 겪은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 합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이죠. 더 나아가 사르트르는 ‘신은 없다 그래서 모든 일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고 자신의 철학 사조를 전개합니다. 이렇게 신을 부정하고 보이는 것을 중심하는 철학을 ‘실존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러한 보이는 중심의 사고는 더 깊어져 ‘내가 본 것, 내가 생각한 것’을 중심으로 사고하기 시작합니다. 최근에는 ‘반려돌’이 등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나 고양이가 내가 보는 눈에서 벗어나 대상으로 가치를 갖게 되고 의식하기 때문에 즉 ‘내 마음대로 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그 또한 관계 맺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쉬운 대상물에 마음을 두는 것이죠. 의식이 없는 대상을 의식이 있는 대상화를 만듭니다. 이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합니다.
신기하죠. 실존을 말하면서 실존을 넘어서 자기만의 의미를 두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두면서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보이는 돌이 더 설득력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있음을 부정하고 설명하려는 세상보다 눈에 보이는 돌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보편적인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있음’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의미 있는 것은 이렇게 ‘실존’을 말하는 사르트르 조차도 결국은 설명되지 못하는 마치 욥에게 질문한 많은 내용에 대한 인간 이해와 과학을 넘어서는 지식에 대해서는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있다는 것이죠.
쉽게 설명해볼까요? 커피 숖에 우연히 앉아 있는 여인에게 시선이 가고 시선이 가기에 ‘있음’이 되고 마음이 가기에 의식은 점진적으로 그 방향을 갖게 된다. 는 식으로 풀어가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말 중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함 속에 존재를 이어가다가 우연하게 죽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실존주의적인 사고를 하면서도 실존주의의 황제인 사르트르의 이런 말은 부정하고 오히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보다 높은 자리에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 ‘고통 받았던 12살의 너에게 이렇게 말해라’ 등 부정할 수 없는 존재인 ‘나’를 더 높은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있음을 뭐라고 했을까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돌’이 있음은 스스로 있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을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양하게 사용하는 ‘의식’이라는 단어는 ‘넌 의식이 없는 행동을 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한다’ 등 일상에서도 자주 사용할 정도일뿐만 아니라 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식’ 유무가 가장 중요한 것이죠. 119 대원이 묻는 말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즉 내가 의식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는 질문이죠.
돌과 같은 대상이 ‘의식’이 없다면 결코 대상으로써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존재, 즉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돌맹이도 의식이 있는 것처럼 대상화하는 것을 비교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존재를 길거리에 흔한 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존재한다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왜냐하면 내가 의식하는 것으로 마음의 방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반려견이나 반려묘에게 마음을 두는 것과 돌에다 마음을 두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말씀 드린 것처럼 내가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같은 출발 같지만 살아 있는 반려견의 반응은 비록 본능에 근거한다고 해도 인간과의 교감을 통해 반응한다는 것인데 반면 돌은 오로지 의식하는 자의 의식으로만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자기만의 의식에서 출발해서 자기 의식으로 돌아오는 방식을 갖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앞선 37장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욥기의 시작에 욥을 평가하는 말이 있습니다. 욥기 1:1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런 욥이지만 마치 의식없는 대상인 돌을 애착하듯 자기만의 교감으로 믿은 하나님을 한참이 지나고 직접 대면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37장까지 욥의 말을 여호와께서 정리한 것이 2절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합니다. 3절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너게 묻는 것을 대답하라’는 것이죠. 4절부터 41장 34절까지 엄청 길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긴 질문은 성경을 통털어 유일무이한 곳입니다. 도대체 욥은 뭐라고 했기에 이러한 엄청난 질문을 받았을까요? 그 내용을 다 말할 수는 없고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께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일이 여러분이 살면서 인식하고 있는 ‘나 자신’을 중심으로 사는 세계에 갇혀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처럼 일어나는 오늘의 예배 그리고 뜻하지 않게 가족의 일원이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일등 심상히 여기지 말고 ‘작은 돌’을 보면서도 애착을 갖는 세상에 빚대어 관심을 갖고 마음을 써 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제 나이가 인생을 돌아 볼 또 다른 시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 유명한 단테는 신곡에서 50이라는 나이가 되니 뒤에서 따라오는 그림자가 보인다고 하면서 자기를 찾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아기가 아빠와 엄마를 보면서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그때 부모는 나를 알아본 것이 기뻤습니까? 아니면 기다리던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말했기 때문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자랑하죠 ‘그렇게 말했다’는 자녀를 자랑하죠
