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귀에 복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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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눈과 귀에 복 있는 자
본문: 마13:14-16
2019-10-27
(마13:14) 이사야의 대언이 그들 안에서 성취되었으니 이르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13:15)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은 눈을 감았나니 이것은 언제라도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느니라.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보므로, 너희 귀는 들으므로 복이 있도다.
도입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과 귀에 복을 주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과 저의 귀는 복음을 듣고 여러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도와준 감각기관입니다.
여러분은 목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우리의 주가 되시는 분 안에서 모여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십자가의 사건을 목격했고 우리의 죄 때문에 피흘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눈으로 보고 귀로들은 것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과 귀가 복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깊이 생각하는 되시길 원합니다.
사람들은 균형감 있게 듣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스스로 마음에 탐심이나 악한 생각때문에 올바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론 균형있게 들으려고 노력하다가도 주변에서 잘못된 정보를 주거나 아니면 아첨하는 말로 잘못된 정보만 넣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균형이 깨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감각기관 특히 보고 듣는 눈과 귀에 복을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선악과 사건
여자가 선악과의 죄를 지은 것은 잘못 보고 잘못된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뱀이 주는 정보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뱀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말을 합니다.
뱀은 여자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아는 것입니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뱀과 같이 여러분의 주변에서 여러분의 여린 부분을 자극해서 죄를 짓도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자는 자신의 눈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창3:6)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그녀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가 먹으니라.
여자가 눈으로 봤는데 아름다운 겁니다.
여러분 세상은 점점 타락해가고 악해져 가는데 여러분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어떤가요?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세상은 점점 좋아지지 않나요?
건물도 점점 좋아지고,
전에는 걸어 올라갈 수 밖에 없었던 곳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로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세상이 주어졌고
에어컨이 있어서 무더위에 땀흘리면 견디지 않아도 되고
한 낮에 커피숍이야 야외에 가면 예쁜 커피숍에는 여자분들이 커피 한 잔에 밥보다 비싼 케익 한 조각을 놓고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기독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점점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타락해 가는 이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일까요?
모든 뉴스와 방송은 여러분들이 이제 100세는 거뜬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놨다고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점점 건강한 몸으로 이 세상의 죄를 즐길 수 있도록 유혹받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 두렵게 느껴지시나요?
롯의 실수
롯의 실수는 무엇이었을까요? 잘못 보는 것이었습니다. (창13:10)
롯이 눈을 들어 잘못 본 것이 실수 였던 것입니다.
(창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형제라. 원하노니 나와 너 사이에, 내 목자들과 네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게 하지 말자.
(창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원하노니 너는 내게서 갈라서라. 네가 왼쪽을 취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떠나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하니라.
선택해야 하는 문제에 놓였습니다.
한 사람은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을 하게되고
다른 한 사람은 양보와 배려의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창13: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평야를 바라보니 네가 소알에 이를 때에 보듯이 그것이 모든 곳에서 물이 잘 공급되었으며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주}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 같았더라.
자기 눈에 좋은 것을 보고 갔다가 그 곳의 죄로 도시가 멸망하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롯의 가족이 탈출하게 됩니다.
눈과 귀에 복받은 자들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니라.
앞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자 그에 대한 답변을 하시는 중이십니다.
13장은 이렇게 왕국에 관한 말씀을 비유로 설명하시고 해석해 주십니다.
1절부터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예수님이 바닷가 배에 들어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는 상황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 => 온 무리
(마13:14) 이사야의 대언이 그들 안에서 성취되었으니 이르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13:15)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은 눈을 감았나니 이것은 언제라도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느니라.
“그들”
14절 15절의 “그들”은 온 무리를 가리켜서 이사야의 대언을 인용하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6:9) ¶ 그분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되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너희가 보되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
(사6:10) 이 백성의 마음을 우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을 닫을지니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기에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보므로, 너희 귀는 들으므로 복이 있도다.
