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된 믿음으로 위로받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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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공통된 믿음으로 위로받는 교회
본문 : 롬1:12-13
2019-10-20
(롬1:12) 이것은 곧 너희와 나 사이의 공통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와 함께 위로를 받고자 함이라.
(롬1:13) 형제들아, 이제 나는 너희가 이것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처럼 어떤 열매를 얻기 위해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이제껏 막혔도다.)
“공통된 믿음”
우리가 낮은 마음 침례교회를 처음 시작한 때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가 낮은마음 침례교회에 모인것은
적어도 우리들 사이에 일치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적어도 저는 여러분과의 인연은 낮은마음 침례교회에 모이지 전에는 그저 지나다가 얼굴을 조금 익힌 정도의 인연 밖에는 없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신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고 지금도 여러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에게는 공통된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공통된 믿음이 없었다면 이 교회가 여러분에게나 저에게 아무런 위로를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는 한 지점에서 우리는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작은 지점에서 동일한 생각과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그 믿음의 근간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성경을 기준으로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때문에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일치된 견해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어느 한 사람의 견해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땠을까요?
지금은 일치했지만 시간이 지나서 여러분의 견해가 바뀌어서 사람을 높여도 된다고 생각이 바뀌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 안에서 다시 분열과 다툼과 혼란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일치된 견해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공통된 믿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관심만으로..
교회 라는 곳이 그저 예수님에대한 관심만을 가지고 모인 곳이라면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이라는 인물에 관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구원받지 않았어도 예수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저마다 자기의 견해를 이야기 합니다.
이런 견해는 일치될 수 없으며 그 모임은 하나가 될 수 없게 됩니다.
저마다 자기 색을 드러내면
영남, 호남, 충청, 강원등의 지역색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정치적 색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드러내거나
자신이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를 드러내거나
자신이 어느 명품 가방이나 옷을 입는지 이야기 하거나
하게 되면 하나가 되기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모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믿음과 공통된 생각과 공통된 소망,
공통된 성도의 삶의 목표,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합니다.
구원받으셨나요? 주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네”라고 하면
우리는 그 분이 한 성령으로 거듭난 형제 자매라는 것으로 기뻐하고 교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예수님을 향한 공통된 사랑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돌보고 세워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인적인 확인이나 자신의 개인적 선호를 주장하는 것은 교회에 분열을 가져오게 되고 하나되는 것을 이룰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 정도만 있다면
굳이 교회까지 올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은 유튜브에서 수 많은 설교와 정보가 있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서 얼마든지 좋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봉사할 필요도 없고,
교회에 나와서 말씀대로 섬겨야 할 필요도 없고
신앙생활 잘하고 계시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편하게 여러분의 머리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서로가 다른 사람들끼리 하나가 될 수 있는 공통사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방법은 바로 우리가 각자의 견해가 아닌 성경기록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워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기록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이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기록그대로 믿고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안위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인정이나 긍휼이 있거든
(빌2:2) 너희는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며 한 뜻과 한 생각이 되어 내 기쁨을 성취하라.
(빌2:3)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빌2:4) 각 사람이 자기 일들만 돌아보지 말고 각 사람이 남의 일들도 돌아보라.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한 뜻과 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다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로가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지 않으면 혼란이 오고 다툼이 생기게 됩니다.
아직 한 믿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형제 자매들에게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고 성경이 제시하는 한 믿음 안에 들어 갈 수 있도록 돌봐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일치된 동의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일한 방향의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는 최종권위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확신들은 최종권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한가지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 성경을 믿는다면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순순한 마음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남의 일들도 돌아보라”
자기 일만 돌아 보려면 교회에 나와서 다른 사람과 섞일 필요가 없습니다.
불편하기만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들도 돌아 보려면 교회에 함께 모여야 합니다.
내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없는지
내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한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는지
내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거짓 교리에 속고있는건 아닌지
이렇게 서로를 돌보고 돕는 것은 우리가 한 믿음 한 생각이 되었을때 가능한 것입니다.
새로 구원을 받고 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한 형제나 자매가 있다고 해보죠.
그분들이 기존 교회 성도들과 교제를 하는데 교제하는 사람 마다 전부 다른 믿음을 이야기 한다면 새로온 성도는 혼란스러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 안에서 민감한 교리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드라마 이야기하고 연예인 이야기하고 사회 정치이야기만 한다면 어떨까요?
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더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기존 교회 성도들이 한 믿음 한 생각으로 질서 있게 먼저 바로 잡혀야 합니다.
(시133:1) (다윗이 지은 시, 위로 올라가는 노래) 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모이신 분들은 가족으로 오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한 가족이 한 집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지내는 것과
한 가족이 한 집에서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은가요?
여러분은 조화로운 가정을 만들고 싶지 않으신가요?
여러분 가족 구성원이 여러 연령대에 분포되어 살아가는데 그들이 모두 같은 문제와 같은 성숙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중학생 자녀가 바라보는 세상이 다르고
사십대 어른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릅니다. 이들이 같을 수 있을까요?
