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가서, 돌아가니라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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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누가복음 2장 15~20절
듣고 본 그 모든 것
우리 이렇게 고백해 보겠습니다.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복음인 예수님이 내 삶에 아름답게 일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우리 모든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어떤 근심이 있습니까?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우리가 많은 경우 근심이나 두려움을 부정적으로만 이야기합니다. 근심이 있기에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두려움이 있기에 외부나 내부로 들어오는 위협을 막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근심과 두려움을 아주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과 두려움을 우리가 건강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가장 성경적으로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기도와 말씀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답을 찾아가 보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 2장 15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알려준 천사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놀라운 체험을 한 목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하는 마음으로 어안이벙벙합니다. 그 상태에서 이제 각 마을에 목자들이 모여서 이야기합니다.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말입니다. 이들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목적은 매우 명확합니다. 무엇입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루어진 일을 보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1~12절을 보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가브리엘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동네는 어디입니까? 다윗의 동네는 정확하게 베들레헴을 이야기합니다. 또 하나는 그 구주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여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강보에 싸이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이상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천으로 둘둘 싸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구유, 돌 구유에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평범한 모습이 아닙니다.
보통 이 당시 아기를 출산하는 것은 산파를 불러서 집에서 낳습니다. 집에서 낳습니다. (이 그림을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그림은 보통 유대인의 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마구간이라고 하면 집과 별개에 구주로 되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축을 기르는 곳이 1층에 있고, 보통 2층에서 생활을 하게 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이 집에서 출산한다면 어디에서 출산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2층에서 출산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1층에서 출산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지 의미를 아셨습니까?
우리가 저번 주에 예수님은 죽기 위해 돌 구유에서 태어났다고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이 낮아짐은 출산한 위치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태어나는 가옥에 2층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가축들이 출산하는 1층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는 2층이 아닌 1층이라는 위치에서 태어났습니다. 죽기 위해 무덤을 상징하는 돌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목자들은 천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돌 구유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절대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는 아기를 장차 오실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돌 구유에 아기를 낳는다. 그것만 보아도 천사가 하는 말이 사실이다. 그분이 구주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6절입니다.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목자들이 이제 급히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마을로 향합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비록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알려준다고 해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베들레헴이 가지는 특징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베들레헴에는 약 300명 정도 40가구 정도가 살았습니다. 이때 한 살 이하의 사내아이의 수는 6~7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 누가 태어났는가? 하는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지금 인구조사를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임신을 한 사람이 과연 마리아 혼자였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한가지 증거가 예수님을 찾는데 쉽게 합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집 2층에서 정상 출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 1층에서 출산이 이루어진 산모를 찾으면 됩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낮은 자리, 누구도 태어나지 않는 자리에 태어나야 했을까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들레헴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베들레헴은 본래 해발 770미터의 산언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유대인의 집 구조를 생각하면 높은 곳에 더 높은 곳에 있는 2층에서 아기가 태어납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가장 높은 곳인 천국에 있다 가장 낮은 땅 위에 내려오십니다. 가장 낮은 곳인 가축이 출산하는 그곳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누가 만나러 갑니까?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그 당시 가장 천하다고 하는 목자들이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7~18절입니다.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목자들이 1층에 돌 구유에 태어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조금 우리가 이상한데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목자들이 도착해서 천사가 한 말 바로 이분이 우리의 메시아인 것을 전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이것을 전했을까요? 16절을 보면 목자들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자마자 움직였습니다. 언제 시간이 있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간 것도 아닐 텐데 그들에게 말했다고 하는 것일까요? 이 말은 다수의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집의 구조를 이해할 때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입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이 태어날 무엇을 찾았습니까? 여관을 찾았습니다. 여관인 것은 이 당시 여행객들이 숙박하는 장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숙박업소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집에서 한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없을 정도로 지금 베들레헴은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란 공간은 비어있는 데가 없습니다. 마리아는 동물이 있는 공간에서 아기를 출산한 것입니다. 가옥의 구조상 2층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몰랐을까요? 다 알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태어난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목자들은 이곳에 도착해서 그들에게 천사가 해준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 같이 놀라움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사들이 전해준 메시지가 그리 크게 들리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항상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충격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아니 어쩌면 지금도 품고 있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이사야 9장 6~7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들이며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사를 메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정사는 통치나 권력을 이야기합니다. 