(마13:17)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대언자들과 의로운 자들이 너희가 보는 그것들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그것들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느니라.
“너희” =>16절 17절에서 너희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19절 부터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 해 주십니다.
그 대상은 제자들만 모아 놓고 해석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큰 무리 중에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깨달은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말해도 알지 못한다.
그들 중에는 깨닫는 자가 없다.
너희는 내가 설명해 주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너희가 알고자 해서 안 것이 아니라
너희가 복받은 자이 이기때문에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13:43) 그때에 의로운 자들은 자기들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큰 무리 중에 귀 있는 자가 없었을까요?
“그들” 즉 “온 무리”에게는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13:11)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여러분들이 예수님에게 “너희”에 해당 하셨기 때문에 왕국의 신비들을 알수 이게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들”에게 속해 있다면 아무리 성경을 연구해도 왕국의 신비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귀와 눈이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다윗
사울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면서 어둠의 그늘에 마음이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삼상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어떤 이가 그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나이다, 하니
사울은 블레셋과 싸움을 하고 돌아오는 길 입니다.
엔게디 광야
사해 근처에 있는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는 천연 굴도 있지만 당시에 피난처 용으로 인공으로 만든 굴이 많았다고 합니다.
유실수도 많아서 먹을 것이 풍부하고 숨기 좋은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엔게디 광야는 다윗에게 숨는 장소로 사용된 곳이었습니다.
(삼상24:2) 그때에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려고 들염소 바위로 가니라.
잘못된 정보에 사로잡힌 귀
사울은 이미 블레셋과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을 한 뒤 임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병사들을 이끌고 다윗을 찾으러 움직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
- 영에 붙잡혀 있는 사람이거나
- 육에 붙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지금 뭔가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개되는 이야기는 사울을 나쁜사람 다윗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특별히 더 잘한 일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다윗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점>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편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삼상24:3) 그가 길가에 있던 양 우리에 이른즉 거기에 굴이 있으므로 사울이 자기 발을 덮으려고 들어갔는데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그 굴의 옆면에 있더라.
다윗을 잡으러 엔게디 광야를 갔는데 볼일을 보러 들어간 것입니다. 옷을 내려 입으면서 발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굴에 들어갔을때 잠시 눈이 적응이 안되어서 어둠에 쌓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 어둠 속에 다윗과 그의 부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갔는데 상황은 사울이 다윗의 손아귀로 스스로 걸어들어간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 상황은 무엇일까요?
원수의 목전에서 잔을 들게 하시는 분
현재 사울은 다윗의 원수 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윗을 회복시키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잔을 들게 하시는가?
그것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 놓인 사람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
어둠의 권세에 놓인 사람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의 삶의 결실과 끝에 놓이는 상황입니다.
두 가지 다른 삶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불안하고 광기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다윗은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아버지에게만 집중합니다.
사울은 나중에 아주 비참한 꼴이 됩니다.
사울은 다윗 앞에서 펑펑울면서 자기의 잘못을 안다고 고백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박을 하는 사람은 손이 잘려도 도박을 합니다.
죄와 중독은 죽어야 고칠 수 있을 만큼 고치기 어렵습니다.
사울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크기의 싸움으로 이해했고
다윗은 하나님과의 싸움으로 이해하고 골리앗과 싸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대에 집중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 집중할때 이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아버지를 경배하고 찬양하고 높이고 그분께 집중해서 부르짖고 기도할때 눈 앞의 문제는 내 문제가 더 이상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면
사울은 어둠 속에서 다윗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미 어둠속에서 적응이 된 다윗은 사울을 정확히 잘 보고 있습니다.
이때 다윗 곁의 군중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4절로…
(삼상24:4)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주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겨주리니 네가 보기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셨는데 오늘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라. 이에 다윗이 일어나서 몰래 사울의 겉옷자락을 베니라.
다윗의 듣는 자세 사울과 비교
다윗의 참모들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우리의 손에 넘기는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저 사람만 죽이면 나라가 다윗에게 넘어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죽이십시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살짝 벱니다.
