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전에 반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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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views1. 하나님이 선택한 남자 2. 이해할 수 없는 약속 3. 기다림 누가 좋아해? 4. 낯선 도전에 반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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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선택한 남자
하나님이 선택한 남자
샬롬 반갑습니다.
처음 목사님께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한마음교회 가족들과 어떤 말씀을 나누어야 할까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브라함이 생각나더라구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삶의 서사를 전 알지 못하지만 아브라함처럼 고향과 친척을 떠나 완전히 다른 환경과 세상으로 오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적응하고 살아내느라 많은 고생도 하셨을 것이고, 때론 막막함을 느껴 힘든 순간도 있었겠죠.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며 낙심하실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쉬고)
그럼에도 한마음 가족들은 모든 순간을 견뎌내셨죠.
견디며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떤 모습이었던지간에, 우리 삶을 주목하시고 손을 내밀어 필요한 은혜를 때에 따라 주셨던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일거에요.
(쉬고)
바로 아브라함처럼 말이죠.
아브라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수식어죠.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의 조상”이라 불릴만큼의 믿음을 갖고 있었을까요?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가득했던 사람일까요?
(쉬고)
절대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 같았어요.
우리처럼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신뢰하지 못했던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죠.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실패와 넘어짐 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순간들을 겪고 지나면서, 하나님이라는 분을 더 잘 알고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었던 것이죠.
(쉬고)
혹 지금 우리의 삶에 여러 고민과 도전 그리고 고난 등이 있다면 그 것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기 전의 신호와 같습니다.
그 시간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그리고 그런 분이 나를 사랑해주고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죠.
(쉬고)
오늘 본문의 아브람이 바로 그랬어요. 아브라함의 이름이 바뀌기 전이니까 아브람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는데, 그 중 95년을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어요.
아브라함의 이름의 뜻은 “열국. 만국의 아버지"인데요.
아브람의 뜻은 무엇일까요?
아브람이라는 뜻은 ‘아버지여 높임 받으실지어다'에요. 여기에서 말하는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하나님? 혹은 다른 신?
아브람의 이름 속에 숨겨진 ‘아버지'는 그 때 아브람의 가족이 믿고 섬기던 신이었던 달의 신이에요.
세상을 보면 다양한 창조 설화들이 있는 것처럼 달의 신 역시 세상을 창조했다는 설화를 갖있어요.
아브람과 그 가족은 달의 신이라는 신을 ‘아버지'로 모시던 사람들이었어요.
달의 신을 아버지로 모시던 그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던 아브람을 찾아가셔서 하나님이 딱 선택 하셨어요.
(쉬고)
당시 아브람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인데, 지금 이라크에요.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이라크는 문명의 요람이다"라고 표현해요.
왜냐하면 고대인들이 처음으로 모여 도시를 만들고 공동체를 이룬 곳이 바로 이 곳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 지방이기 때문이에요.
특히 아브람이 살았던 때는
고대 시대 중에서도 가장 많은 공예품과 비문들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는 시기에요.
이 당시에 있었던 여러 기물들과 글들을 통해 문화, 종교, 신념, 일상 등에 대해 잘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아브람은 모두가 꿈꾸고 그리는 곳.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사람이었어요. 또 꽤나 있는 집 사람, 부족한 것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풍족하게 누리며 살아가던 아브람에게 한 신이 나타나요. 그런데 그 신은 자신이 믿고 아버지라 모시던 “달의 신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라는 신이 나타나서 그에게 뜬금없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이야기 해요.
정말로 분명하고 선명한 명령.
그 한 줄의 말씀이 그에게 별안간 뚝 떨어진거에요.
(쉬고)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까요?
그냥 거기 있는 것이죠.
누군지 잘 모르는 신의 명령 따르지 않는 것이죠.
내가 믿는 신은 “달의 신"이잖아요..
(쉬고)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나 혼자 하기엔 좀 힘든 일이 있다고 한번 생각해볼까요?
잘 모르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물어 찾아가 설득해서 일을 하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내가 잘 알고 함께 일해왔던 사람들을 데려와서 일을 하는 것이 편할까요?
좀 더 편한 것은 나를 잘 알고 서로의 성향과 일의 방향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죠.
