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이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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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체험이 주는 교훈
말씀: 벧후 1:16-20
2019-11-10
(벧후1:16)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려 줄 때에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며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벧후1:17)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께 나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벧후1:18) 하늘로부터 나온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들은 것이니라.
(벧후1:19) 또한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벧후1:20)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은 결코 어떤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오늘날 우리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어떻게 인내하고 기다리며 교회에서 함께 할수 있을까요?
이런저런 간증으로 드디어 주님을 만났다고 간증하고 드디어 좋은 교회를 만났다고 간증하고 영원히 함께할 것 같은 가족들이 오래지 않아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17:1)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취해 따로 그들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사
(마17:2)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그분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분의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아기로 이땅에 사셨고 어린아이가 되셨다가 점점 자라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33년 반 동안 이땅에 계시는 동안 딱 한 번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 되셨습니다.
딱 한 번 자신의 겉 모습을 거둬내고 그 안에 영광된 모습습을 자신의 세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모습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들은 높은 산에서 주님이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목격하게 된것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왕이신 예수님이 이땅에 내려오시기 전의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마17:3) 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분과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이들이 모세와 엘리야 인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세 명의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인것을 알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17:4) 그때에 베드로가 응답하여 예수님께 이르기를,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온즉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게 하옵소서, 하더라.
여기서 베드로의 관점이 재미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이 자리에 있게 된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자신이 함께하게 된 것이 뭐가 좋은 일일까요?
주님이 하시는 일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기심과 자기 중심적인 생각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선포하고 모든 지체가 주님의 말씀대로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다른 지체를 섬기고 있는데
우리는 내가 이자리에 있는 것이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설교에 감사한 것이 아니고 좋은 프로그램으로 자신을 성장시켜주셔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이런 설교가 있는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만남을 가졌는데 그 만남이 끝나고 난 뒤에 베드로는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장막 셋을 짓되”
베드로의 문제는 여기서도 여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학교만 다녀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수 있고 그분이 모세와 엘리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예수님이 변화되어서 광체가 나고 영광이 드러나는 장엄한 장면을 보고도
영광의 주 예수그리스도와 대언자 모세와 엘리야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 세분에게 똑같이 장막 셋을 짓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대언자 중에 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저 위대한 인간의 하나로 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신 분이신데 베드로는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예수님이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장엄한 체험이 베드로에게 깨우쳐주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영적으로 만들어주지도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기분을 좋게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를 흥분되게 만든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가 우리와 별다른 믿음을 갖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마17:5)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보라, 그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므로
지금 또 다른 놀라운 장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 제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이들에게 말씀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었다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목소리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만들어진 소리입니다.
베드로와 두 제자는 엄첨나게 놀라운 장면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눈으로는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 영광중에 빛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고 자신들의 귀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자신들이 들을 수 있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로…
(마17: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날 때까지는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왜 이들에게 자신이 부활하기 전까지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의 사역을 완수하고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지 않으면, 그리고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이 목격한 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변화산의 사건을 체험한 이후에 예수님은 여전히 이들 세 사람을 믿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17:10)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하나이까? 하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엄청난 상황을 목격하고 예수님에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려오면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하고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노래하고 예수님의 신성에관해서 설교를 듣고 나오면서 다른 사람에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이상하지 않을까요?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했다면 지금 엘리야의 이야기를 언급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대해서 이야기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바로 몇 시간 전에 이 사람이 내 아들이다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다 예수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려오면서
예수님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엘리야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들이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이 들을 수 있게 예수가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들은 듣지 않은 것입니다.
변화산의 체험은 이들 세 제자들에게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깨닫게 해 주지 못한 것입니다.
20절로 이동…
앞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이 미쳤다고 고쳐달라고 주님께 옵니다.
그리고 내가 이미 제자들에게 데려갔지만 그들이 고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고
제자들은 자신들은 왜 고치지 못했는지를 주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17:2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로다. /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에게 만일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을진대 너희가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 너머로 옮겨 가라, 하면 그것이 옮겨 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로다”
여러분은 자주 내가 어떤 기적을 보면 믿겠다고 말하곤 하지 않나요?
이들은 어떤 가요?
우리가 볼수 있는 최고의 기적과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은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다고 말하십니다.
우리는 불이 타오르는 듯한 체험을하고 온몸이 경련으로 휩싸이고 경련이 일어나는 체험을 원합니다. 때로는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마가복음에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막9:2) ¶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취해 따로 그들을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사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막9:3) 그분의 옷이 빛나며 땅 위의 어떤 세탁공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눈처럼 매우 희게 되었더라.