미운 네 살 다섯 살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수준이 고등학생 자녀와 같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다른 세대를 살아가는 한 가정이 불행하고 불편해야 할까요?
이들이 매일 얼굴을 마주볼때 마다 다투고 싸우기만 한다면 얼마나 힘들까요?
이들이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지 느끼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가정이 조화로울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수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정의 구성원은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거나 한 부모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명의 부모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 가정은 공통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져주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 가족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말썽을 부리고 때로는 학교에 부모님이 불려가기도 하지만
부모는 이런 과정이 어린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구성원이 각각 잘 되는 것이 가족 전체에 유익이 된다는 것을 마음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하면 서로를 위해 희생하며 배려하고 있는 것 입니다.
교회에서는 어떨까요?
우리가 서로 자라온 배경이 서로 다른데 교회 멤버들이 서로 다른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얼마나 많을 일들이 서로 동의가 안되서 불편할까요?
그러나 이런 동의 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일 보다
더 가치있는 일에 우리가 공통된 믿음이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런 대상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면 우리는 조화로운 동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위협받는다면
우리가 그분 아래 함께 할때 우리의 삶이 유지될 수 있고
모진 풍파를 헤쳐나갈 수 있다면 동의되지 않는 작은 일들은 서로 양보하고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윗의 사백명 군사들
(삼상22:1) 그러므로 다윗이 거기서 떠나 아둘람 굴로 피하매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이 그 일을 듣고는 그들이 거기로 내려가 그에게 이르렀더라.
(삼상22:2) 고난 중에 있던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불만이 있던 모든 자가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을 다스리는 대장이 되었더라. 거기에는 그와 함께한 사백 명가량의 사람이 있더라.
다윗이 아둘람 굴로 피하게 됐을 때 다윗에게 사울에게 상처받은 백성 400명이 모여들게 됩니다.
이들은 다윗의 왕국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백성들이 됩니다.
이들이 함께 조화롭게 왕국을 세워 갈 수 있게 된 것은 다윗이라는 한 지도자 아래 모이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사울의 세상에서 고난받고 빚지고 불만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사울을 피해 다윗 아래 서게 된 것은 다윗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소하게 다른 것들은 무시하고 양보하고 참아내고 조화롭게 왕국을 세워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고전10:17) 우리가 많아도 한 빵이요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그 한 빵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신 겁니다.
우리가 그저 십자가에서 찢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만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관심을 갖는 것에 머물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값으로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값을 통해 생명을 얻은 우리에게 한 몸이 되는 일에 참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십자가로 내가 얻은 영생은 너무도 가치있는 일 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그분만이 나에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가치임에 틀림없습니다.
주 예수그리스도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무엇인가가 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값진 생명을 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여러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그 생명을 그분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생명들이 함께 모여서 믿음을 지키고 서로를 위로하며 복된 소망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교회에 모여서 이 사람은 학벌이 높네
저 사람은 직업이 의사군
저 사람은 십원 한 푼 없는 가난한 사람이군
만일 교회 안에서 의사끼리 모여서 교제하고
교수끼리 모여서 교제하고
저 사람은 돈이 많아서 팔자 좋아서 교회에 안빠지고 잘 나와?
나는 직장에서 너무 힘들어서 교회도 매주 나오기 힘든데…
저 사람은 가난해서 만나면 매번 내가 밥을 사야되서 만나기 싫어…
이런 관점으로 교회에 모인다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각자의 자기 기준으로 서로가 일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중에 누가 최고인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나서서 사회로 돌아가시면 의사이고 교수이고 사장님이고 사모님일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주님 안에서 모두 형제 자매라를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저사람은 서울대 나왔고, 저사람은 목사고, 저사람은 사모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서로의 높 낮이를 말한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2:11)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래서 예수님 조차도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형제라 부르는 순가 내가 그 사람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형제로 인정한 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의 형제가 되는 것에 동의 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우리와 형제가 되시겠다는데
이직 나를 교수라 불러주지 않아서 서운하신 분들이 계시나요?
아직 나를 목사라 불러주지 않아서 서운하신 분들이 계시나요?
의사선생님이라고 불러주지 않아서 섭섭하신 분이 계신가요?
사모님이라고 불러주지 않아서 섭섭한 분이 계신가요?
그런 기준이 관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기준이 관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제 말은 아무렇게나 서로를 대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기준이 드러나지 않도록 우리가 형제 자매가 되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면서 어려운 교리는 배워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지식으로 다른 형제 자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요?
내가 더 많이 안다고 다른 사람을 은근히 경멸해서 교회안에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요?
(눅12:47)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자기를 예비하지 아니하고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그 종은 채찍을 많이 맞되
(눅12:48) 알지 못하고 채찍 맞을 일들을 한 자는 적게 맞으리라. 누구든지 많이 받은 자에게는 사람들이 많이 요구할 것이요, 사람들이 많이 맡긴 자에게는 더 많이 달라고 하리라.
