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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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선택의 시험
본문 : 살전 5:21
2019-11-24
(살전5:21)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 Prove all things; hold fast that which is good.
시험 앞에 놓이는 삶
하나님은 우리를 자주 시험 앞에 놓이게 하시고 선택하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악의 기준에서만 선택하는 것은 그나마 쉬운 시험일 수 있습니다.
도둑질, 간음, 거짓말, 폭행 이런 것을 선택해야 할때 우리는 내가 선택해야 할 일이 나쁜일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 쉬운 일 입니다.
그런데 내앞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것 같은 기회가 올때,
그리고 일이 너무 잘 풀려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일이라고 생각이들때
과연 이런 현상들이 다 하나님의 뜻일까?
아니면 나에게 더 높은 수준의 시험을 주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올때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나에게 너무 쉬운 일이 주어졌을때
오히려 이것이 함정이 존재하는 고차 방정식의 시험이 아닐지 경각심을 가져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론 우리는 아주 고차 방정식과 같은 시험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똑 바로 차려서 영적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도록 말씀으로 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적인 눈이 떠지고 영적인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의 선택
다윗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돌아온 뒤에 사울도 다윗을 자신의 측근에 두려하고 요나단은 다윗과 갚은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삼상18:3) 그때에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혼같이 사랑하였으므로 그와 다윗이 언약을 맺었으며
(삼상18:4) 요나단이 자기가 입은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또 자기 옷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상당히 커다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항복의 의미와 같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옷과 칼, 활, 띠를 준것은 전쟁터에서 항복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윗에게 맡길 수 있는 우정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과 다윗과 모든 것을 같이할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자신의 신발을 벗어 주지는 않습니다.
신을 벗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세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출3:4) 그가 보려고 옆으로 가는 것을 {주}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 떨기나무의 한가운데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거늘
(출3:5) 그분께서 이르시되, 여기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시고
(출3:10) 그런즉 이제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이로써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라.
모세가 신을 벗게 된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종의 자세를 취하게 하시고 모세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했지만 다윗을 종의 자세로 섬길 마음은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 가운데 이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삼상18:7) 여인들이 놀며 서로 화답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로다, 하니라.
이런 소문을 듣고 사울이 노하게 됩니다.
자기 옆에 창을 던져서 다윗을 죽이려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에게 항의도 합니다.
요나단은 자신들의 왕위가 다윗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나중에 네가 왕이 되면 다른 적들은 다 죽이더라도 내집과 가문의 생명은 지켜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맹세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다윗과 다시 한번 다윗에게 충성 맹세를 합니다.
(삼상20:17)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하여금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혼을 사랑하는 것 같이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더라.
요나단이 다윗을 돕고 보호하려는 노력은 작지 않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진노로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을 알게되고, 다윗을 멀이 피신 시켜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삼상20: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말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씨와 네 씨 사이에 계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서 떠나고 요나단은 도시로 들어오니라.
이들은 서로를 위해서 사랑을 확인하지만
이들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이들은 결국 서로의 길을 달리해서 헤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단의 사랑은 여기까지인 것입니다.
다윗과 생사를 같이할 정도의 사랑은 아닌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도시로 떠나고 다윗은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요나단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아버지가 있는 도시로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 편에 있는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주는 궁궐의 환경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아버지를 남겨 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마4:21) 그분께서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자기들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 안에서 자기들의 그물들을 고치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니
(마4:22) 그들이 즉시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남겨 두고 그분을 따르니라.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마지막을 어떻게 끝나게 될까요?
사무엘상 마지막 장에 요나단은 결국 아버지와 함께 같이 죽게 됩니다.
(삼상31:6) 이와 같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그의 병기 드는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고 돕고 지원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윗의 편에 서지 않고 아버지가 있는 도시와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때로는 애정을 가지고 다가오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단이 바로 그런 경우의 사람입니다.
생명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한 결별과 돌아섬이 있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에 선택이 주어진다면 다윗과 같은 편에 서기 위해서 가족을 버리고 다윗의 편에 설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첫 번째 기회
다윗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보겠습니다.
다윗은 두 번에 거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여러번 죽일 마음을 품었고 실재로 죽이려는 행동을 여러번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가 주어진 장면을 보겠습니다.
