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떠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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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을 떠나는 삶
본문 : 갈 1:6-7
2019-11-03
(갈1:6)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1:7) 그것은 또 다른 참 복음이 아니며 다만 너희를 어지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 하는 자들이 더러 있도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는 사탄에 의해서 말씀을 떠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숨습니다.
(창3:7) 그들 두 사람의 눈이 열리매 그들이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함께 엮어 자기들을 위해 앞치마를 만들었더라.
이들의 육신적인 눈이 열립니다.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인 눈은 가려지게 된 것입니다.
(요9:39) ¶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려고 이 세상에 왔으니 이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눈멀게 하려 함이라, 하시매
(요9:40) 그분과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 중의 어떤 자들이 이 말씀들을 듣고 그분께 이르되, 우리도 눈멀었느냐? 하니
(요9: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눈멀었다면 너희에게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우리는 본다, 하고 말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
(창3:8) 그들이 그 날 서늘한 때에 동산에서 거니시는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주} [하나님] 앞을 떠나 동산의 나무들 가운데 숨으매
이들이 하나님을 떠나 숨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속임수에 속아서 이상한데로 떠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했던 일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악이 무엇인지 알수 없었습니다.
죄를 지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것이 죄라는 것을 그들은 선악과를 먹지 전까지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결과로 얻은 것은 고통중에 소산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는 그것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하고 말한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고 너는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
(창3:18) 또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네가 들의 채소를 먹으며
(창3:19)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떠난 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마19:16) ¶ 보라, 어떤 사람이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하매
(마19:17)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다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
말씀과 명령에서 떠나는 것은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것은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결국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한 사망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이고
그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는 가지처럼 버려져서 시드나니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 불 속에 던져 태우느니라.
바울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인 복음을 전하는데 이들이 속이는 자들에 속아서 이상한 복음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해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떠나는 것은 생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눅15:11) ¶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눅15:12) 그중의 작은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주소서, 하니 아버지가 자기 살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매
아버지가 죽어야만 받을 수 있는 자신의 몫을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 처럼 달라고 합니다.
신약성도들은 하나님께 우리가 빚진자 입니다.
“주소서”신앙도 주의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에게 그들 몫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눅15:13) 그 뒤 며칠이 안 되어 작은아들이 전부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더니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몫을 가지고 다른 땅으로 갑니다.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물질로 재물로 즐기는 삶은 결국 맘몬신의 노예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것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일것입니다.
그가 “자유”라고 생각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을때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눅15:14) 그가 다 탕진한 뒤에 그 땅에 큰 기근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니라.
(눅15:15) 그가 가서 그 나라의 국민 중 하나에게 연합하니 그 사람이 그를 자기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니라.
(눅15:16) 그가 돼지들이 먹는 곡식 껍질로 자기 배를 채우려 하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아니하므로
작은 아들은 이방나라에서 종의 위치에 있게 됩니다.
세상에서 노예처럼 살게된 것입니다.
(눅15:17)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그리고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때 자신에게 얼마나 풍요로운 삶이 주어졌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때 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을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서는 좋은 것이 많은데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한 거지?
좋은 신발도 많고 좋은 옷도 많은데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한 거지?
지금 돼지와 같이 먹고 사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올 수 밖에 없게 만든 것이 생명의 위협입니다.
“나는 굶어 죽는구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생명의 위협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를 떠나면서 격게 되는 것은 굶주림과 고생이었습니다.
그가 굶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아버지께 돌아갈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며 죄를 탐익할 여유가 있는 동안에는 아버지께 돌아갈 생각을 못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과 건강, 때로는 젊음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아직 하나님께 돌아갈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드디어 죽을것 같을때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눅15:18)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내 아버지께 가서”
진정한 회개란 먼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내가 돌아갈 대상이 정확해야 합니다.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바알신을 찾아가고 맘몬 신을 찾아가서 내가 그때 지금보다 조금 나았는데 하면서 다른 신을 찾아가는 것은 올바른 회개의 출발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재앙을 내리는데 이들이 뭐라고 하는 보시겠습니다.
(렘44:17) 무엇이든지 우리 입에서 나아가는 것을 반드시 행하여 우리가 행하던 대로 곧 우리와 우리 조상들과 우리 왕들과 우리 통치자들이 유다의 도시들과 예루살렘의 거리들에서 행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여왕에게 음료 헌물을 부으리라. 그때에는 우리가 양식을 풍성히 소유하고 일이 잘 되어 아무 재난도 보지 아니하였으나
(렘44:18)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여왕에게 음료 헌물 붓는 일을 그만둔 뒤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고 우리가 칼과 기근으로 소멸되었느니라, 하며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던 때가 더 풍요로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정말 갈때까지 가야 정신을 차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명쾌합니다. 22절
(렘44:22) 그런즉 {주}께서 너희의 악한 행위들과 너희가 저지른 가증한 일들로 인하여 더 이상 참지 못하셨으며 그런 까닭에 너희 땅이 이 날과 같이 황폐한 곳이 되고 놀랄 일과 저주거리가 되어 거주민이 없게 되었느니라.
너희가 이전에 조금 풍요로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나마 참아 주셨던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참지 못하게 되셔서 이와같은 재앙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늘의 여왕에게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곳으로 자신이 잘못하던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올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내가 파란색 티를 입고 나갈때 좋은 일이 일어났었나?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올바른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범했던 잘못도 자신의 죄를 정확히 고백하지 못해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자백해야 하는데
여자는 뱀때문이라고하고 남자는 여자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을 올바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비겁한 변명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은신 분이십니다.
