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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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25
미국의 하버드대학이라고 하면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명문대학 아닙니까? 이 하버드 대학은 1636년에 당시 신대륙이었던 아메리카로 이주해 온 청교도들에 의해 설립되었는데요. 그 청교도들이 이주해온 해를 기준으로 하면 16년 만의 일이었고, 하버드대에 위치한 메사추세츠로의 이주를 기준으로 하면 불과 6년 만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참 대단한 일 아닙니까? 서울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주해 온 것도 아니고 대서양을 건너 이주해 온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겠어요? 당연히 그들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공간이 먼저 필요하지 않겠어요? 의식주가 안정된 다음에 대학이든 교회든 세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신대륙에 건너온 청교도들은 그들이 살아갈 공간보다 앞서서 대학을 세웠는데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청교도 정신을 가진 목사를 양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하버드대학의 로고는 라틴어로 ‘진리’라는 뜻을 가진 Veritas인데요. (화면-하버드대학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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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서 보시는 것처럼 Ve-ri-tas가 세 권의 펼쳐진 책에 나누어 적혀 있는 것과는 달리, 처음 이 문장이 만들어졌을 때는 ‘tas’가 적힌 세 번째의 책은 원래 덮여 있는 로고였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은 한계가 있으며, 세 번째 책의 지식은 오직 성령의 빛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데요.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인 ‘부활’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부활이야말로 오직 성령의 빛으로만 얻을 수 있는 세 번째 지식인 것입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래서 오늘은 사도신경의 이 부분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창시자의 무덤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에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해마다 수백만의 무슬림들이 그 무덤에 가서 참배를 하고 있고요.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화장을 했습니다. 그때 나온 석가모니의 사리를 인도의 여덟 개 지역으로 보내서 탑을 쌓았다고 하는데요. 그 후에 백 년이 지나자 여덟 개의 탑을 해체하여 사리를 84,000개로 나누어 전국에 그 숫자만큼 사리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탑은 바로 석가모니의 무덤인 셈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지만, 그것조차도 아무것도 없는 빈 무덤 아닙니까? 사도신경은 그 이유를 예수님이 죽으신 지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데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이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성과 지성만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이 사실을 부정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는데요.
대표적인 세 가지로는 먼저 제자들에 의해 시신을 도적맞았다는 ‘도적설’이 있고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게 아니라 고통이 너무 심해 기절하셨다는 ‘기절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기절하셨다가 동굴 같은 무덤에서 다시 기력을 찾으셔서 깨어나셨다는 겁니다.
또 어떤 이들은 ‘환상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제자들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집단적으로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분명히 부활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 합독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죽은 사람들을 뜻하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합니다. 첫 열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 열매를 맛본 사람들은 이제 다음 열매가 열릴 것을 알고 기대하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역시 죽음에서 부활할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이자 약속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는 예수님께서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을 말하면서 바로 부활하셨다고 고백하지 않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나셨으며”라고 합니다. “장사되셨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사도신경의 원문과 영어버전을 보면 우리 말 버전에는 없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음부에 내려가셨다” 영어로 ‘into hell’이라는 표현입니다. 말 그대로 “지옥에 내려가사”라는 뜻이죠.
여러분, 이 표현이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나라의 사도신경에는 다 들어 있는데 오직 우리나라 사도신경에만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에 빌리자면, 1908년에 찬송가를 만들면서 찬송가 표지 안쪽에 사도신경을 기재했는데요. 그때부터 일부러 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옥이나 음부같은 단어가 우리 민족이 가진 ‘저승’에 대한 정서와 비슷해서 뺐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옥에 내려가사’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존재하는데요. 구약에서는 이 지옥을 ‘스올’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신약에서는 ‘음부’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무덤, 죽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무덤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50번에 이에 대해 이렇게 질문하고 답하고 있습니다. (화면)
문50 :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어떻게 낮아지셨습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신 후에 장사[매장]되셨고,
제 삼일까지 죽은 자의 상태로 사망의 힘에 눌려 계셨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그가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표현했습니다.