메시아가 와서 바른 통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기묘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온화한 성품과 경이로운 능력을 의미합니다. 모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의 뜻은 누군가를 돕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존재하는 아버지라 불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평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평강의 왕인 것은 유대인들에게 너무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이민족의 침입을 통해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이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에 있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넣고 그런 성경에서 예언하는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고 해봅시다. 당연히 반응은 놀라움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놀라움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후의 모습입니다. 어디에도 목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어떻게 했다는 말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가진 메시아에 대한 편견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한 요셉과 마리아의 부모로 태어난다.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기가 출산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1층 가축이 사는 그곳에서 출생했다.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이야기합니다. “말이 돼 우리의 참된 왕이 될 사람이 어떻게 저런 사람들에게서 태어나”“그러게 더욱이 아까 모습 봤어! 글쎄 아기가 돌 구유에 있잖아. 얼마나 차가울까”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아니 동방박사가 예수님께 찾아오지 않았느냐? 동방박사는 그 당시 페르시아 왕국의 전체 연구가들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닌 별을 통해 왕국의 흥망성쇠를 논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왔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잘못 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한 대표적인 인물로 이들을 꼽습니다. 이들은 목자들이 예수님을 탄생하자마자 바로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과 다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자마자 그 별을 따라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기간이 약 40일 이상이 걸립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예수님이 탄생한 후 최소 몇 주가 걸려서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성화에 영향입니다. 예수님이 마구간에 있고, 그곳에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가져온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구유에 태어난 예수님을 경배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장 9~11절입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이 말씀을 잘 보시면 집에 들어갔다고 이야기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나을 때는 객실이 없어 1층 가축이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인구조사가 다 끝나고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객실에 여유가 생깁니다. 자리를 옮겨 한 객실을 얻어 살고 있을 때 동방박사들이 와서 경배했다는 말입니다.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은 동방박사의 방문을 몰랐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소식을 들은 그 당시 많은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이 동방박사가 한 이야기를 듣고 보인 헤롯에 반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3절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동방박사들이 큰 별을 보고 이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헤롯 왕궁입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큰 별이 나타나면 새로운 왕이 태어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새로운 왕이면 왕궁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그때부터 소동이 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목자들을 통해 구주가 나셨다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들었습니다. 목자들이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만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20절입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일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 목자들은 천사가 전해준 사실들을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한 사람들은 오직 목자들뿐입니다. 어디에도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놀라고 영광과 찬송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 말은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목자들만이 그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오늘날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고 강퍅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법이나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이것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어두워진 세상에 불을 밝힐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천사들이 전해준 소식 정도가 아닌 명백하게 이루어진 사실을 말씀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목자들은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쩌면 목자들이 전해준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목자들이 구주가 이 땅에 오셨다는 말에 놀랐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믿지도 않았으며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때로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복음을 믿으십니까?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복음이 무엇인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복음에 대해서 4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복음일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곳에 계시지 않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늘로 오르신 그대로 우리에게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 네 가지 중의 하나도 예외 없이 다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합니까? 마가복음 16장 17~18절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이 본문을 잘 보면 강조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두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장 좋은 일은 이제 마귀의 공격에 넘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두려움과 근심입니다.
우리가 왜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빈부격차 남녀노소 상관없이 모두 두려움과 근심과 싸웁니다. 이것에 대해서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이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4가지 복음, 예수님의 탄생, 돌아가심, 함께 하심, 재림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려움과 근심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승리의 삶은 너무나 벅차 이 승리의 대열에 함께 하자고 초청하게 됩니다. 바로 전도입니다. 우리는 2월 한 달 동안 계속해서 전도 대상자를 찾는 시간이 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할 한 사람을 정했습니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을 찾지 못했다면 이렇게 쉽게 생각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두려움과 근심으로 가득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이 바로 복음을 들어야 하는 분입니다. 이 복음을 정말 제대로 전하기 위해 저는 여러분이 이 복음의 맛을 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이 실제가 되는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이 높아 내 힘으로 두려움과 근심을 싸우는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근심이 있을 때마다 복음의 4가지의 의미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이름을 넣어 고백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김세현)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며, 다시 오신다.” 아멘 결단의 찬양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