긍휼이 많으신 아버지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눅15:19)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하고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삼아 주소서”
19절 이것이 회개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자격없는 자인지를 철저히 깨닫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자신을 품꾼으로라도 받아달라고 합니다.
자신을 종의 자세로 낮추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결과로 취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들의 신분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우리가 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그분의 긍휼과 은혜로 아들의 지위를 확보해 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종의 자리라도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나은 자리라는 것을 본인은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시84:10) 주의 뜰에서의 한 날이 천 날보다 나으니이다. 내가 사악함의 장막들에 거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 [하나님]의 집 문지기가 되겠사오니
(눅15:20)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19절까지 마음의 결심을 한 것입니다.
20절에서는 실행에 옮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결심은 하지만 실행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은 아들은 결심한대로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는 실행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실행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실행하지 못하는 회개는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사울 왕도 회개를 여러번 합니다. 사무엘을 붙잡고도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회개에 합당한 행동과 순종을 하지 않습니다.
가롯유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상거지가 된 아들을 알아 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달려갑니다.
작은 아들이 결심하고 돌아갈때
아버지가 먼저 알아 봅니다.
아들이 먼저 알아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알아 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달려갑니다.
그리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눅15:21) 아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
올바른 회개와 깨달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지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격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 아는 것처럼 자신이 무슨 자격이나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올바른 상태가 아닙니다.
(갈6:3)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나니
(눅15:22)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아버지에게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족히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항상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옷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사61:10) 내가 {주}를 크게 기뻐하며 내 혼이 내 [하나님]을 기뻐하리니 이는 마치 신랑이 장식으로 자기를 꾸미고 신부가 보석으로 자기를 단장하는 것 같이 그분께서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시고 의의 겉옷으로 나를 덮으셨기 때문이라.
(마7:11)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눅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우리의 회복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은혜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들이 아들이 될 자격이 있을 만큼 잘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의 통열한 회개만으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회복이 되고 잔치를 벌립니다.
참 복음은 예수님을 믿으면 잘먹고 잘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 복음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우리에게 죽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생명이신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떠나는 것은 죽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말씀에서 떠난 삶은 우리에게 죽은 삶입니다.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하나님은 돌이켜 돌아온 자들에 대해서 그들의 범법에대해 언급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십니다.
(겔18:21) 그러나 사악한 자가 자기가 범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내 모든 법규를 지키고 율법에 맞고 옳은 것을 행할진대 그는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
(겔18:22) 그가 범한 모든 범법 곧 그것들이 그에게 언급되지 아니하리니 그는 자기가 행한 자기의 의 가운데서 살리라.
우리가 죄 문제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해결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고 아버지의 아들의 지위를 받게 되는 것이 참 복음입니다.
(눅15:25) 이제 그의 큰아들은 들에 있더라. 그가 오면서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15:26) 종들 중의 하나를 불러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으니
(눅15:27) 종이 그에게 말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는데 당신의 아버지가 그를 무사히 건강하게 받아들였으므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매
(눅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나와서 그에게 간청하매 .
(눅15:29) 그가 응답하여 자기 아버지께 이르되, 보소서, 이 여러 해 동안 내가 아버지를 섬기며 어느 때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거늘 아버지께서 내가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내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결코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내가 아버지를 섬기며”
자가가 섬긴 일을 대단한 가치로 여기는 마음은 결국 교만에 삼켜진 생각입니다.
자기가 아버지로 인해 안전하게 풍요를 누렸다는데 마음을 두지 않고 자신의 수고에 마음을 두는 것은 자신이 교만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거늘”
자기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지극히 자기 기준의 이야기 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하여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했습니다.(빌3:6)
(눅15:30) 그러나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버지의 이 아들이 돌아오매 즉시 아버지께서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하니
누군가 나보다 더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이 충분하고 정당한 분량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다른 사람이 무언가 더 받았다고 생각하면 분노를 느끼고 배가 아파하는 것입니다.
포도 농장에서 일하던 종도 받기로 한 1달란트를 받고도 늦게 일한 사람이 자기와 같은 1달란트를 받은 것에 오히려 선을 베푼 주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눅15:31)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네 것이니라.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자세 그것이 다윗이 취한 자세입니다.
(삼상26:24) 보소서, 이 날 내 눈이 왕의 생명을 심히 귀하게 여긴 것 같이 {주}의 눈이 내 생명을 심히 귀하게 여기사 그분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져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매
아버지의 아들이 되면 아버지의 모든 것들을 풍요롭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말하는 내용 중에 나온 간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행26:17) 내가 너를 백성과 이방인들에게서 건져 내어 이제 그들에게로 보내는 것은
바울이 백성들 가운데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건져내서 그들에게로 다시 보내셨는데 그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행26:18)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 또 그들이 죄들의 용서를 받고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된 자들 가운데서 상속 유업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더이다.
이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은 죄들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이 죄들의 용서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풍성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추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그들이 악을 알고 있다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에게서 온전하게 붙어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빛에서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점점 혼돈과 분노와 증오로 차오르게 됩니다.
그들은 점점 세상과 하나님께 분노와 원망을 합니다.
그들은 건전한 생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약 성도는 주님께 생명을 빚진자 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값없이 받은 생명을 받음으로 해서
주님께 빚진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는데 우리의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그들이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와 주님의 상속유업에 함께 참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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