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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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렇게 고백해 보겠습니다.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복음인 예수님이 내 삶에 아름답게 일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우리 모든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최근에 기쁜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모두 세상을 사는 동안 기쁜 일이 많았으면 합니다. 또한 평안하기도 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녹녹하지 않습니다. 상황과 환경에서 기쁨과 평안을 찾을 수 있기보다는 불안과 고통과 슬픔을 더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기쁨과 평안이 상관이 없고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말 성경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가 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2장 21절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유대인들은 태어나서 할례를 행한 후 8일이 지난 후 아이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때 보통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게 되는데 천사가 이야기한 대로 이름을 짓습니다. 뭐라고 짓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예수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가 구원하신다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예수님의 이름 자체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죄악을 구원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날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오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내가 소중한 존재입니까? 이것을 깊이 알면 정말 세상에 주눅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번 고백해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김세현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반복적으로 이 고백을 했는데 얼마나 가슴이 벅찬지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않고, 모두 나를 힐난하기에 바쁘다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누가복음 2장 22절입니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에 이름을 짓고, 정결 예식을 행하기 위해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정결 예식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마리아를 위해 행해지는 예식입니다. 이 당시 아이를 출산하면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을 땅에 흘렸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어떻게 드립니까?
누가복음 2장 24절입니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본래 속죄제를 드릴 때는 양을 드리도록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의 부모님은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형편이 되지 않는 경우 드릴수 있는 비둘기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법대로, 율법에 이런 말이 많이 나옵니다. 왜 이런 단어를 많이 쓸까요? 한 가지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을 완전하게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의 부모님도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모님이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하지 않는다면,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완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를 택하셔서 예수님을 그곳에 두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23절입니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이 문장의 배치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건에 관해서 기술할 때 더 중요한 것을 앞에 기록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예수님의 가족들이 헤롯 성전에 오게 된 중요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맏아들로 태어난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들이 밟는 예식을 다행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 예식에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인간으로 돌아가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는 착각하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가 없기에 돌아가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지금 아이가 태어나면 밟는 모든 과정을 예수님이 받으셨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온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철저하게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은혜가 됩니까? 예수님은 철저하게 한 인간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는 죄를 사함을 얻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죄는 오직 인간이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지금 모든 인간의 한계로 발생하는 의식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누가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족에 머물렀던 렌즈를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제일 먼저 시므온이라는 사람에게 돌립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 있었다고 이야기합니까?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말은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성전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는 보통 성전이라고 하면 성전 안을 생각하기 쉽습니다.여기에서 시므온과 후에 나오는 안나 선지자가 있었던 곳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을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그림을 보여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이 바로 헤롯 성전의 그 당시 모습입니다. 저기 금테를 두른 건물이 바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성전입니다. 성전이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는 저렇게 성소와 지성소를 포함한 뜰로 불리는 모인 곳까지 포함합니다. 그림을 잘 보시면 니가노르문이라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저 문이 사실상 매우 중요합니다. 통과하면 이스라엘의 뜰이 나옵니다. 저기에는 여자들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곳은 남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잘 보시면 이스라엘의 뜰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여인들의 뜰인 곳은 매우 큽니다. 여인들의 뜰은 여인들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정결 예식도,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도, 또한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님을 만나는 일도 말입니다. 잘 보시면 놀라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인의 뜰이라 불리는 저 모양 어디에서 많이 본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문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인지 하나님의 계획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아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려진 예수님이 어떻게 되십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하나님께 바쳐진 여인 뜰의 모양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참 놀라운 부분입니다.