(쉬고)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을 믿고 신뢰하고 예배하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셨다면,
한 사람을 주목하고 그를 택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충성도가 높아 보이는 어떠한 한 집단을 선택해서 그들을 통채로 불러내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어요.
한 집단이 신을 믿고 그를 경배하기 시작하면, 그들이 믿는 신이 더 빨리 전해질 것이고 그 집단은 곧 영향력을 갖게 될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굉장히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세요.
‘집단' ‘종족'. 구성원 전부를 부르지 않으셨어요.
아브람이라는 한 사람을 주목하셨고, 그를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아브람에게 말도 안되는 명령을 하세요.
( 쉬고)
아브람에게는 내가 믿고 신뢰하며 가족이 사랑하는 “달의 신"이 아닌 여호와라는 신의 명령이 내려 온 당황스러운 순간이었겠죠.
이 곳 갈대아 우르는 자신에게 모든 것이 익숙한 곳이에요.
생활 터전이고 고향이고 친척들이 다 살고 있어요.
아브람의 아버지는 우상을 조각해서 만들어 팔던 사람이고, 나름의 영향력도 있던 사람이에요.
비록 아브람에게 자녀는 없지만 그 외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에요.
심지어 아브람은 75세이고, 아내 사래는 60세 중반이에요.
이 당시 75세는 지금과 다르게 젊은 사람의 축에 속했다 해도익숙한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더군다나 오랜 시간동안 알고 지낸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공동체가 존재하잖아요.
모든 것이 익숙한 곳이에요.
눈을 감으면 골목 골목이 다 생각이 나고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날 정도로 너무나 편한 곳이에요.
(쉬고)
지금 아브람이 가야 하는 길은 어떤 계획도 짤 수 없는 상황이에요.
신이 나타나더니 떠나래요.
근데 거기가 어디인지도 몰라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거기에 가서 내가 살 수 있는 집이 있을지 없을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도 몰라요.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는 상황인데, 그가 떠나기로 결정해요.
그가 떠날 때 사람들이 “잘 결정했어. 축복해. 잘 살아"라고 했을까요?
“에? 너 어디 가? 짐을 왜 싸? 이건 왜 팔아?”
“여기를 떠난다고? 여기 갈대아 우르야. 그래도 떠날거야?”
“도대체 왜? 뭐하려고? 어디로 갈 건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간다고? 너 어디 아파?”
별의 별 이야기를 다 들었을거에요. 그런데도 아브람은 떠나기로 해요.
(쉬고)
말도 안되는 상황에 모두가 만류하는 그 순간에 아브람이 떠나요.
그가 믿음이 있어서 떠났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당시 아브람은 하나님의 관점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성경적 가치관. 하나님의 시선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에요.
(쉬고)
그럼에도 그가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에요.
(쉬고)
“그의 마음을 움직인 그 결정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신을 만났어요.
아버지가 평생 우상을 만들어 팔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신들 중 하나도 만난적이 없었어요.
거기에다가 자신의 가족이 온 사랑과 정성을 다해 믿어왔던 “달의 신"도 자신을 만나 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호와라는 신이 딱 나타났어요.
신이라는 존재의 임재를 경험한거에요. 인격적으로 만난거에요.
(쉬고)
한마음 가족 여러분들 예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기억나시나요?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되십니다. 라고 어떻게 고백하게 되셨나요?
(쉬고)
진짜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을 온 마음으로 피부로 느꼈기 때문 아닌가요?
그것처럼 아브람은 여호와를 인격적으로 만난거에요.
그리고 그 고난을 감내할 만한 복 세가지를 들었어요.
신을 직접 만난 것도 충격인데, 그 신이 자신에게 세가지를 약속 한거에요.
아브람이 익숙한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난 이유에요.
무조건적인 언약과 선포
무조건적인 언약과 선포
갑자기 나타난 신이 그에게 무조건적인 약속을 해요.
“제가 떠나면 뭐해주실래요?”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주도적으로 세가지를 약속하시더니 일방적으로, 온통 손해를 보는 것과 같은 약속을 덜컥 맺으셨어요.
무조건적이에요. “아마도 될거야"가 아니라 “될 것이다"라는 확실한 세 가지 선포.
민족을 이룰 것이다.
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아브람이 떠날 이유가 확실해졌어요. 이건 자신을 향한 신의 선포이거든요..
인격적으로 만난 신이 자신을 위해 3가지를 확신하며 선포 하셨잖아요.