(삼상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어떤 이가 그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나이다, 하니
(삼상24:2) 그때에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려고 들염소 바위로 가니라.
다윗은 약 600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상태입니다.(삼상23:13)
(삼상24:3) 그가 길가에 있던 양 우리에 이른즉 거기에 굴이 있으므로 사울이 자기 발을 덮으려고 들어갔는데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그 굴의 옆면에 남아 있더라.
사울은 밖에서 굴 안으로 볼일을 보려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때 마침 그 굴 안에는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삼상24:4)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주}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겨주리니 네가 보기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며 언급한 그 날을 주목하소서, 하니라. 이에 다윗이 일어나서 몰래 사울의 겉옷자락을 베니라.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사울을 죽이는 기회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지금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찾아 온 것이기때문에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고해도 누구에게 비난 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선택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부어 사용한 사람을 자신이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의 영적인 상태가 매우 우수한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방식으로 왕국을 세우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을 막으신 것입니다.
다윗은 탁월한 선택과 결정을 한 것입니다.
다윗을 말린 아비가일
다윗이 두 번째 사울을 살려주는 일이 생기기 전에 25장에서 나발이라는 사람과의 문제가 생깁니다.
다윗은 24장에서 사울을 살려줄때와는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삼상25:2) 마온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소유는 갈멜에 있었으며 그 사람이 심히 창대하여 양 삼천 마리와 염소 천 마리를 소유하였더라. 그가 갈멜에서 자기 양들의 털을 깎고 있었는데
한 사람을 등장시키면서 그 사람의 인격을 설명하기 보다는 부자라는 특징으로 설명하면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양털을 깍는 날은 마을의 축제가 있는 날입니다.
(삼상25:3) 이제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더라. 이 여인은 이해심이 좋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그 사람은 야비하고 행위들이 악하더라. 그는 갈렙의 집에 속하였더라.
“나발” 어리석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삼상25:4) ¶ 나발이 자기 양들의 털을 깎는다는 것을 다윗이 광야에서 들으니라.
나발 근처에 숨어있던 다윗이 나발의 양털깍는 축제가 벌어진 것을 들었습니다.
다윗이 청년 열 명을 보내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줄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이 거절을 합니다.
(삼상25:10) ¶ 나발이 다윗의 종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즘 각각 자기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종들이 많도다.
나발은 다윗을 조롱하고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삼상25:11) 이러할진대 내가 내 빵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내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겠느냐? 하니라.
다윗을 알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다윗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상25:12) 이에 다윗의 청년들이 자기들의 길을 돌이켜 다시 가서 돌아와 그 모든 말들을 그에게 고하매
나발이 정말 다윗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알면서도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발은 다윗을 무시하는 발언으로 다윗의 감정을 자극하는 말을 자꾸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분노하고 폭력적으로 대응을 하려고 합니다.
(삼상25:13)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자기 칼을 차라, 하니 그들이 각각 자기 칼을 차니라.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거기서 사백 명가량은 다윗을 따라 올라가고 이백 명은 물건들 옆에 머무니라.
다윗이 복수를 선언합니다. 자신도 칼을 차고 400명을 데리고 출정명령을 내립니다.
24장의 동굴에서 만난 다윗의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24장에서는 사울을 살려주면서 자신이 다시 사울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서도 살려보내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를 헤치지 않으려는 영적인 자세를 취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칼을 차고 싸우고자 하는데 그 이유가 먹고사는 끼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윗 안에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도들도 어마어마하게 큰 문제에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문제에 무너지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될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윗은 위험 천만한 도망길에서도 칼쓰기를 마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소년들의 보고 앞에 먹는 문제로 칼을 차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중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중재자는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입니다.
(삼상25:14) ¶ 그러나 청년들 중의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광야에서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려고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욕하였나이다.
나발의 사람 중에 하나가 아내 아비가일에게 방금 벌어졌던 상황을 가서 전했습니다.
나발의 대응은 다윗을 모욕한 것이라는 것을 나발 사람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은 먹을 것을 챙겨서 다윗에게로 갑니다.
(삼상25:20) 그녀가 나귀를 타고 산의 외진 곳으로 내려갔는데, 보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녀를 마주보며 내려오매 그녀가 그들을 만나니라.