죽으신 후에 무덤에 내려가신 상태, 즉 죽음의 힘에 꼼짝없이 묶여 계시는 것이 바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의 의미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죽음의 고통’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 2:23~24 새번역
23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기 위해 ‘성육신’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죄인인 우리가 가야 할 마지막 자리인 무덤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들어가기만 하신 게 아니라, 죽음의 고통에 묶여 계셨던 것입니다. 음부에 갇혀 계셨습니다. 죄 때문에 죽으셔야 했고, 그 죽음의 권세에 갇힌 가련한 죄인들을 풀어주시기 위해 그 ‘음부’ 곧 죽음 끝까지 내려가셔서 친히 갇히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으시고 동시에 거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죠. 그러니 이 ”장사된지 사흘 만에“가 얼마나 중요한 고백입니까?
그런 차원에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봐야 하는데요. 우리가 복음이라고 말을 할 때 꼭 포함해야 할 핵심적인 두 개념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아닙니까?
십자가가 은혜의 상징이라면, 부활은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3에서는 이 둘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베드로전서 1:3 새번역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면 부활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로마서 4장 25절은 이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로마서 4:25 합독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여기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결과는 죽음이고요. 죄가 죽음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지를 못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1:15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여러분, 죄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17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아담이 하와와 함께 선악과를 먹게 되면서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로마서 5장 12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12 합독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은 죄와 죽음, 심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가 죄인인 셈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까요? 히브리서 9장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9:27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는 것으로 인생이 끝난다면 저 역시 굳이 이렇게 부담스러운 설교를 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사망을 피할 수 없고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예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이렇게 살다가 죽어서 심판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진시황제처럼 죽음이 두려워 불로초라도 찾아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첫 열매는 반드시 두 번째, 세 번째 열매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산 소망을 주셨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차원에서 오늘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이 고백을 통해 우리가 두 가지의 포인트에 집중했으면 하는데요.
그 첫 번째는 사도신경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라고 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성경적인 표현인데요.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죽은 자 가운데서의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곳곳에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28:7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사도행전 4:10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마지막으로 로마서 6:9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죽음에서의 부활이 아닌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부활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사순절 묵상집 첫째날 묵상글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우리는 더이상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과 부활의 길에 있습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부활의 은혜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그래서요, 여러분! 예수 믿고 죽는 것을 복된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4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요. 유튜브 영상을 통해 너무나 아름다운 임종예배를 보면서 가슴 설레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소천하신 분은 캐나다에서 목회를 하시던 조영택 목사님이라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그 아들이신 조준모 목사님은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이라는 유명한 CCM를 작곡하신 유명 찬양단체의 찬양 인도자 출신 목사님이시고요. 따님이신 조은아 교수님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복음성가를 작곡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이제 임종 하루 전에 부인을 비롯한 자녀 손주들이 다 모여서 침대에 누워계시는 아버지 목사님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아서 아침부터 천국으로 환송하는 예배를 그렇게 아름답게 드리는 거예요. 한국에 있는 손주들은 현장에 참여할 수 없으니까 화상채팅으로 참여하면서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사위들도 기도문을 읽어 드리고 찬송을 계속 부르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만지고 서로 애틋하게 웃는 얼굴로 마지막 임종예배를 드리는데요. 저는 너무 부럽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그 영상을 다 보면서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제 몇 시간에 걸쳐 임종예배를 다 드린 자녀들이 ‘아버지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하는데, 그 목사님께서 가만히 계시다가 두 손을 높이 들더니 ”하나님, 저는 행복합니다. 이제 더 할 게 없지“ 이러시는 거예요. 너희들 ‘형제들끼리 서로 우애하며 잘 살아라’ 하지 않고 “하나님, 저는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여러분, 제가요. 그 영상을 보면서 이 땅에서의 제 마지막 모습이 저랬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소망이 없으십니까? 죽음이 곧 닥쳐올 것을 알고 계시거든요. 내일이면 소천하실 분이 어떻게 “저는 행복합니다. 더 할 게 없지” 어떻게 이런 고백할 수 있는 거죠? 왜 자녀들이, 믿는 자들의 마지막이 슬프지 않고 찬양을 부르고 웃으면서 보내드릴 수가 있는 걸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믿는 사람, 이 땅에서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고 자신이 부활의 다음 열매임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을 믿는 자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불신앙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가장 불쌍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심판이 아닌 “저는 행복합니다” “더 바랄 게 없지” 하면서 산 소망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마지막 두 번째로 부활에 대해 알아야 할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어떻게 죽은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을까?”하는 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알아서 자신의 힘으로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3:32-34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여기서 바울은 죽음을 이겨낸 힘의 근원이 예수님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웅적으로 활약해서 얻은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아들을 일으키심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김으로써 구원의 정점에 이르고,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그를 일으키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로 삼아주셨습니다. 로마서 8:11 새번역
11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그 영생으로 인해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을 남겨두는 부활이 아니라 죽은 자들과 함께하는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제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요. 저와 신학교 동기인 목사님이 전북 임실이라는 시골에 담임목사로 청빙이 되어서 제가 축하도 해주고 교회가 궁금하기도 해서 혼자 차를 운전하고 동기 목사 교회를 찾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으로 주소를 검색해서 한창 가고 있는데, 거의 다 왔는지 시골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대로 가면 되겠지’하고 있는데, 저 앞에 ‘임실 오수 방면’이라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안내해 주는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보니까 도로가 완공되는지 얼마 안 된 완전히 새로운 길이었어요. 터널을 뚫어서 지름길을 만든 것 같아요.
