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0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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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
여러분! 오늘 이렇게 온라인선교팀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어 너무나도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 자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와 풍성한 교제로 함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편지의 형식을 가진 말씀입니다. 편지이기 때문에 수신자가 있고, 그 목적도 존재합니다.
고린도전서의 수신자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겠죠.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러 서신서에서 보았듯이,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요?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존재하던 말씀선포자들 중에 유대 그리스도인들, 그 중에서도 서신서에 등장하는 소위 거짓교사들은 바울의 이 복음을 잘못된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지키는 행동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여겼던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인식 속에서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바울이라는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근본이 없다는 것이죠. 사실 그는 본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었죠. 심지어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박해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때려잡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반대자들은 그것을 가지고서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공격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있다보니, 바울은 고린도전후서 곳곳에서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며, 오히려 자신과 같이 부족한 자를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은혜임을 선포합니다.
그것이 고린도전후서의 큰 목적 중 하나였고요, 두번째 목적은 바로 교회 내에서의 분열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앞선 첫번째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겠죠. 바울을 지지하거나 그렇지 않은 이들의 분쟁이 있을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은사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서 자신이 가진 은사들을 가지고서 자신의 은사가 귀하다, 그렇기에 자신이 더 거룩한 자다 라는 식으로 분쟁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나는 방언을 하니 방언을 못하는 너보다 내 신앙이 더욱 대단하고 거룩한 신앙이다 라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그리고 사회적 신분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신분이 있었죠. 유대인들은 자신들과는 다르게 말씀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실제로 죽게 만들었던 유대인들이 말씀을 잘못 지키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계급의 문제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귀족도 있었을 것이고, 종도 있었을 것이고, 경제적인 차이도 존재했을 것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상황들 속에서 교회가 여러모로 다투고 있었던 것이 당시 고린도 교회의 큰 문제였습니다. 그랬기에 바울은 교회가 하나되도록 하기 위하여 고린도전후서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또한 이 두번째 목적,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목적에서 말씀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시작부분인 12절과 13절을 보면 바울이 뭐라고 하죠? 우리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그리스도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인 것과 우리가 하나인 것이 어떻게 이어지죠?
바로 우리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 못박힐 수가 있었구요,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우리에게 덧입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우리가 하나라고 해서 다 완벽하게 똑같이 되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그대로고, 삶의 배경과 모든 것들이 그대로입니다.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의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겠죠. 그래서 바울은 14절부터 그 다름에 대해서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그 내용을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여 설명을 합니다.
몸, 즉 사람의 신체는 하나이지만, 그 부분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있지 않을래! 라고 해도 몸이 아닌 것이 아니고,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있지 않을래! 라고 해도 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죠? 온몸이 눈이면 들을 수가 없을 것이고, 온 몸이 귀이면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었음을 말합니다. 다 똑같은 지체가 모이면 몸이 될 수 없고, 서로 다른 지체가 모두 모여야 몸이 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몸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서로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으로 한번 돌아와볼까요? 여러분들께 교회라는 곳은 언제나 행복하고 즐겁고 은혜로운 곳인가요? 그렇다면 너무나도 감사하겠지만, 사실은 매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교회에 있는 수많은 지체들의 다양한 모습 때문이겠죠.
저 사람의 저 모습이 나한테 맞지 않고, 저 사람의 저 행동이 나에게 거슬리고 하는 것들이 교회 안에서 우리가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에 어려움을 주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내쫓고, 혹은 내가 떠나고 하는 것들이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 맞는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만 존재한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온 몸이 눈이고, 온 몸이 귀인 몸이 되고 말 것이고, 그것은 올바른 몸이라고 할 수가 없겠죠.
그런 것처럼 교회는 서로 다른 모습들의 서로 다른 생각들이 함께 존재해야만 하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서로 행동이 다르기에 다른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고, 내가 행하지 못했던 것들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온전한 몸이라는 것이죠.