(삼상25:21) 그런데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광야에서 이자가 가진 모든 소유를 지켜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게 한 것이 참으로 헛되었도다. 그가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았도다.
다윗이 분노하여 가는 중에 아비가일을 만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들이 나발의 재산을 지켜주고 해를 가하지 않았는데 나발이 자신을 모욕적으로 대한 것이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발 사람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다짐을 하고 가고 있는 중입니다.
다윗은 살기 등등합니다.
(삼상25: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는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며 몸을 구부려 땅에 대고
(삼상25:24) 그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이 불법을 내게로 곧 내게로 돌리시고 원하오니 주의 여종이 주께서 듣는 데서 말하게 하시며 주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다윗을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삼상25:26) 그러므로 이제 내 주여, {주}께서 살아 계심과 또 내 주의 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내 주께서 피를 흘리러 가는 것과 내 주의 손으로 친히 원수 갚으시는 것을 {주}께서 막으셨사오니 이제 내 주의 원수들과 또 내 주께 악을 꾀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당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왕국이 피를 묻히며 시작하길 원하고 있질 않으십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이 자신의 남편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삼상25:28) 원하건대 주의 여종의 범법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 주께서 {주}의 싸움을 싸우시며 또 내 주의 평생 동안 내 주에게서 악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주}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이다.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이다. ”
다윗의 집이 튼튼하게 지어져야 예수님이 그 집을 통해 오시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의 칼에 피를 묻히지 말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입을 통해서 신앙고백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삼상25:31) 내 주께서 이유 없이 피를 흘리셨다든지 혹은 내 주께서 친히 원수를 갚으셨다든지 하는 이것이 내 주께 근심이 되거나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되리이다. 다만 {주}께서 내 주를 선대하실 때에 내 주의 여종을 기억하소서, 하니라.
즉 나발의 잘못은 하나님께 처리하실 것이니 다윗께서는 직접 칼에 피를 묻히지 말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24장에서 굴속에 있을때는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의 설득을 통해서 잊어 버렸던 24장의 마음이 되찾아지고 회복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초점이 됩니다.
아비가일은 오늘날 우리에게 지금처럼 사람으로 다가올 수 있고 때로는 자연 속의 일반 계시를 통해서 원래의 영적인 모습을 되찾게 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비가일이 되던지 아비가일의 음성을 외부로부터 들어야 합니다.
다윗의 집은 분노와 혈기로 세워져서는 안됩니다.
다윗의 왕국이 굳건히 세워질 것이라는 것을 아비가일이 정확히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삼상25:32) ¶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이 날 너를 보내어 나를 만나게 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나발은 하나님께 대신 처리하십니다.
(삼상25:38) 열흘쯤 뒤에 {주}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도록 맡겨 드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하려고 할때 이렇게 아비가일처럼 그 무엇인가가 나의 잘못된 선택을 막아 주는 것이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
(삼상26:1)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여시몬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나이까? 하니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 준 뒤에 다시는 다윗을 죽이려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서는 누군가의 첩보를 듣고는 다시 다윗을 죽이려는 충동이 일어나서 다윗을 죽이러 가게 됩니다.
또 삼천명을 데리고 다윗을 찾아 나섭니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믿기지가 않아서 정탐꾼을 보내서 확인을 하고 부하 한 명만 데리고 사울에 대응하기 위해서 나섭니다.
(삼상26:6) 그때에 다윗이 헷 족속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이요,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에게 응답하며 말하여 이르되, 누가 나와 함께 진영에 내려가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당신과 함께 가겠나이다, 하니라.
아비새는 사무엘서에서 앞으로 주목해야 할 인물입니다.
아비새는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입니다. 즉 조카입니다.
야심가가 옆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지도자 옆에 야심가가 있으면 위험합니다.
잘못된 길로 조언하게 됩니다.
아비새는 다윗이 왕위에 올라야 자신에게 유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삼상26:7) 이처럼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갔는데, 보라, 사울은 참호 안에서 누워 자며 그의 창은 그의 베개 옆 땅에 꽂혀 있더라. 그러나 아브넬과 백성이 그를 둘러싸고 누웠으므로
이상하게도 사울과 그의 군대는 전부 잠을 자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과 아비새가 그곳에 가서 목격한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잠자는 사울, 잠자는 아브넬, 그리고 창을 목격합니다.
