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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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2:15-19
창세기22:15-19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22장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반갑습니다. 오늘 설교를 맡게된 이승훈 전도사 입니다.
오늘 저희가 함께 볼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도 불린 이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을 통해 잘 알아보길 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통해서 그의 자손이 세세토록 번성한다는 약속을 그는 받는데요, 이 복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있게 알아보길 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하면 정말 유명한 사건으로 알려진,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 직후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신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시는 장면은 시작부터 독특합니다. 하나님은 보증을 들어서 약속을 하시는데,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맹세는 전 우주에가장 믿음직스런 존재의 약속이라 볼 수 있고 무조건 지켜진다고 말씀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과 또 22장 전체적으로 나오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 사건은 성경에서 정말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아브라함의 강한 믿음이 결국 복을 받게 하는구나,
저렇게 자기가 가장 바라던것을,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 잘 드리는게 좋은 믿음이고, 나도 저렇게 해야 복을 받는 구나,,, 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 본문의 내용의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할때는 구약의 상황과 신약의 메세지를 통전적으로, 쉽게 말해 한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예를들어보겠습니다. 하나의 영상과 자막이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 영상을 재생해보겠습니다. 영상 속에는 두 남녀가 등장합니다. 두 남녀는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상의 모습을 본 우리는 생각합니다. 아 저 두 커플이 사귀는 사이구나, 그러니 저렇게 다정하게 소곤소곤 이야기 하지!!
이렇게 생각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막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자막의 내용을 보니 두 남녀가 나눈 대화는 알고보니 사귀는 사이에서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 하나의 목적성취를 위해 비밀리에 상의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상만을 보아서는 대충 두 남녀가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분위기와 뉘앙스로 유추할 수는 있엇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내용을 다 알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경도 마찬가지 입니다. 구약을 영상으로 보고, 신약을 자막으로 본다면 성경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이 모두 필요하며. 특히 신약의 메세지를 통해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에 필수적입니다.
오늘 본문도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믿음의 이야기넘어 진정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칭찬하실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아브라함은 이삭이라는 독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22장 내용을 차근차근 읽어본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러 갈때 고민을하거나, 혹은 걱정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연하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산으로 이동합니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여러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습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의 아브라함을 생각해 본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따라 그 말씀을 져버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핑계삼아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여 애굽의 왕에게 소개했던 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을 어기고, 사라의 권유로 하갈에게 들어가 이스마엘을 낳은 일 등등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성실히, 성숙히 잘 지켰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옳은대로 행동한 적이 더 많았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를 데리고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말에는 군말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갑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삭을 번제단에 올려 진정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 모습은 아브라함이 참 많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임을 알려줍니다. 이전의 아브라함 같았으면 왜 그렇게 주셔놓고 또 가져가려고 하시는지 하나님께 따지는 모습이라도 보였을 법 한데, 전혀 그런 모습 없이 오히려 자신이 아들 이삭이 묻는 대답에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셨어”라고 대답하기까지 합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17장을 통해 엿볼 수 있었습니다. 17장은 아브라함의 이름이 바뀌는 사건과 할례를 명하신 사건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할례가 정말 중요한데요.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입니다.
할례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남성의 성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 할례의 의미는 남자 성기의 포피를 자르는 행위인데, 이는 포피를 자르는 행위의 본질적인 뜻은 남자의 성기를 아예 자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 하신 것은 “아브라함 너의 계보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자들로 이어지지 않는다” 라는 메세지를 내포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굳이 성기의 포피를 자르라고 하나님은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가 육신으로 말미암은 관계가 아님을 할례는 상징합니다.
이 할례는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과 연결이 됩니다. 이전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육신으로 계보가 이어진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계보를 이어줄 아들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그런 자신의 계보, 아브라함 족보의의 번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마엘이란 아이를 탄생케하는 결과를 맞이합니다
그러나이제는 하나님께서 할례를 통해서 가르치셨기에 아브라함의 계보는 인간의 어떠한 계보를 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안 아브라함은 이삭을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 본 것이 아니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신이 자기 힘으로 낳은 것이 아님을 명확히 알았기에 하나님께서 요구 하실때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네 씨가 크게 번성하게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라는 17절 말씀을 볼때 우리는
갈라디아서이 말씀과 함께 이 본문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16 (NKRV)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라디아서의 말씀은 이야기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진정 아브라함의 육신으로 나은 자손들을 더 번성케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니고,
할례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르쳐주셨듯 육신의 계보를 통하여 번성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계보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말씀하신것 입니다. 아브라함의 족보를 통해 오실 우리의 진정한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 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을 기업,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 즉 이스라엘을 낳고, 그들이 애굽에 들어가 60만명의 민족이 되어 가나안을 받아 내는 모든 것은 결국 신약에 와서는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결국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신다는 것을 이미 아브라함때 부터 약속하신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
이어서 !!!!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칭찬하실때 “네 아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이 부분을 살펴 볼 것 인데요. 이 부분하면 떠오르는 것이 혹시 있으십니까?
정말 우리가 잘 아는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게 주셨다는 것이 떠오르게 하는 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부분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께서 대속의 교리를 우리게 설명해주시기 위함이었고, 아브라함에게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속의 교리가 무엇이냐? 라고 질문 하신다면 오늘은 시간 관계상 가볍게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때로부터 범죄하였기에 에덴에서 추방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그러졌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죄악이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이 죄악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죽음가운데 있는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아래 죽음이라는 댓가를 지불해야 했지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그런 우리가 영원한 죽음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셨기에 어떠한 댓가도 지불 받지 않고 넘어갈 수 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댓가를 삼위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죄를 전가하셔서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길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대속의 교리 즉 대신 속하여 주었다라고 뜻하는 교리로 봅니다.
이 대속의 교리를 이 본문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명을 받고 자신의 아들이 주님의 것임을 알게 되었고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았고, 하나님을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삭을 주게 두지 않으시고 어린양을 예비하셨지만,
하나님은 직접 자신의 아들 독생자를 자신의 완정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신 것 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으 우리보다 앞서서 그분의 모든 것을 주셨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님보다 앞서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 기다리니, 주님 손에 우리르 드립니다. 사랑으로 인도하소서”
우리는 어떠한 고난에 닥치면 혹은 어떠한 시험에 닥치면 안될거야, 아니 난 도저히 힘이 없어 이제 그만할래하며 포기 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된거지,,, 라고 안주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서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정말 답답하기도하고 절망적일때가 많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낙심가운데 머물지 않아도 됩니다. 왜요? 우리 주님이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주셨고 나의 이름을 바꿔주셨고 나를 진정 당신의 귀한 자녀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쌓은 것이 아닙니다. 무너질 것같이 흔들리지만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내가 쌓은 나의 자존심과 나의 의만 무너질 뿐 입니다.
아브라함의 연약한 믿음도 하나님은 함께하셔서 쌓아올리셨던 것처럼 우리의 이 연약한 믿음도 하나님은 쌓아올리실것이고 더욱 견고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어볼까 합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얻은 것이며, 그 복이 내포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 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스스로 신앙을 잘 지켜나가자를 넘어서, 의지로이 신앙을 지키는 것이아니라 우리를 이끄시고 결국에는 아브라함의 믿음까지 끌어올리실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며 그분과 매일을 동행하는 우리 성산의 귀한 지체들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