물론 아이를 25년 뒤에 낳을 것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으셨지만요. 그 기한을 알고 기다렸다면 참을만 했을텐데, 기약도 없이 25년을 기다리게 되었죠.
기다림을 좋아하는 이는 없다
기다림을 좋아하는 이는 없다
그 누구도 기다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기다리는 것 좋아하세요?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연락도 없이 30분이 지나도 한시간이 지나도 안와요.
그럼 어때요?
맞아요. 딱 그 표정을 지을거에요.
혹시 기도하는 제목 다 이루어졌나요?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 있죠?
저도 그래요.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길지 않은 제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들을 다 이루어 주셨더라구요.
시간이 걸릴 뿐. 내가 기다려야 할 뿐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 기도들을 다 응답해 주셨더라구요.
(쉬고)
한마음 가족 여러분 기다림이라는 것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최고의 작업을 하는 시간이라는 것 알고 계신가요?
내 삶에 하나님이라는 실존하는 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이에요.
그 분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내 삶에 딱! 빡!하고 일어나는 순간이에요.
(쉬고)
얼마 전에 아시안컵이 있었죠.
16강과 8강전 두 경기 모두 경기가 끝나기 직전 골을 넣었고, 연장전과 승부차기로 넘어가게 되었는데요.
축구를 잘 모르는 분들도 우리팀이 득점에 성공을 하고 이기면 좋아합니다. 그것이 극장골이라고 불리는 극적인 골이라면 더 짜릿하기도 하죠.
(쉬고)
그런데 여러분 우리 나라가 골을 넣으면 왜 기분이 좋을까요?
그들이 골을 넣는다고 해서, 제 통장에 득점 수당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응원해줘서 고맙다고 선수들이 치킨을 사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기분이 좋고 기쁜 것일까요?
그들이 골을 넣어도 내 삶은 바뀌는 것도 없어요.
그 팀이 이겨도 나에게 떨어지는 것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기뻐해요.
그 한 골과 게임의 승리가 경기를 보며 답답했던 순간을 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에요.
그 골로 내 삶은 바뀌지 않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기쁨을 오롯이 누리게 해주는 시간이기 때문이에요.
골을 넣지 못하고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면 성질나고 머리를 쥐어뜯지만 그래도 괜찮잖아요. 다음 경기에 잘하면 된다고 내 팀과 선수를 응원하면 되니까요.
이기던 지던 그 다음 경기를 우리는 기다리죠.
지면 기분이 나쁘지만, 그 것이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진 않거든요.
(쉬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다리는 시간은 이것과 차원이 달라요.
우리의 삶이 변화되거든요.
삶의 환경은 그대로여도, 그 것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과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거든요.
그 기다림을 견딜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기다림의 끝에 얻을 그 기쁨의 순간을 오롯이 느끼고 삶의 변화를 깨닫도록 저와 여러분의 영혼에 기다림이라는 최고의 작업을 하고 계시는거에요.
(쉬고)
그런데 이 기다림의 시간은 정말 지루고 힘들어요.
견디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왜냐면 기다림의 이유와 목적이 어느새 나를 위한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시작하지만 사실 그 뒤에 나의 이기적인 마음들이 여전히 남아 있거든요.
이기적이라는 말은 내가 나쁘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와 조금 다르다는 뜻이에요.
내가 틀리고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한끗 다른거에요.
그 한끗을 돌리기만 하면 기다림은 땡! 하고 끝이 나는거죠.
(쉬고)
솔직히 우리는 뭐가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이게 내 이기적인 마음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직접 작업을 하시는거에요.
돌이킬 수 있도록 그리고 그 한끗을 돌려 맞추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시는거에요.
(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복의 근원. 출발점이 될거야"라고 하셨어요.
아무리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영향력이 좀 있었다고 해도, 솔직히 모든 사람이 알만한 이름과 복의 출발점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진짜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분의 선포가 정말 한참 그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 이루어졌어요.
한 사람. 아브람의 신앙 위에 한 민족이 세워지기 시작했어요.
그가 가진 신앙.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공동체를 이루고 집단을 이루고 나라가 세워지죠.
이스라엘은 광할한 아라비아 사막과 드넓은 지중해를 잇는 딱 그 지점에 있어요.