사울은 자고 있고 그의 호위무사도 자고 있고 그의 창은 땅에 꽂혀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사울을 죽이는 것은 너무도 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한 번 사울을 살려 주었기때문에 이번에는 죽인다고 해도 명분상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전개 될때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너무 일이 잘 풀릴 수록 실수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때 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지난번 첫 번째 상황 보다 더 쉽게 놓여진 상황은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하고 사울의 목숨을 빼앗아도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더 상황을 한 쪽으로 몰고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삼상26:8) 그때에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이 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겨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원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쳐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매
아비새는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지금 상황이 하나님의 뜻인거 같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아비새는 자신이 사울을 단번에 죽이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로 들릴 것입니다.
자신의 원수를 대신 죽여줄 사람이 있으니 마음에 유혹이 생겼을 겁니다.
모르는 척 눈감을 수 있습니다.
모르는 척 눈감는 것도 죄입니다.
눈감아 버리는 다수의 침묵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것도 죄입니다.
죄에 등을 돌리는 침묵에 동의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범법이 벌어지는데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모른체하는 것은 죄입니다.
저도 그런 죄를 범했을 것입니다.
제가 범한 적이 있는 죄이니 그런 죄는 져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것도 죄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알면서 침묵하는 다수에 동조하는 것은 죄입니다.
지금 다윗은 곧바로 아비새에게 처리를 맡기고 아무말 없이 그곳을 떠나면
다윗은 침묵으로 동조하고 아비새가 대신 피를 묻히게 될 것입니다.
너무 지혜로운 방법 아닐까요? 이런 것이 세상의 지혜 아닐까요?
첫번째 상황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선택의 시험 앞에 놓인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쉬워서 더 어려운 선택의 순간이 앞에 놓인 것입니다.
다윗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보시죠.
(삼상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그를 멸하지 말라. 누가 자기 손을 내밀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무죄할 수 있겠느냐? 하고
(삼상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주}께서 그를 치시리니 그의 날이 이르러서 죽거나 혹은 그가 싸움터에 내려가서 멸망하리라.
(삼상26:11) 내가 내 손을 내밀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주}께서 금하시나니 원하건대 다만 이제 너는 그의 베개 옆에 있는 창과 물병만 취하라. 그리고 우리가 가리라, 하고
(삼상26:12) 이처럼 다윗이 사울의 베개 옆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그것을 보거나 알지 아니하였고 또 깨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내리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었더라.
하나님이 잠들게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시험 속에서 시험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실때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울의 공격보다 아비새의 유혹이 더 이기기 힘든 공격이었을 겁니다.
다윗이 25장에서 나발의 사건에서 아비가엘의 만류에서 얻은 교훈으로 다시 영적인 상태가 된것입니다.
나발은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고 죽게 됩니다.
다윗은 나발 사건에서 하나님의 영적 섭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그의 죽음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수 많은 경우에 선택해야 하는 시험에 놓이게 됩니다.
주변에는 잘 못된 선택을 하도록 설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서 나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아 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선택을 하던 사람의 지혜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이 옳을 선택인지를 생각하고
내가 해결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게하는 방식으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재산을 팔아 헌금을 하고도
답변을 잘못해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행5:1) 그러나 아나니야라 하는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 하나를 팔아
(행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는데 그의 아내도 이 일에 은밀히 관여하였더라. 그가 일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거늘
(행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야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 차서 네가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고 땅값의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4) 땅이 남아 있었을 때에 네 것이 아니었느냐? 그것을 판 뒤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속에 품었느냐? 네가 사람들에게 거짓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였도다, 하니
(행5:5) 아나니야가 이 말을 듣고 쓰러져 숨을 거두매 이 일들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이 임하더라.
우리는 악한 일을 할때보다 좋은 일을 하고도 교만으로 죄를 짓는 결정을 하게 될때가 많습니다.
고차 방적식에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선택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들이지만 예수님께서 너무도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자신에게 경배하면 세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의 방법으로 세상을 찾아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아버지게 맡기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너무도 쉬운일로 선택의 시험이 놓일때
교만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까요?
너무도 쉬운 유혹에 영웅이 되고 싶지 않으실 자신이 있으신가요?
누군가 나와 타협만 한다면 교회 건물하나 준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택의 유혹에서 이기실 수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