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위를 걷는 믿음

주일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7 views
Notes
Transcript
기도
주님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를 준비해 주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처음 낮은마음 침례교회가 주님과 함께 시작한 교회임을 매번 매순간 저와 성도들에게 보여주시고 저희들이 지치지 않게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항상 일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알게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예배당을 준비해 주셨으니 그에 합당한 열매가 열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열심을 허락해 주시기 원합니다.
낮은마음 침례교회가 세워져가는 모든 과정이 겸손과 정직과 서로에대한 배려와 신실함으로 이루어져갈 수 있도록 성도들 각 사람이 주님께 믿음으로 드려
주제: 물위를 걷는 믿음
본문: 마 14:28-29
2019-12-01
(마14:28)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시거든 물 위로 주께 오라고 내게 명하소서, 하니
(마14:29) 그분께서, 오라, 하시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가려고 물 위로 걸어가되
오늘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고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가는 이야기를 가지고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간 이야기는 마술사들이 패러디를 하기도하고
이 이야기는 성경은 사람이 그냥 재미있게 만든 이야기지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어갈 수 있냐는 조롱석인 비웃음을 사기도 하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아는 이야기
물위를 걷는 믿음
고난위를 걷는 믿음
고난 중에 고난을 초월해서 주님을 바라보고 걷는 믿음
파도와 고난과 풍랑을 보면 우리를 그 문제에 빠져서 나오지 못합니다.
(마14:22) ¶ 즉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강권하사 자기가 무리들을 보내는 동안 배를 타고 자기보다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마14:23) 무리들을 보내신 뒤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가 저녁이 되매 거기 홀로 계시더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흩으신 이유는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자신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림당시에 십자가 이외에 어떤 제안도 받아들이실 마음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리기 위해서 모든 일정을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흩으신 것입니다.
무리에게 잘못된 기대감을 갖게하지 않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할때 마음에 생각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거나 내가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적절히 표현되지 않으면 서로 잘못된 기대를 하게 됩니다.
마음만 아니면 되지 하고 무리들이 자신을 왕으로 칭송하는 것을 흐뭇하게 듣고 있으면 안됩니다.
(요6:15) ¶ 그러므로 그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자기 제자들을 강권하사 …자기보다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이 말씀으로 미뤄보아 제자들이 떠나기 싫어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왕으로 추대받은 것에 이들이 마음 한 구석에 듣기에 좋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흩으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먼저 보내는 것입니다. 제자들이라도 지금 자리에서 사라져야 무리들이 흩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고싶어하지 않는 것을아시고 강제로 권해서 먼저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만 남겨 두고 자신들만 먼저가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가 저녁이 되매 거기 홀로 계시더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온전히 대화할 수 있는 기도시간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는 항상 호흡처럼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렇게 거룩히 구별된 시간을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으로 드려지는 것은 중요한 신앙생활 중 한 가지 입니다.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거룩하신 주님과 마주 앉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감히 거짓없이 자신을 보이는 것은 두렵고 떨리기도 한 일이지만 나를 위해 아무 해도 주지 않고 좋은 것으로 나를 위로해 주실 분은 오직 주님이외에는 아무도 안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매번 질문하고 묻고 맡기는 삶을 습관처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과 단 둘이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중요한 시간입니다.
(마14:24) 그러나 이제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바람이 반대로 불므로 파도로 인하여 요동하더라.
제자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명령한데로 가고 있는데 풍랑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부러 시험 속으로 넣으신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인 정황으로 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고 나서 자신이 따로 타고 갈 배가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먼저 떠나는 것을 망설인 이유도 이런 상황에 기인한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앞으로 이 제자들이 홀로 서서 감당해야 할 일들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들을 준비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겠죠.
우리도 훈련받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를 고난과 시험 속으로 밀어 넣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순종하게하시고 더 큰 명령에 순종하게 하기위해서 항상 문제와 고난 속에서 이기는 법을 훈련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풍랑이 일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그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게 전개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고전10:13)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감당할 수 있는 것”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요?
제가 헬스장에 가서 개인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습니다.
무거운 역기를 들고 운동을 하면 끝트머리에서 트레이너가 “한개 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가 있는 힘껏 더해서 힘에 부쳐서 더 하기 힘들때까지 몰아붙침니다.
바로 “한 개 더”하는데 까지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곳까지 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근육양이 늘어서 더 무거운 무게를 들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14:25)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가시니
주님은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굳이 외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모를 수 없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주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 이시고 이 땅의 법칙을 통제하시는 분이심을 보이시는 방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바다와 관련해서 어떤 모습으로 성경에 기록되었는지 몇 구절 살펴보겠습니다.