다윗의 영적상태가 아주 좋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다윗에게 좋은 기회라고 부추기지만 다윗은 개인적인 원한과 복수는 자신이 직접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옷자락만 벱니다.
이 옷자락을 벤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이 옷자락을 벤다고 할때 사용된 영어 동사 “cut off”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겠다고 할때 사용된 단어 입니다.
(창9:11) 내가 너희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내가 모든 육체를 홍수의 물들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 And I will establish my covenant with you; neither shall all flesh be cut off any more by the waters of a flood; neither shall there any more be a flood to destroy the earth.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혼이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진다고 할때 사용된 동사 입니다.
(창17:14) 포피의 살을 베어 내지 아니하여 할례를 받지 않은 사내아이 곧 그 혼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리니 그는 내 언약을 범하였느니라. And the uncircumcised man child whose flesh of his foreskin is not circumcised, that soul shall be cut off from his people; he hath broken my covenant.
사울의 옷 자락이 잘려 나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의미는 사울은 상징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이 때 다윗이 다른 사람의 권면에 우쭐해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모든 백성들의 여론은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사울만 죽이면 나라가 나에게 넘어온다는 유혹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라도 잘못된 과정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폭력으로 목적을 성취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폭력은 기독교인이 선택해야 할 수단이 아닙니다.
다행히 다윗은 영적으로 깨어있었습니다.
사울은 이미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버림 받게 됩니다.
(삼상15:23)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나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
(삼상15: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그가 그의 겉옷 자락을 붙잡으매 그것이 찢어지므로
(삼상15: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 날에 이스라엘 왕국을 왕에게서 찢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웃”은 다윗입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옷이 찢어졌습니다. 사무엘은 그 상태를 하나님의 예언으로 승화시킵니다.
24장에서는 다윗의 칼에 의해서 사울이 웃자락이 잘려져 나간 것입니다.
결국 사울의 왕권은 다윗에게 넘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은 상징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사울의 왕위는 끝난 것입니다.
눈이 가리워진 것은 자신이 만든 것
사울의 영적인 눈이 가려진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한 것이 아니나
사울에게 주어진 기회와 상황을 불순종으로 이끈 것은 사울 자신입니다.
그 불순종의 결과로 하나님은 사울의 편에서 돌아선 것이고 그의 눈을 가려서
그가 더이상 하나님이 계획한 왕국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죽어야 다윗 왕국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에 사울의 눈과 귀를 적극적으로 둔하게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삼상24:5)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으므로 그 뒤에 그의 마음이 그를 찌르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의 옷자락을 베어서 그에게 위협을 가한것에 가책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아무리 미워도 그의 생명을 우리가 직접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 하시게 내어 드리면 됩니다.
다윗의 마음 씀씀이가 하나님께 무척 합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삼상24:6) 그가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인 곧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이 일을 행하는 것 즉 내 손을 내밀어 그를 치는 것을 주께서 금하시나니 그는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니라, 하고
신약 교회에서 우리는 다른 형제 자매들을 미워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기름부음 받은자 입니다.
(삼상24:7) 이처럼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종들을 금하여 그들이 일어나 사울을 대적하지 못하게 하니라. 그러나 사울은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로 가니라.
사울은 자신의 옷자락이 잘린것을 모른체 굴에서 밖으로 나갑니다.
사울은 계속에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사울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보고 있는데 사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삼상24:8) 그 뒤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뒤돌아 그를 보므로 다윗이 자기 얼굴을 땅으로 숙여 절하니라.
다윗이 “내 주 왕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을 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의 인격이 성숙해져가는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정의롭고 옳다고 생각하면 광장에서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겁니다.
다윗은 끝까지 정중함과 질서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닌 것은 잘못된 정보 때문입니다.
복된 사람은 귀와 눈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소리만 넣어 주는 것입니다.
감각 기관이 복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보신 적 있습니까?