제가 원래 길눈이 어두워서요. 저는 정말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대로만 가거든요. 그래서 저는 찬송가도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이런 곡만 좋아해요.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성경도 소경이었던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말씀에 그렇게 은혜를 받고 막 이러는데요.
그런데 그날은 제가 무슨 용기가 났는지 ‘이 새로난 길이 맞다’는 확신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래서 내비게이션은 우측으로 나가라고 안내하는데, 그냥 죽 직진해서 터널까지 들어갔습니다.
막 어두운 터널을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내비게이션만 난리가 난 거예요.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자기가 볼 때는 길이 아닌 데로 가고 있으니 큰일이 난 거죠. 계속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그러다가 포기했는지 결국에는 잠잠해졌지만요.
여러분, 제가 그날 묘한 경험을 했잖아요? 그 새 길을 달리면서요. 내비게이션 화면을 보는데, 원래 터널을 지날 갈때는 터널 표시가 되어있잖아요? 이제 막 개통한 길이고 업데이트가 안된 내비니까, 제 차가 산을 그냥 넘고 있더라고요. 조금 더 가니까 하늘을 훨훨 날아가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논을 그냥 통과하는 장면도 나왔습니다. 길이 없는 곳인데 거침없이 가고 있는 거예요. 제가 제 눈으로 보면서도 참 신기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부활이 꼭 그렇습니다. 인간의 내비게이션에는 막다른 산이고, 막다른 죽음이지만, 사람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이것이 부활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내신 부활의 길입니다. 저처럼 길눈이 어두운 사람도 안 보이던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되면요. 확신이 차오르고 그 어두운 터널을 신나게 달릴 수 있습니다. 무덤을 넘고 죽음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죠.
많은 분들이 “부활? 그런 게 어디 있어? 죽으면 끝이지?”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이해가 가요. 왜냐하면 아직 새롭게 난 길을 보질 못하셨거든요. 인간의 내비게이션에는 아직 이 새로운 길이 업데이트가 안 되어서 그러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내비게이션에 나오지 않는다고해서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의 믿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만 업데이트해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믿음도 업데이트하셔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로마서 10장 9절을 함께 읽고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0:9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할 때, 비록 연약하고 죄 많은 인생이지만, 우리를 영광스러운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저와 우리 교우님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살아계신 주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실 때,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부활의 산 소망을 간직하시길 원합니다. 그 조영택 목사님처럼, 내일 임종을 앞두고도 “나는 행복합니다. 더 바랄 게 없지” 하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진짜 부활의 산 소망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이런 마음을 담아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많이 듣고 또 믿지만, 우리 역시 이 땅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고 훗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믿는 우리의 신앙의 업데이트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의 믿음.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부활 신앙을 소유하는 것! 주님, 우리에게 이 산소망이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이론으로만 부활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제자들처럼 바울처럼 부활을 직접 경험하고 삶 속에서 고백되어져 가는 그런 복음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함께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을 주인으로 시인하고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