(욥9:8) 그분께서 홀로 하늘들을 펴시고 바다의 파도들을 밟으시며
주님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계10:2) 그가 펴 놓은 작은 책을 손에 들고 오른발은 바다 위에 왼발은 땅 위에 두고
(사51:10) 바다 곧 큰 깊음의 물들을 마르게 하시고 바다의 깊은 곳들을 길로 만드사 속량받은 자들이 건너게 하신 이가 주가 아니시니이까?
주님은 어느 길을 취하시든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하실때는 바다를 갈라서 길을 내서 구하시고
지금 제자들을 위해서는 바다 위에 길을 내시고 오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14:26) 제자들이 그분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불안해하여 이르기를, 영이다, 하고 두려워서 소리 지르거늘
“영이다 … 두려워서”
(롬1:21)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자기들의 상상 속에서 허망해지고 또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지 헛된 것들에 마음이 빼앗겨서 참 하나님과 거짓 우상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스스로 어두워져 있습니다.
제자들은 신격의 예수님을 보고 자신들의 상상 속의 우상이나 허깨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14:27) 즉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마14:28)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시거든 물 위로 주께 오라고 내게 명하소서, 하니
“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내 앞에 계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은
모든 염려와 두려움에서 평안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와 엄마인것을 알고 나면
모든 긴장에서 평안을 얻게 되고
그 평안이 주는 감사에 눈물마저 흐르게 되는 경험도 있으실 겁니다.
주님이 “나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면 그 무엇도 나를 해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절에서 바울이 고린도지역에 머물때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행18:9) 그때에 [주]께서 밤에 환상으로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행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공격하여 해치지 못하리니 내게는 이 도시에 많은 백성이 있느니라, 하시더라.
(행18:11) 그가 거기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바울은 고린도지역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만일 주시거든”
베드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아직 주님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만일” 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분을 올바로 알았다면 물위를 걸을 수 있는 분은 주님 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우리 육신은 작은 변수에 우리의 믿음을 다 잊어버리고 연약한 모습만 남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14:29) 그분께서, 오라, 하시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가려고 물 위로 걸어가되
(마14:30)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고 두려워하다가 가라앉기 시작하며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14:31)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미사 그를 붙잡으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오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하시니라.
“물 위로 걸어가되”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고 물위를 걷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와 고난과 혼란을 초월해서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것
세상에 문제에 휩싸이지 않고 그 위를 걸어가는 신앙생활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
(사26:3) 주께서는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고 두려워하다가”
베드로가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만 바라 볼때는 바다의 파도가 베드로를 시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자신이 놓인 환경을 바라보는 순간 주님과의 평강이 깨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시선이 주님에게서 떨어지게 되는 순간 우리는 모든 평강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시93:3) 오 {주}여, 큰물들이 소리를 높였고 큰물들이 자기들의 소리를 높였으며 큰물들이 자기들의 물결을 높이나이다.
(시93:4) 높이 계신 {주}께서는 많은 물들의 소리보다 강하시며 참으로 바다의 강한 파도들보다 강하시니이다.
세상의 고난과 문제는 점점 여러분의 삶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문제보다 더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두려움의 저변에는 주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각으로 들어오는 느낌에 믿음을 빼앗기는데서 시작되는 두려움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적 감각을 자극하는 정보에 마음을 빼앗기기 보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우리의 믿음이 붙들여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훌륭했던 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몸을 가치있게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두는 믿음입니다.
(롬4:19) 그가 백 세쯤 되었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여 이제는 죽은 자기 몸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또 사라의 태가 죽은 것도 고려하지 아니하였으며
“가라앉기 시작하며”
환경에 사로잡혀 믿음이 휘청거리자 베드로는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의 삶을 낙담시키기도 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문제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시43:5)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내 얼굴의 건강이시요, 내 [하나님]이신 그분을 내가 여전히 찬양하리로다.
베드로 앞에서 벌어지는 일도 위 말씀과 같은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나”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 어찌 불안해 하냐고 묻고 계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수영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2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그분은 [주]시라, 하니 이제 시몬 베드로가 그분이 [주]시란 말을 듣고는 (벗고 있었으므로) 어부의 덧옷을 걸친 뒤 바다로 뛰어들더라.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의 수영 실력을 믿고 바다로 걸어갔을 것입니다.
빠지면 수영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력이 아닌 주님의 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시험을 통해서 뼈저리게 배웠을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아직 구약의 경륜에 속한 상황입니다.
(합2:4) 보라, 위로 높여진 자의 혼은 그의 속에서 곧바르지 아니하나 오직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믿음이 연약해서 물에 빠질 것을 아셨을 겁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물에 빠져 죽기 직전까지 반발 자국만 더 오길 기다리셨을 겁니다.