성경을 많이 공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 잘못했다고 해서 벌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게 맞을 수는 있습니다.
알고도 하지 않은면 더 많이 맞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많이 아는데 인격은 형편없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을 모르고 인격이 형편없는 사람보다 많이 맞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이 알고 적게 알고는 개인적인 문제지만 교회에서 하나 되는 일에는 많이 알고 적게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이 안다고 적게 아는 자를 무시하지 말고 많이 안자나 적게 안자나 모두 한 성령으로 태어나 한 몸이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공통된 믿음 안에서 함께하는 것에 기쁨을 누렸고 위로와 평안함을 찾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 간에 차이점을 인정하고 그들을 위해 주님의 축복을 간구하고 서로를 돕기를 바라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교회에는 참석하지만 이런 것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교회에는 참석하지만 불평과 분쟁의 원천이 되고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을 자신보다 아래로 보게 된다면 안타까운 현실을 만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이 함께 하는데 신실하지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롬1:9) 내가 그분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 되시거니와 내가 기도할 때에 언제나 너희에 관하여 끊임없이 말하며
(롬1:10) 어찌하든지 이제라도 마침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탄한 여정을 얻어 너희에게 나아가게 되기를 간구하노라.
(롬1:11)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은 내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고자 함이니
바울이 보고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열심히 시간을 내서 왔는데 그 곳에 형제 자매들이 없다면 그 허전함을 견디히 힘들지 않을까요?
지역교회 성도들이 전부다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고 교회에는 안나온다면 바울이 기뻐했을까요?
바울이 힘든여정을 통해 형제자매들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찾아 왔는데 그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교회에 찾아 왔더니 몇 사람은 같이 교제하고 한 두 가정은 교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게 된다면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12절에서는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해서 성도들이 유익을 얻게 한다는 관점이 아닙니다.
바울이 성도들의 하나된 모습으로 유익을 얻게 된다는 관점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된 모습으로 화평을 누릴때 그것을 보는 바울이 기쁘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해서 겸손한 모습의 성도들을 통해서 힘을 얻고자 했습니다.
성도들이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 되는 모습이기를 원했습니다.
(엡4:1) 그러므로 주의 갇힌 자 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를 부르실 때에 허락하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걷고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
성도간의 교제는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이 틀리고 하는 문제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틀리더라도 교제는 올바른 방법으로 계속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자주 교제를 하다보면 다른 사람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도 알게 되겠지만 그들도 내가 하는 일이 뭐가 잘못된 일인지도 알게 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엡4:3)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4) 너희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 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우리는 한 몸입니다. 우리에게는 동일한 성령님이 계십니다.
한 소망가운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복된 소망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있을 곳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엡4:5)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엡4:6)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에 두루 계시며 또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
우리에게는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주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습니다.
한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물침례가 아닙니다.
(엡4:7) 그러나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내와 온유하심과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셔서 영적인 선물을 사용하는 모습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가지고 여러분의 모습에 도전받고 노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주신 은혜로 영적인 일들을 훌륭하게 해 내도록 권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분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가지고 아프고 힘든 형제 자매님들을 돌보는 일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사시는 분을 보기도 했고
어떤 자매님은 주방에서 다른 형제 자매님이 보다 청결한 상태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섬기는 모습으로 저에게 도전이 되게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어떤 형제는 거리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동일한 주님 안에서 한 믿음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섬기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교회에 요구하고 있는 수 많은 요구들의 대부분은 사치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에어컨이 안나와요 장소가 좁아요 찬양을 할 수 없어요
밥이 맛이 없어요. 거리가 멀어요.
우리가 지금 얼마나 풍요로운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잊고 살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롬1:13) 형제들아, 이제 나는 너희가 이것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처럼 어떤 열매를 얻기 위해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이제껏 막혔도다.) .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 말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주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세상을 향해서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 한 것은 아닐 겁니다.
구원받은 여러분에게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갖기를 강하게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오히려 더 재미가 없었을 겁니다.
바울은 우리가 바보같이 되지 말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단순해지지 말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모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제공되는 정보를 우리가 무시하지 말고 붙들라는 것입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기록된 말씀을 보기 위해서는 극 소수의 사람만이 친필 사본을 통해서만 기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피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방법들과 매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만 있어도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텔레비젼에 시간을 보내거나 골프를 치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면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고하는데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냥 그렇게 외면하기로 결정하면서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거운 성경책을 들고다니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성경이 스마트 폰 속에 있는데도 우리는 그걸 활용할 의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은데 우리는 그 방법과 수단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쓸수 있는 능력이 있고 누구도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을 금지하는 법도 없는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을 알려고 하지 않고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시간을 보내거나 이미 읽고 배워서 알고 있으면서 성경말씀대로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모르는체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막혔도다.)”
이 표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이 표현을 잘못이해하면 개념이 충돌할 수 있습니다.
1.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훌륭했던 사역자인 바울 조차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을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 한다고 해도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허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주님의 계획에 없는 것을 원한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4. 바울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