누가복음 2장 26~27절입니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은 몇 살인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사람이 오랫동안 여인의 뜰에 뒤나 들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뜰을 잘 보시면 알다시피 광장입니다. 그러기에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생활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결국 이 시므온은 자주 이 여인의 뜰에 뒤나 들며 기도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시므온이 집에 있을 때 성령이 감동을 주십니다. 빨리 성전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시므온의 성령을 인도하심을 받아서 항상 기도하기 위해 간 여인의 뜰에 갑니다. 그때 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질문을 하나 해볼 수 있습니다. 여인의 뜰에서 정결 예식을 행하고,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는 이 일이 처음일까요? 아닙니다. 자주 있었던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시므온이 여인의 뜰을 뒤나 들다 우연히 이 광경을 본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성령이 말씀하셔서 그 지시함을 따라 여인의 뜰에 들어갔다가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부모를 만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28~29절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아주 놀라운 모습입니다. 시므온은 정중하게 아이를 안아 보아도 되냐고 물었을 것이고, 그렇게 허락을 받아 아기 예수님을 안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 아기를 안자, 성령이 마음에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가 메시아라고 말입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도다” 이 고백이 어떻게 들립니까? 이 말을 종합하면 지금까지 시므온은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아십니까? 지금 시므온이 어디에 살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의 뜻은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지금 평화가 없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파견한 헤롯은 폭정을 저지르고 있고, 이것에 대해 어떤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 중 말씀을 가까이한다는 사두개인들은 권력에 착 붙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유대인은 평안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매일 눈을 뜨면 헤롯이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한 건축물을 건축하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려면 돈을 내야 하니 하루 종일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제대로 평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는 말은 시므온 개인의 고백이며, 유대 땅에 사는 자들에 대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합니까? 평안히 놓임을 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므온 개인이 겪는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본래 어떤 존재였습니까? 우리는 평안을 모르고 사는 존재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 안에 있던 우리들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종이 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닌 것입니다. 이런 삶은 정말 죽어야만 끝이 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죽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는 마귀에게서 놓임을 받습니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평안이라고 하면 그냥 순탄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평안은 다른 말로 화해입니다. 우리는 본래 어떤 존재였다고 성경은 증거합니까? 말씀을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5장 10~11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우리에 대해서 바울은 원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원수였습니까?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마귀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들은 제대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합니까? 세 번이나 화목하게 되었다는 말을 바울은 합니다. 그 뜻은 완전하게 화목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2장 36~37절입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여인의 뜰에서 예수님을 만난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를 소개하면서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시므온과 다르게 안나에 관해서 소개가 깁니다. 그 말은 이 안나는 유력한 가문의 딸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비밀을 숨겨 놓습니다. 아셀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누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축복과 은혜를 나타낸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생각해도 안나라는 사람은 너무 축복받은 인생을 살았겠다. 그려지지 않습니까? 정말 그랬을까요?
놀랍게도 그의 인생은 지파나 아버지의 이름의 뜻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보통 여인들이 결혼하는 나이에 결혼했습니다. 대략 14세 정도에 말입니다. 모두가 그렇듯 아름다운 부부생활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녀가 남편과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시간은 고작 7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과부로 산 세월이 팔십사세입니다. 이것을 다 더하면 안나의 나이가 104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그런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성전인 것도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여인의 뜰이라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말은 아침저녁으로 여인의 뜰에서 금식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시므온과 같이 집이 없이 성전을 집 삼아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여인의 뜰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이렇게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잘돼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84년의 과부 생활이 뭡니까? 하고 말입니다.
누가복음 2장 38절입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그날도 여느 때도 같이 안나는 여인의 뜰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바치는 예식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이 매일 기도한 후에 선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며 매일 이 일을 한 안나가 예수님을 앞에 두고 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안나는 단번에 아기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았습니다. 감사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중앙에 두고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속량입니다. 이 땅이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마귀에게 놓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바로 속량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대가를 지불하고 어떤 사람을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죄에서 마귀에게서 놓임을 받은 것은 공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신 결과입니다. 그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아들을 허물과 죄로 죽어가는 우리를 대신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어떻게 갚겠습니까? 도저히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것이라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평화와 기쁨이라는 것은 그냥 쉽게 빼앗기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너무나 쉽게 상황과 환경을 통해 평화를 빼앗기고 맙니다. 기쁨을 잃고 맙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자꾸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찾아왔는가? 하는 것을 잊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말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안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끼친다는 말의 뜻은 두고 간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이 땅에 놓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놓고 간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그 보상의 대가로 놓고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평안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왜 돌아가셨는가? 하는 것을 잊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힘든 일도 많고 괴로운 일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주어지는 엄청난 복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잃어버리지 않는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혹시 기쁨과 평안을 잃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선혈 속에 영원한 기쁨과 평안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결단의 찬양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