베드로가 걸아간 만큼이 베드로가 감당할 만큼의 시험이었을 겁니다.
베드로의 입으로 주님을 구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드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장해서 지난번 보다 더 주님을 바라보고 물위를 걸어갈 수 있길 기대하실 것입니다.
(마7:7) ¶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주님께 입을 열어서 말하셔야 합니다. 주님께 외치셔야 합니다.
베드로는 죽을 것 같은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외쳐지지 않겠습니까?
절실한 심정으로 주님께 구하셔야 합니다.
지금의 삶이 주님을 찾기에 절실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 아직 즐길 것이 남아있다면
여러분의 입은 주님을 향해 간절히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실 수 있는 눈이 떠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도 절실하게 기도하셨습니다.
(히5:7)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
“사망” 하나님과 잠시라도 떨어여 있어야 하는 그 상황이 얼마나 두렵고 견디기 힘든 순간이 될지를 아시는 주님께서 아버지께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들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죄로 인해 실패할때 이렇게 두려워해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위험을 알게 되면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의 기도는 간결하지만 정확합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구원자 이십니다.
지금 그분만이 나를 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절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아니라도 구해 줄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주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처님도 구해주실 수 있고,
성모 마리아도 구원해 주실 수 있다고 믿고 계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미사 그를 붙잡으시며”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내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해지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돌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백성은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요10:28)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주님은 자신의 소유가 된 자들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붙들어 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이 베드로를 붙잡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음을 내디딘 것은 주님께 가기위해서 였습니다.
그분을 향해 가는 그 길은 우리가 넘어져도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일으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붙드시면 어떤 세상의 풍랑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떼어 놓지 못합니다.
(시63:8) 내 혼이 주의 뒤를 바싹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떠받치시거니와
“오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들 만큼의 믿음은 있었지만
그 믿음을 지속시킬 힘이 부족했습니다.
주님의 책망은 우리의 연약함을 되돌아 보고 그 믿음이 더 강해지도록 가르치시기 위해서 입니다.
책망받지 않는 신앙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여러분에게 책망이 되어야 합니다.
책망받기 싫어한다면 신앙은 결코 성장할 수 없게 됩니다.
베드로는 심지어 사도 바울에게 조차 책망을 받았습니다.
(갈2:11)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책망 받아야 했으므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갈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으나 그들이 오매 할례자들에 속한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가 뒤로 물러가 자신을 분리하였으며
(갈2:13) 다른 유대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느니라.
(갈2:14)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걷지 아니하는 것을 내가 보고 그들 모두 앞에서 베드로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의 방식대로 살고 유대인들처럼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이방인들을 강요해서 유대인들처럼 살게 하느냐? 하였노라.
성도간에 책망도 기꺼이 받을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책망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진리를 대적하는 일에 서로를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풍랑이 먼저 멈추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손을 붙잡을 당시 풍랑은 계속 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풍랑을 먼저 멈춰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풍랑 속에서 손을 내밀고 그를 붙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후1:4)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위로 받을 때 얻는 위로를 힘입어 우리가 어떤 고난 중에 있는 자들도 능히 위로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7) 아니라.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
주님은 우리의 믿음 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까지 다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환란 가운데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분도 우리를, 나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연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주님만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 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고 마귀는 여러분이 그냥 걸어가게 놔두지 않습니다.
더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더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어서
여러분을 실족하게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지켜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아십니다.
주님은 내가 어디에서 넘어질지 아십니다.
그때 우리가 넘어져서 힘들때 주님을 찾으면 주님은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14:32) 그들이 배에 들어갈 때에 바람이 그치니 And when they were come into the ship, the wind ceased.
“바람이 그치니”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도착애서 배에 들어가니 바람이 그칩니다.
주님은 바람이 일게도 하시고 잠잠하게도 하십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주권은 자신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65:6) 그분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산들을 굳게 세우시고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시65:7) 바다의 소란함과 바다의 파도의 소란함과 백성들의 소동을 진정시키시는도다.
(마14:33) 이에 배에 있던 자들이 와서 그분께 경배하며 이르되, 진실로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 장면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바람과 풍랑 속에 놓이는 시험을 통해 이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번 시련을 통해 주님안에 신성이 충만히 거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은 목격하게 하고 기록하게 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더욱 확실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눅1:4) 이것은 각하로 하여금 각하가 이미 설명 받은 그 일들이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분께 경배하며”
우리는 그분이 드러내신 일에 합당한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도움의 손길을 알았다면 그분께 합당한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시50:15)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