고대 세계의 중심지에 있던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땅도 작아요. 힘이 있는게 이상한 나라에요. 그런데 그 곳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니까 계속 번성하고 커져가요. 하는 싸움마다 다 이겨요.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주위 나라들이 그 작은 나라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거에요.
(5초 쉬고)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이 말은 단순하게 사는 곳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해라! 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그가 떠나야 할 장소와 공동체를 분명히 말씀해주셨어요.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쉽게 말해 손절하라는 거에요. 손절하는 것처럼 미련 갖지 말고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쳐내고 나가라. 라고 하시는거에요.
아브람이 그렇게 했을까요?
떠날 때 조카 롯 살림살이와 소유물을 다 챙겨서 갔어요.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셨던 것은 모든 것을 다 놓고 그대로 일어나 하나님만 믿고 떠나는 것 이었어요.
(쉬고)
그렇게 아브람의 첫 시작은 완벽하지 못한 순종이었어요.
가나안으로 대략적 방향만 맞추고 이동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하란 그 이상으로 가지 않았어요. 11장에 보면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조카 롯과 아브람과 동생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하나님은 아브람의 가족이 아브람이 길을 떠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데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을 아셨어요. 그래서 그들을 다 떠나라고 하신 것이죠.
고대 비문을 보면 하란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었어요.
주요 무역로였어요. 모든 문물과 사람들이 이 도시로 모여요. 물질적 풍요와 부를 축적할 기회가 있는 곳이자, 달의 신을 예배하는 장소였어요.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나서 생각과 삶의 태도의 변화가 있었지만 다른 가족들은 아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이 더 나아가는데 있어, 그곳을 떠나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라고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죠.
당신의 믿음 그리고 여정
당신의 믿음 그리고 여정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세였더라"
아브람의 믿음이 성숙해지고 커지기 시작한 시점이에요. 결과를 알고 있는 아브람의 모든 여정의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에요.
하나님은 그가 완전히 순종하지 않고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그 분은 지금 우리에게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세요.
그 믿음이 작더라도, 우리가 반응하는 그 모습이 작고 미약하다 해도, 괜찮다는 거에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다 받아드리고 수용해주시겠다는 거에요.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겠다 말씀하세요.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죠.
하지만 하나님은 기다리시는거에요.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그 때까지 기다려 주시겠다는거에요.
(쉬고)
필라테스나 요가 이 두 가지는 내근육. 속근육을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의 시간은 바로 필라테스처럼 우리의 속근육. 보이지 않지만 뼈대와 기본이 되는 속믿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거에요.
제 주위에는 윗몸 일으키기 못하는 사람 있는데, 코어가 약해서 그래요. 코어가 강해질 수록 윗몸 일으키기 뿐만 아니라 버틸 수 있는 힘도 강해져요.
(쉬고)
하나님은 우리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믿음의 코어가 강해질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그것이 궤도에 올랐을 때 응답과 복을 주시는거에요. 그래야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누릴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 것을 온전히 받아 누릴 수 있을 때까지 미루시며 기다리고 계셔요.
아브람은 그것을 깨닫고 나의 것으로 받아드리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어요.
드디어 “일어나 하란을 떠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출발"했거든요.
(쉬고)
한마음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아브람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고 계셔요.
정말로 내 삶의 방향이 하나님에게 맞춰지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네가지가 있어요.
(쉬고)
첫째, 신중하게 혹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보는거에요.
나태함은 우리의 삶을 낭비시켜요. 나태함은 움직이지 않는거에요. 내 안에 생겨나는 열정을 꺼버리는 역할을 해요.
그 나태함이 여러분에게 있었다면,
내 열정을 꺼뜨리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 나태함을 지워버려야 해요.
나태함을 지우는 방법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하는거에요.
“하나님 당신의 뜻으로 저를 인도해주세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겠지만 이 문장 꽤나 아니 굉장히 강력한 문장이에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해달라고 신중하게. 제대로. 진지하게. 열정적으로 기도한 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에요.
순간 순간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세요" “그렇게 살게요"라고 기도는 하지만, 정말 그렇게 살기 위해 매일 치열하게 고민하지는 못했던 순간이 더 많거든요.
우리는 이 문장을 진지하게 고백하고 곱씹어야 해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해달라 신중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고백하는거에요.