마태복음과는 다르게 “눈처럼”이라는 표현이 들어있습니다.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에서 “눈처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눈을 본적이 있는 사람에게도 그 의미를 전달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눈이 하얗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막9:4) 거기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고 그들이 예수님과 이야기하거늘
(막9:5) 베드로가 예수님께 응답하여 이르기를, 선생님이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온즉 우리가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선생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게 하옵소서, 하니
(막9:6) 이는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더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면 그냥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될텐데 아무말이나 하게 된다는 것이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할말이 없으면 그냥 입을 다물면 됩니다.
(막9:7) 거기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그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므로
(막9:8) 그들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오직 자기들과 함께한 예수님 외에는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막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하사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 때까지는 그들이 본 것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시니
(막9:10) 그들이 그 말씀을 자기들끼리 간직하며 서로에게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묻더라.
10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지금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원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들이 어떻게 죽은 자들로 부터 일어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걸까요?
(막9:30) ¶ 그들이 거기를 떠나 갈릴리를 지나가는데 그분께서는 아무도 그것을 알기를 원치 아니하시니
(막9:31) 이는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매 그들이 그를 죽일 것이요, 그가 죽임 당한 뒤에 셋째 날에 일어나리라, 하셨기 때문이라.
(막9:32)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하신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분께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지금 우리 모두가 일고 있는 것은 이들 세 제자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안수를 받고 쓰러지고 머리를 쳐서 쓰러뜨리고 온몸을 부르르 떨고 방언을하고 성령의 불이 떨어진다고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모르고 어떻게 구원받는지도 모르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들의 체험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면 체험이 느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귀가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을 모아 놓고 찬양을 하고 소리를 지르게하고 주님이 뜨겁게 여러분의 가슴에 내려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복음을 모르고 있다면 그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그들은 체험을 통해서 이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눅9:28) ¶ 이 말씀들을 하신 뒤 여드레쯤 되어 그분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취해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더라.
(눅9:29) 그분께서 기도하실 때에 그분의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분의 옷이 희게 되어 눈부시게 빛나더라.
“눈부시게”
다양한 표현으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눅9:30) 보라, 두 사람이 그분과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더라.
(눅9:31) 그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서 앞으로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셔야 할 그분의 별세에 관하여 말하였으나
(눅9:32) 베드로와 또 그와 함께한 자들은 깊이 잠드니라. 그들이 깨어나서 그분의 영광과 그분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베드로와 또 그와 함께한 자들은 깊이 잠드니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누가복음에 있습니다.
가톨릭의 첫 번째 주교라고 주장하는 베드로가 이 중요한 부분에서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에서 베드로와 두 제자가 잠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중요한 장면을 보다 말고 잠들어 버렸다면 발로차서 내쫓아 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몇 백년간 들을 수 없었고 그 후로도 이천년간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에서 잠들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중요한 설교를 하는 순간에 관심을 잃고 잠들어 버리진 않나요?
그랬던 저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눅9:33) 두 사람이 그분을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르기를, 선생님이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온즉 우리가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선생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게 하옵소서, 하나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알지 못하더라.
(눅9:34) 그가 이렇게 말할 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므로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서 두려워하거늘
(눅9:35)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더라.
(눅9:36) 그 음성이 지나가매 예수님만 홀로 보이더라. 그들이 그것을 비밀로 하고 자기들이 본 그것들 중 어떤 것도 그 당시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니라.
다시 한 번 상황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있고 엘리야가 그 옆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드러나 계십니다.
(눅9:37) ¶ 이튿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맞더라.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46절로 가보겠습니다.
그 사이에 마귀들린 아이를 치료하시고
자신이 죽음에 넘겨질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만 깨닫지 못합니다.
(눅9:46) ¶ 그때에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자인가 하는 일로 논쟁이 그들 가운데서 일어나매
놀랍지 않나요?
제자들이 자기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자인지를 논쟁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주님을 높이는 설교를 수십번 들었는데
성도들은 여전히 관심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이 전적으로 예수님만을 위해서 교회에 모이지 못하는지를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도 여전히 자기들에 관한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오신다면 그 대답은 이 교회는 여러분을 위해서 준비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여러분이 주님께 살아있는 희생물로 드려지기 위해서 준비된 곳입니다.
이 교회는 여러분이 거룩하게 구별되어서 즐겁게 즐기는 곳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지 아시나요?
그들은 교회에대한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오기때문입니다.
자신들에 관계된 무엇인가를 찾기 때문입니다.
