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시대를 여신 예수님(막 2: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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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두루 다니면서 역동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셨습니다. 하지만 2장에 들어서면서 반대에 부딪치는데요, 어제 우리는 그 반대 중 중풍병자를 고쳤을때 발생한 반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와 그로 인해 촉발된 반대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첫번째 사건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들 뿐만 아니라 당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입니다. 이 당시 세리는 로마가 세우고 후원하던 분봉왕 헤롯에게 고용되어, 대부분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많은 재물을 착복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또한 줄곧 이방인들과 접촉하며 지냈기에 부정한 사람들로 규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당시 돈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고,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돈을 만지는 세리의 일은 십계명 1계명과 2계명을 간접적으로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죄인으로 불린 사람들은 도둑이나 강도나 살인자들과 같은 극악 무도한 자라기보다는 많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이 요구하는 엄격한 정결법을 잘 지키지 못했던 서민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어울리시는, 이 당시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셨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를 이해하지 못하여, 상종못할 죄인들과 함께 친교의 식사를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음식 정결법의 3대 핵심은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먹는가였습니다. 부정한 자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는 예수님의 거침없는 행동은 그들의 눈으로 볼때는 정결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자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본문 17절에서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찾아내어 그들을 멀리하므로 그들의 의로움을 지키는 것밖에 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찾아내어 그들을 포용하므로 그들을 의롭게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죄인을 배척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찾아 가까이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파격은 금식문제에서도 이어집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구약에서 정한 대 속죄일 금식 이외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이 당시 금식은 하나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 대한 애통함이자, 어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임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표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금식일이 되자 바리새인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지 묻자 예수님은 결혼식에 빗대어 이를 설명하십니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식은 칠일간 지속되었는데, 결혼식 기간에는 금식일이 끼어 있어도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신랑이 떠나고 나면 그때 금식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신이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때가 아니고, 자신이 떠나면 금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금식하며 기다리던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고대하던 바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있으니 금식할때가 아니라 도리어 잔치할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을 완수하시면 하늘로 떠나실텐데 그러면 다시 금식해야 합니다. 이미 성취된 하나님 나라를 즐거워하는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며 금식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부분적인 성취들을 볼때 잔치하고, 아직 성취되지 못한 모습들을 볼 때 금식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동안에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으니 금식은 어울리는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경축하며 잔치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파격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모든 날 중에 가장 거룩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무슨 날입니까? 일을 하면 안되는 날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면서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당연히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안식일에 노동을 하므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무 엘상 21장에 나오는 사건, 곧 다윗과 부하들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굶주렸을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으로 허기를 채운 사건을 예로 듭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종교 규정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 제도는 사람을 위해 제정되었는데 안식일 때문에 사람이 굶주리거나 고통을 겪는일이 생기면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사람을 옭아매고 통제하는 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고, 평화를 얻게 하고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하고요, 이것이 안식일의 주인인 자기의 본래 의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의 파격적인 행보를 가리켜 예수님은 생베조각이나 새포도주와 같다고 말씀 하십니다. 특히 새 포도주의 경우는 낡은 부대에 담을 수 없고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새로운 시대를 여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용서받고 의롭게 변화되는 시대,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잔치의 시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작동하는 정상의 시대를 여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배척하는 옛 관습,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옛 통념, 안식일에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는 옛 규례로는 예수님이 시작한 새 시대를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혐오의 시대를 끝내시고 환대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규칙의 시대를 끝내고 사랑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시작한 새로운 시대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낡은 부대와 같은 옛 사고 방식을 버리고, 낡은 옷과 같은 구습을 벗어 버리고 약동하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행보는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파격적이지 않지만 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엄청난 파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고수하시지만, 때로는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 파격도 가져 오십니다. 우리가 지금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예수님의 파격 때문이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있는 것도 엄청난 변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