“하나님 당신의 뜻으로 저를 인도해주세요"
(쉬고)
둘째, 낯선 도전을 주셨을 때 반응하는거에요.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쉬운 선택. 쉬운 길. 크고 넓은 길은 없어요.
아브람은 단기적으로 손해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해서 정든 곳을 떠났어요.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이 주신 사랑에 보답하고자 한다면 반응해야 해요.
우리에게 다양한 상황들을 주실 때, 어떤 반응을 하며 살아가고 계셨나요?
낯선 도전에 반응하려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반응하려면 내 욕심, 내 마음을 희생해야 해요.
나의 것을 뒤로 하고 일어나 떠나야 은혜를 누릴 수 있어요.
내가 원하는데로 삶이 진행되지 않아도, 무엇인가 답답한 일이 자꾸만 일어날 때 그 문제에 얽매여서는 안돼요.
(쉬고)
과거를 생각하거나,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문제만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낯선 도전에 절대 반응 할 수 없어요.
아브람처럼 쥐고 있는 것을 내려두고,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없어요.
우리는 이미 아브람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그것을 믿는다면, 과거나 현재의 문제를 바라보고 낙심하지 말고, 삶으로 반응하며 부딪치며, 일어나 떠나 앞으로 걸어가야 해요.
(쉬고)
셋째, 순종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없는가 돌아보세요.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너무 많은 사람과 의견을 나누거나, 끝도 없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순종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증거에요.
순종을 복잡하게 만들고 반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해야 하는 것은 아는데,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그 이유를 넘어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기 때문이에요.
고난을 당하거나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 희생할 필요가 없는 순종의 방법을 바라기 때문이에요.
위험을 내켜하지 않고, 결정을 미루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순종을 복잡하게 이리저리 꼬아가면서 하지 않고 미루고 있는거에요.
(쉬고)
마지막,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것에 집중하세요.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여러분 마음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불순종의 모습들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을거에요.
순종하기 싫어서 계속 외면해왔던 것들이 떠오를 때가 있을거에요.
(쉬고)
불순종과 외면의 순간이 왜 나타나는 줄 아세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위해 나의 것을 포기해야 하고, 손해봐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니까, 불순종하고 외면하고 돌아서려고 하는거에요.
(쉬고)
하나님의 손길에 집중하고 받아드리세요. 그리고 붙잡고 일어나 떠나세요. 그것을 위해 한걸음 내딛으세요.
제대로 순종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걷다가 ‘이게 아닌데, 제대로 가는거 맞나?’라고 생각해도 괜찮아요.
그런 생각하는 것 당연한거에요.
왜냐하면 제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마귀가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불안과 불신을 심으면서 걷지 못하게 하는거에요.
하나님은 완벽한 순종을 바라지 않으세요.
순종하는 그 작은 몸부림.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을 주목하세요. 그리고 그 반응을 기다리며 사랑과 약속을 파기하지 않고 붙들고 계셔요.
우리가 부르심에 반응하면 그 순간 낚아 올리실거에요.
(쉬고)
아브람이 일어나 떠났어요.
떠나고 나서야 보게 되었어요.
떠나기 전엔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계획을 보고 확신하게 되었어요.
우리도 일어나 떠나야 해요.
그래야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말도 안되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될거에요.
(쉬고)
누구보다 이 네가지를 잘 해오신 분들이 여기에 계신 한마음 가족들이라 생각합니다.
삶의 어려운 순간마다, 고비마다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내셨던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잘 살아내신 분들이 여러분들이라 저는 믿습니다.
(5초 쉬고)
지금까지 잘해오셨던 것처럼, 누려왔던 모든 은혜들이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현재와 내 미래의 기쁨과 소망이 될 수 있도록 이 네 가지를 꼭 기억하며 살아가는 한 주 되길 소망합니다.
신중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진지하게 “하나님 당신의 뜻으로 저를 인도해주세요" 고백하세요.
낯선 도전 앞에 반응하세요. 내가 손해보는 길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기꺼이 손해 보는 것을 택해주세요.
순종을 복잡하게 만드는 행위를 멈추는거에요. 답을 알면서 스스로 꼬지 않는거에요. 다른 사람에게 묻기보다 하나님께 나아가주세요.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것에 집중하세요. 순종하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이면 충분합니다.
이 네가지를 꼭 기억하며 살아가는 저와 한마음 가족 모든 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