(삼상24:9) ¶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왕께서는,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치려 하나이다,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나이까?
사울의 주변사람들이 자꾸 증오의 정보를 주는 것입니다.
그 정보를 선택하는 것은 사울의 몫입니다.
(삼상24:10) 보소서, 오늘 주께서 왕을 굴에서 내 손에 넘겨주신 것을 이 날 왕의 눈이 보셨나이다. 몇 사람이 내게 권하여 왕을 죽이게 하였으나 내 눈이 왕을 아끼어 내가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치지 아니하리니 그는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니라, 하였나이다.
(삼상24:11) 또한 내 아버지여, 보소서, 참으로 내 손에 있는 왕의 겉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의 겉옷자락만 베고 왕을 죽이지 아니하였은즉 내 손에 악함이나 죄 짓는 일이 없는 줄을 왕께서 보고 아시옵소서. 나는 왕에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나 왕은 내 혼을 찾아내어 취하려 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사울 사이에 일어난 과정을 드러나게 해 주십니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날때까지 다윗은 기다려 온 것은 잘 한 일 입니다.
(삼상24:12) 주께서 나와 왕 사이에서 판단하시고 주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복수하시려니와 나는 내 손을 왕 위에 두지 아니하리이다.
(삼상24:13) 옛 사람들의 속담이 말하기를, 사악함은 사악한 자에게서 난다, 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내 손을 왕 위에 두지 아니하리이다.
(삼상24:14)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의 뒤를 쫓으려고 나왔나이까? 왕께서 누구를 뒤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뒤쫓나이다.
(삼상24:15) 그런즉 주께서 재판관이 되사 나와 왕 사이에 판단하시고 내 사정을 살펴 변호하시며 나를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시기 원하나이다, 하니라.
(삼상24:16) ¶ 다윗이 사울에게 이 말들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삼상24: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네게 악으로 보답하되 너는 내게 선으로 보답하였으니 너는 나보다 더 의롭도다.
사울의 입에서 다윗이 옳았다고 시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둠의 세력에 덮여서 사느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빛의 자녀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자세 이런 자세가 영적인 눈을 뜨고 귀를 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뜨고 귀를 열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계3:20)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계십니까? 혹시 우리의 풍요로움과 부로 인해서 우리의 영적인 눈과 귀를 닫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우리끼리 모여서 풍요롭게 부자되고 병고치고 직장문제 해결하려고
교회 형제 자매들을 자신의 사업 고객으로 대하는 자세로 교회에 모이지는 않으시나요?
(계3:22)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대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고 그분을 문 밖에 세워 놓고
여러분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을 강대상에 세워서
사람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교회 안에 형제 자매를 보고 계시나요?
교회 안에 힘들고 어려운 형제 자매들을 보고 계시나요?
혹시 목사와 사모만 보고 계시지 않으신가요?
혹시 목사와 사모 주머니에 헌금 봉투를 꽂아 주면서
자신을 그분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계시지는 분은 안계신가요?
교회는 교회 밖 세상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혹시 교회를 세상처럼 만들고싶은 욕망으로 교회를 오시지는 않으시나요?
이사야서에서 무책임한 지도자들에게 눈먼자라고 합니다.
(사56:10) 그의 파수꾼들은 눈먼 자들이요, 그들은 다 무지한 자들이며 다 말 못하는 개들이므로 짖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잠자고 눕고 졸기를 좋아하니
(사56:11) 참으로 그들은 탐욕이 심하여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개들이요, 깨닫지 못하는 목자들이라. 그들이 다 자기 길만 바라보고 저마다 자기 구역에서 떠나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사56:12)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니 우리가 독주로 우리 몸을 가득 채우자. 내일도 이 날과 같고 또 더욱 풍성하리라, 하느니라.
(욥12:11) 귀가 말들을 시험하지 아니하느냐? 입이 음식을 맛보지 아니하느냐? Doth not the ear try words? and the mouth taste his m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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