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진정한 가족(막 3: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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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것처럼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는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낡은 옷 같고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생배 조각처럼 새롭고 새포도주 처럼 신선한 예수님의 모습을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비정상적으로 치부하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는 옛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예수님을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번째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못된 가르침으로 백성을 현혹하는 문제적 인물로 보고 조사했습니다. 이들은 두가지를 들어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하나는 ‘예수가 바알세불에 귀신들렸다’는 비난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가 귀신들의 왕에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비난이었습니다. 이 두 비난은 별개가 아니라 예수님의 귀신 축출 능력과 관련된 것으로 그 내용이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알세불은 사탄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것처럼 예수님은 하늘로 부터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신 분이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때 그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하거나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요, 서기관들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주장을 펼쳤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그들의 말이 말도 안되는 궤변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사탄이 어째서 사탄을 공격하겠느냐고?고 질문하시며, 귀신이 왜 귀신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탄의 나라가 분열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서기관들의 논리를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4-26절까지에서 예수님은 조건문을 사용해서요, 일단 서기관들이 전제한것을 받아들입니다. 사탄의 나라에 내분이 일어날 수 없지만, 내분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내분이 생기면 그 나라는 자멸하게 되고, 또 집에도 내분이 있게 되면 그 집이 망하게 되듯이, 사탄이 사탄을 대항해서 일어나는 일이 있게되면, 사탄은 설수 없으며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멸할 것이 뻔한데, 어떻게 사탄의 나라에 내분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한 자를 결박한 후에 그집 세간을 털어갈 수 있듯이 예수님 앞에서 귀신이 쫓겨나는 일이 새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강한자, 곧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이미 이기셨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한 말씀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을 결박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자유케 하시는데 이 일을 귀신의 일로 치부하며 거부하면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귀신의 권세 아래 남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세력은 사람들을 죄안에 가두어 악한 생각을 따라 살도록 합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오늘 이곳에도 역사하시며 사람들을 귀신의 올무에서 해방하고 계십니다.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탐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거짓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폭력성과 부패성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이런 해방은 귀신이 권세잡은 세상에서는 파격이고 일탈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파격과 일탈이 비정상을 벗어나 정상이 되는 현상입니다. 이 정상화를 비정상화로 규정하고 거부하며 핍박하는 일은 성령의 운동에 반하는 일이며, 이 해방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귀신들렸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이 여전히 위력을 발위하는 이 세상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정상의 세계에서는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비정상으로 간주한 또다른 무리는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의 가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말과 귀신들렸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아 두려고 찾아나섰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이 자신을 찾으러 왔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주위에 둘러앉은 자들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귀신들린 사람 취급 받고 미친 사람 취급받는 예수님이었지만, 그래서 가족들도 그의 행보를 저지하려고 왔지만,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동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기는 커녕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유대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좁은 길을 따라온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가족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이제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습니다. 혈육보다 더 진한 가족애를 나누는 새 가족이 탄생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피를 나눈 형제라도 독립하면 1년에 불과 몇 차례 만나지 못합니다. 가정마다 다르겠지만, 대개 명절과 가족 행사때 만나는 것이 고작입니다. 아에 반해 교회 성도들은 일주일에 한두 차례 만납니다. 주일에, 사역을 하면서, 또 주중 교회 모임들을 통해 빈번한 만남을 가지며 이를 통해 진짜 가족보다 더 친하게 지내기도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결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비록 성격, 직업, 출신지역, 학력, 정치적 성향등에서 다양하지만 교회는 혈연가족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명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다 보면 외로울때도 있고 소외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조롱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눈총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이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연결된 하나님의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성도들을 가족같이 보듬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가족이기에 함께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은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가 지켜가야할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교회의 면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이 가족으로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 가족공동체가 확대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길입니다. 어렵고 힘들고 막힌길로 가고 돌아가야 할때에 여러분 주변에 가족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가족으로 묶어 주신 우리 형제 자매들과 사랑을 나눈다면 그 험난한 길도 기쁘고 담대하게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