그러면 부모가 자녀에게 알려준 것은 무엇입니까? 어려운 질문이 아니죠. 반려견이나 묘를 집에서 키우면서 보호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불러주는 것이죠. 단어 반복으로 ‘나와 보호자’를 일치시키는 것처럼 ‘나와 엄마 아빠’를 함께 불러 줌으로 인식하게 한 것 아닙니까? ‘온유한 주님의 음성 내 귀에 속삭이네’
대상자가 마음이 쓰이게 한 것 아닙니까? 아이가 생각하기를 ‘왜 엄마 아빠’를 자꾸 말하지, 그래 한 번 해줘야겠다 하면서 아이가 벌떡 일어나 절하거나 부모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 엄마’로 부름으로 이루어지듯, 강아지나 냥이가 보호자가 문을 열면 다가와 꼬리를 흔들거나 몸을 부비는 행동에 담긴 것이라는 건 어떤 이론이나 가르침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아이가 장성하면 부모와 다툽니다. 자신의 삶의 경계를 넘어서고 간섭한다는 것이죠. 마치 40절에 여호와께서 욥에게 ‘트집 잡는 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만 그럽니까? 개 훌륭과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주인의 지나치게 지키려는 개나 주인처럼 행동해서 다른 보호자를 경계하는 개 역시 어리석고, 트집 잡는 자와 별반 다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기하게도 훈련사는 몇 번의 반복 훈련과 보호자와 반려견의 위치를 잡으면서 올바른 관계가 되도록 합니다. 지금 욥기의 38,39,40,41장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한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관계를 바로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돌이 자기 자신이 있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나 자신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여기에서 철학자의 사변을 빌려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데카르트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한다 해도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생각’이 있음은 분명하기 때문에 자신이 결국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유명한 시인 김춘수도 꽃이라는 시에서 누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지만 불러 줌으로서 꽃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가 ‘돌’에 애착을 주고 반려로 삼으려는 오늘의 실존주의적 시대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꽃입니까? 아니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입니까? 두 입장 모두를 취할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름을 불러 주는 것’처럼 실존하려면 ‘이름’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실존 이전의 상태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음’을 거부하든 여러 논증를 통해 반증을 펼칠지라도 여러분의 있음에 대한 근원, 여러분의 존재함에 대한 ‘이름을 갖고 있음’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부름에 응답하여 부모로 알고 ‘아빠, 엄마’로 부름으로 인해 이미 가족으로 연결되었음이 완전해집니다. 부르든 부르지 않던 가족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부모로 알고’는 우리의 의식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는 것인데 정작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생이 ‘하나님을 알고’ 부른다면 어찌 이 땅에서 부모를 인식한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에 비하겠습니까?
욥은 이 땅의 인생이 겪어야 할 고통을 모두 겪은 대표적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의 대표적 말이 ‘내가 죽을 지라도 그가 나의 옳음을 인정해서 결국 나는 정금과 같이 될 것이다’는 고통과 고난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내렸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의 ‘대장부 같은’ 말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답하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 42:2–6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은 나름 시대를 보는 눈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저한 평가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옳고 그름에 대해서도 때론 나름의 논리로 설명도 할 줄 알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하나님께 대하여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혜가 있는 자는 하늘을 봅니다. 왜냐하면 천상의 흐름을 보고 시대를 따라 살려고 하는 ‘천상의 복’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죠. 흔히 액운을 피하고 화를 피하고 복의 기운을 받고 무탈하게 살려는 삶은 그저 소박한 바람이라고 말하지만 먼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면 들으시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이가 주는 마음의 눈으로 보시기를 기대하고 가족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