신약교회에대한 역할을 여러분이 교회에서 다른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포기해야 하고 희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기대입니다.
신약교회의 교리 어느 것도 여러분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모이는 것은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말하고 배우는 곳입니다.
교회에 오는 분이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누군지 아시나요?
자신이 왕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경험한 체험정도라면 그들의 삶이 바로잡혀야 하지 않나요?
이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죽음을 당하고 살아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질문은 하지 않고 자기 들끼리 모여 앉아서
우리중에 누가 새신자 반을 맞기에 적합한지를 가지고 논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설교를 잘하는지…
누가 회장을 맡아야 하는지…
(눅9:51) ¶ 그분께서 위로 올려져서 영접 받으실 때가 이르매 친히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자기 얼굴을 고정하시고
(눅9:52) 사자들을 자기 얼굴 앞에 보내시니 그들이 가서 그분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니라.
(눅9:53)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듯한 얼굴이므로 그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관심이 없어합니다.
(눅9:54) 그분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이르되,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 같이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저들을 멸하도록 우리가 명령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거늘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이들이 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마리아 마을로가서 예수님의 사역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가 이들을 죽여버리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 전하다가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무례하게 굴고 전도지를 받지 않고 받아도 찢어버린다고
여러분이 모여서 이들을 하나님께서 죽여달라고 기도한다면 어떨까요?
이들이 보여준 행동이 성령의 열매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변화산에서 하나님께서 내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했는데
이들은 엘리야에게 부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명령과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해라 원수를 사랑해라..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엘리야처럼 불로 자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빨리 떠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변화산에서의 체험이 이들에게 어떤 변화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과 부활을 믿게 되었고 그러자 성령님께서 그에게 들어가셨습니다.
그 성령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변화산 사건에 관한 아주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벧후1:16)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려 줄 때에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며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벧후1:17)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께 나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벧후1:18) 하늘로부터 나온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들은 것이니라.
베드로가 체험한 것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벧후1:19) 또한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벧후1:20)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은 결코 어떤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주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네가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보는 체험을 하는 것과 기록된 성경을 갖는 것중에 성경을 갖는 것이 더 확실한 말씀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읽는 것이 네 눈으로 예수님을 목격하는 것 보다 더 확실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하는 것보다 성경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읽고 읽고 또 읽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변화산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의 무덤이 열리고 무덤이 빈 것을 목격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읽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그리스도와 어떻게 다른 분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내용이 성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했다고 해도 여러분은 성경이 있어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하나님을 눈으로보고 그분의 음성을 귀로 듣는 것 보다 확실하다고 성령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그 앞에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분의 빛나는 모습은 사라지고 그분이 산에서 내려올때는 목수의 아들로 다시 변해 계셨습니다.
그들의 체험이 그렇게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빛나던 순간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시나요?
주님의 말씀은 기록된 성경을 통해 지금을 빛이 되어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잠자리에서 직장에서 기록된 성경은 여러분에게 눈처럼 빛나며 여러분의 길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은 신약이 기록되기 시작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빛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발등의 등불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발등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119:105) (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길의 빛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여러분의 길의 등불이십니다.
얼마나 많은 종교들이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들은 음성이 틀렸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것은 우리에게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사람들을 조정하고 그들에게 군림하고 거짓명령을 전달하고 있습니까?
그들로부터 진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기도문
지난 한 주간도 각자의 삶 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을 믿는 성도로 선한 모습을 드러내고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했던 점이 있다면 돌아보게 하시고 지금 부터의 삶은 어제보다 더 거룩한 삶이 되도록 성장하는 성도가 되게 인도해 주시기 원합니다.
오늘도 준비된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드려지게 하시길 원합니다.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이 모임과 이 자리가 우리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한 곳이 아니라 주님을 찾고 주님을 높이기 위한 자리임을 잊지 말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도입
본문 1:16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
우리는 꾸면 낸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기 쉽습니다.
실제로 꾸며진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옆집 아이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을 잘 봤데!
옆집 아이가 시험 보기 전에 새벽 기도를 일 주일 드리고 시험을 봤는데
자기가 아는 문제만 나와서 시험을 잘 봤데…
그런 우리 자녀들이 새벽기도를 배워야겠어..
새벽기도가 주는 능력을 체험해봐!
저는 고등학교시절 은사주의 교회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
방언이라는 것도 해봤고 지금도 그 당시 익혔던 방언을 해보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 간증을 들어 보기도하고 희한하게 기적이라 보일 듯한 장면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