또 반대의 상황도 존재할 수 있겠죠. 저 사람의 모습이 싫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나도 저걸 소유하고 싶은 경우들도 존재합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의 경우에도 다른 이들의 은사를 부러워해서, 특정한 은사만을 가지려 하는 모습들이 존재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온전한 몸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게는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귀에게는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 모두에게 동일한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눈은 자신의 능력대로 보고, 귀는 자신의 능력대로 들어야 사람이 올바로 살 수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능력들을 온전히 사용해야 교회가 올바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장로님께서 당회에서 결정하는 것들이 좋아보인다고 막 그거 하겠다고 하고, 교회에 새로 온 초심자가 목사님들 설교하는 거 있어보인다고 강대상에 올라가고 하면 과연 교회가 제대로 돌아갈까요? 그렇지가 않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할대로, 저는 말씀을 전하고, 장로님들은 교회의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고, 성도님들은 예배에 전심으로 참여하고 할때에, 교회는 아주 잘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으로 나아가기까지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능력이 대단치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신체 중에서도 손톱과 같이 다른 부분에 비해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 반드시 교회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이들은 계속 그렇게 있는 것이 맞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죠.
바울은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 언급을 합니다. 22절에 보면,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덜 귀해 보이는 것들을 더 잘 입혀주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는다고 하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몸을 고르게 해서 부족한 지체에게는 귀중함을 더하셔서 모든 몸이 서로 같이 돌보도록 하셨다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두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앞서 말한 손톱, 몸 전체를 보았을 때에는 작은 부분 같고, 연약해 보이지만, 손톱이 없다면 어떨까요? 우리 삶에서 매우 불편함이 있을 것입니다. 바닥의 동전조차 집지 못하고, 캔음료 하나 열지 못하겠죠.
그리고 이 작은 손톱에 상처가 나면 어떻게 되나요? 우리가 잘 알듯이 몸 전체에 고통이 옵니다. 어찌나 그 고통이 강력하면 고문의 방도로 쓰이기까지 하겠나요.
이런 것처럼 우리 몸은 서로가 서로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한쪽 다리가 아프면 다른 쪽 다리가 그 무게를 지탱해주고, 허리가 아프면 손으로서 등을 지탱하기도 하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교회의 부분들 중 어떤 것이 연약해보이고 보잘것 없어보이더라도 그 하나가 사라진다면 교회는 본연의 모습을 갖추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 신기하게도 저는 우리 삼일교회에서 어찌보면 그렇게 관심의 중심에 있지 않은 부서들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주로 섬기는 사역인 학원선교부가 그렇습니다. 이 사역은 기숙사를 갖고 있는 여러 학교들에서 주말에 교회를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예배를 열어주는 사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사역은 교회 내에서보다는 교회 바깥에서 진행될 때가 많죠.
그러다보니 어쩌면 교회 안에 계신 성도님들은 이 사역이 어떤 사역인지를 잘 모르시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제가 삼일교회의 교역자라는 것조차도 잘 모르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역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이 사역을 통해 아직도 많은 청소년들이 주님을 뜨겁게 찾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통해 주님을 간절히 찾는 청년들이 발굴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온라인선교팀 역시도 어쩌면 그러한 사역의 자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교회 내에서 잘 나타나는 사역이 아닙니다. 성가대나 이런 사역들 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사역이 또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사역이 없어진다면, 교회는 큰 것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왜냐, 우리가 행하는 사역의 대상이 교회 내부도 물론 있지만, 주로 교회 바깥의 사람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등 여러 매체들에 게시물 올리는 것? 작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거 뭐 어렵냐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러한 누군가는 작다고 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영혼들을 구원하십니다.
누군가는 분명 잠시잠깐 지나가는 그 게시물들을 통해 이전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하고 교회 안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사역이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몸의 각 지체들에게 보는 역할, 듣는 역할을 주신 것처럼, 우리는 온라인을 통해 교회를 전하고,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 역할에 충실히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지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때, 그것에 헌신하며 나아갈 때, 교회는 교회로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고, 오늘 마지막 말씀에 나온 것처럼 모든 교회가 함께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총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첫번째 질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지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찬가지겠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결국 우리가 교회 안에서 각자의 역할들을 충실히 하고, 그것을 통해 모든 교회가 즐거워하게 된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고, 우리 성도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온라인선교 팀원들이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교회의 지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함으로, 우리를 통해 영혼이 구원받고, 또한 그것을 통해 교회가 기뻐하고, 또한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그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1. 말씀을 놓고. 우리 모든 팀원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충실히 헌신할 수 있도록
2. 우리 모든 팀원들을 놓고. 모든 팀원들이 하나되어 나아갈 수 있도록, 지체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도왔듯이, 우리도 서로를 돕고 나눌 수 있도록.
3. 올 한해의 사역을 놓고. 2024년 진행되는 사역들이 교회의 나아가는 방향에 귀히 사용될 수 있도록. 특히 70주년 가운데 우리의 사역을 통해 새로운 70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그 밑거름이 되도록.